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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살았다면, '정치인' 박근혜는 없다!"

[프레시안 books] 김연철·함규진 등의 <만약에 한국사>

고등학교 국사 교사를 하던 시절, 아이들이 내놓는 질문의 범위는 늘 상상 이상이었다. 교과서에 없는 것은 물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아이들은 던졌다. 이런 식이다.

"논개는 익사한 거예요? 아님 강바닥에 머리를 다쳐 죽은 거예요?"
"춘향이와 이 도령은 누가 더 나이가 많아요?"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어, 중국어까지 다 어디서 배웠대요?"

새내기 교사로 무식하긴 아이들이나 매한가지였던 데다, 태어날 때부터 빈곤했던 상상력 탓에 나는 늘 당혹스러웠다. 그저 함께 '까르르' 웃고 넘어갈 질문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진지한 학술적 논쟁이 필요한 질문도 있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 했다면 조선은 안 만들어졌을까요?" 이런 질문이 그랬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그때 마음속으로 아이들을 얄미워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재미난 얘기를 섞어가며 아무리 목소리 높여 수업을 해도, 자기들 졸리면 엎드리고 의자에 기대 잠만 쿨쿨 잘 자더니,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저런 '나도 모르는' 질문을 하다니. "집에 가서 네이버에 물어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는 의