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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처럼 단단한 경계에서 핀 저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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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처럼 단단한 경계에서 핀 저 꽃이여!

[철학자의 서재]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

틈과 감옥에서 피어난 언어의 꽃

암벽 사이의 '틈' 속에서 인간 조상은 목숨을 이어왔고 '금'이 간 돌조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그 벌어진 틈을 '경계'라고 부르든, '차이'라고 부르든, '세계' 자체라고 부르든, 그 틈을 경계로 하여 우리는 '나'가 되고 '너'가 되며,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된다. 그러나 어떤 틈이 벌어진 곳, 금이 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단일하고 통일적인 완전함에 대한 강박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던'한 이 세계가 구축했던 근대인의 존재 방식이었다.

봉합되고 매끄러워진 그 경계선은 필연적으로 어떤 분열된 것들을 덮어버리고 그것들이 본래 '하나'였다고 강요한다. 그렇지만 어떤 단일한 틀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중심을 향하는 구심력이 '균열'에 대한 인식을 억압하고 '경계'에 대한 사유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얇게 메워진 균열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균열의 고통을 인식하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방향성을 정하는 것이다.

그 방향성을 어린 나이부터 필연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 있다. 우리 역사와 사회의 부조리한 '울타리 치기'와 그에 맞서는 전선(戰線)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이들 중의 한 명인 그는 재일 조선인 지식인 서경식이다.

그가 경계의 지식인인 것은 개념화될 수 없는 역사와 그 역사가 남긴 현재의 상처들을 자신이 적대시하는 공동체의 언어로 사유하고 그 언어를 무기로 삼아 자신의 지적 고투를 개진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의 근작, <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권혁태 옮김, 돌베개 펴냄)은 우리에게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환기시켰던 그의 지적 여정을 모아 놓고 정리한 책이다.

▲ <언어의 감옥에서>(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모어(母語, mother tongue)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익힘으로써 무자각인 채로 자신 속에 생겨버리는 언어"라면, 모국어(母國語, native language)는 국가가 정해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인민에게 가르치고 주입하는 언어이다. 결코 버리거나 포기할 수 없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필자는 모국어가 아닌 모어로서 주어진 '일본어'로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야 하는 운명을 회피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환기시키며 자신의 몸에 내장된 구 제국주의 식민 국가의 언어를 통해 식민주의라는 유령의 현재적 형태들과 싸워야 하는 기묘한 과제를 그는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래서 그는 서승, 서준식 두 형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바라볼 수 있었고, 나아가 인류가 저지른 20세기의 폭력 속에서 민족과 디아스포라, 역사의 상처와 그 극복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실존과 모어의 갈라진 틈에서 촉발된 그의 (번역된) 조선어에서는 소박하면서도 굳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모든 문제의식이 정의(正義)의 가치를 외면하는 강자에게 억압당하고 저항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은 아닐까.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여전히 계속되는 식민주의

"모든 경계엔 꽃이 핀다"라고 했던 시인 함민복의 말을 무작정 긍정하고 싶지만, 나와 이해관계나 뜻을 거의 공유하지 않는 '우리'라고 하기엔 뭔가 좀 부족한 타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자기 중심성, 우리 가족, 우리 민족, 맹목적인 국가주의 등 뒤틀린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는 물론이거니와 서경식이 꿈꾸는 핍박과 고난의 기억을 공유하는 인민들이 서로 돕고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 고난의 연대체로서의 한민족을 상상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하고 이용당한 재일 조선인의 존재론에 기초한 서경식의 '갇힌 언어'는 소통, 연대, 평화라는 '열린 세계'를 지향한다. 스스로를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으로 규정하지만 그의 언어가 엮어 낸 새로운 공동체의 정체성은 사방으로 열려 있고 그 어떤 차별도 없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에서 생환하여 가해자의 폭력을 증언하고 거기에서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1987년 역사가 비참한 취급을 당하고 "증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세계와의 '단절'에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증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자격에 의문을 품고 죽음을 택했다.

서경식은 이 책에서 1990년대 이후 "우파의 야비한 욕설이 울려 퍼지고 리버럴 세력은 공허한 양비론을 중얼거리며 방관"하는 일본 사회와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기만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진단하기에 일본의 대중 매체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과거 그들이 조선인에 가했던 폭력을 모르는 게 아니라 묵살하고 있으며 앞 세대가 저지른 역사적 죄악에 대해 책임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 또한 방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20세기 역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기중심주의'와 '국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의 사죄와 보상이 없는데 어떻게 피해자가 '원한과 분노'에서 해방될 수 있단 말인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식민주의의 망령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탈북자들의 증언과 미디어에 비친 오늘날의 '북녘'은 생존 자체가 목표가 되어 버린 대다수의 인민들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주어진 삶을 견뎌나가는 저주스러운 생지옥의 땅이다. 그럼 이제 저마다 살아남으려고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인 남녘의 대다수 인민들은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떤 자세로, 바로 보기가 난망한 저들을, 우리 안의 타자를, 타자 안의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며 미래의 연대를 상상할 것인가.

북녘의 현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20세기 식민주의의 잔재이며 끔찍한 정치 폭력과 전체주의적 기획이라면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저 인민들에 대한 감수성과 책임감을 어떻게 회복해나갈 수 있을까. 역사와 체제의 통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감성의 통일이건만 20세기의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은 여전히 지난한 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서경식의 말처럼 그 통일은 국민과 시민의 경계를 벗어나 디아스포라를 포함하며 분단과 식민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총체적인 관점의 통일,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어야 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서경식의 시선을 통해 허무주의의 두터운 장막을 뚫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깨달은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분노하고 비판하고 개선해나가려는 삶은 괴롭고, 고생스러우며, 지속적인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은 끝내 옳은 것이다.

실패하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 긍정의 힘은 자기 계발 서적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코 상업화될 수 없는 것이다. '기억 투쟁'이란 우리가 지배당한 대로, 강요받은 대로 다시 그것을 되돌려주지 않으며,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긍정하는 연대의 힘을 통해 역사가 남긴 고통의 벽에 새겨진 시행착오를 다시 우리의 손으로 반복하지 않는 것도 포함하지 않을까.

언어의 힘, 존재의 힘, 역사의 힘

다시 이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면 서경식이 겪었고 겪고 있을, 그리고 겪어 갈 모어 상실의 아픔에 공명(共鳴)할 수 있는 여유와 비움이 독자에게 필요하다.

세상에 빛이 있음과 동시에 언어가 있었듯이, 우리에겐 존재함과 동시에 모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삶이 디디고 선 역사의 지층과 현실의 부조리로 삼투해 나가지만, 다른 한편으론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는 그 언어가 만들어 내는 괴리와 균열 속에서 아파하고 깨어 있으려 한다.

'나다운' 것을 찾는 것에서 발원한 그의 언어는 나다운 것처럼 포장된 것으로 인해 쓰러진 '우리다운' 것을 일으켜 세우고, '나와 너'의 차이를 응시하며 지난 역사 속에서 나는 곧 너였고, 너는 곧 나였음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제 작은 호수를 이루어 자신의 시대를 증언하는 그의 말과 글은 그러한 지적 고투가 시대가 부여한 과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부단한 삶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었음을 증언한다. 그의 언어는 그 정체성 투쟁이 곧 나태한 집단적 망각과 싸우는 기억투쟁이고, 편협한 날조와 씨름하는 역사투쟁이며, 안일한 위선에 저항하는 양심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옳은(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른(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하나 구분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언어의 세계, 곧 로고스의 영역에서는 힘이 셀뿐만 아니라 때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름의 삶들이 서로 부딪치는 사람 세계, 곧 땀과 피와 눈물이 교차하는 현실 영역은 언어가 만들어낸 그 세계에 지배당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배반한다. 헌데, 우리는 언어와 논리를 통해 '실제적인 것' 속의 진실을 이해하고 욕망할 수 있기에, 또한 우리는 삶과 역사를 통해 '가상적인 것' 속의 거짓을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기에 두 세계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도 서로에게 길항한다.

이러한 두 세계 사이에 마찰력이 떨어지고 긴장감이 느슨해질수록 이익 동맹이 아닌, 의지 동맹으로서 우리들이 수놓는 행동과 언어는 생기와 활력을 잃는다. 또 계급, 성별, 세대, 인종, 성적 취향 등 어떤 차이가 권위적인 차별로 귀착될 때 필연적으로 그 차별의 구조 속에서 수혜자들의 언어에서는 악취가 난다. 그들의 능력만이 아니라 그들이 타고난 운으로 보다 많은 것을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자들끼리 사용하는 언어는 필연적으로 오염된다.

그리고 그들이 오염시킨 언어는 그 사회의 여러 틈을 회복 불능한 것으로 바꾸고 그 틈새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증가시킨다. '그들'에게 물려받고 세뇌당한 그 '말'을 비판 없이 사용해서는 그들을 바로 볼 수 없다. '정치'를 프레임의 지배와 의제의 선점으로 보게 될 때,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의 말이 장기판 위의 말싸움을 위한 권력 게임의 도구가 될 때, 우리는 원래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담론의 운동-장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유예되는 차연(差延)의 지속 속에서 특정 언어가 소수 권력 집단의 전유물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썩어가는 고인 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몫 없는 자들'의 말은, 그 목소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언어여야 한다.

언어와 삶, 사유와 현실, 욕망과 역사의 이러한 괴리를 긴장시키면서 화해시키려는 투쟁의 변증법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말과 글이 '무기'가 될 수 있고, 동시에 그 투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살리는 '감로수'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위선부터 베어버리는 '날 선' 우리들의 언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처한 독방의 벽을 긁어대는 비판과 해학의 칼이며, 동시에 이 갑갑한 현실에서의 탈옥을 가능케 하는 상호 존중과 연대의 심장이다.

경험과 사유가 낳은 말과 글은 인간이 던진 그물에 걸려있다가도 이내 우리들 사이를 헤집어놓고 먼 바다로 흘러가 버린다. 아니, 이 모든 진부한 관념어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번잡함과 실재를 도려내는 추상(抽象) 폭력이 제공하는 사치스러움 속에서도, 서로 엮여진 존재로서 함께 쌓아가는 그 말빚을 통해, 우리는 머지않아 사라질 우리 자신의 운명과 화해할 수 있고, 한없는 덧없음과 싸울 수 있으리라.

녹슬지 않는 차가운 칼날의 언어여, 굴하지 않는 따스한 심장의 언어여, 선한 인간들의 그 선함을 지켜주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무장한 세월을 기다리고 끝내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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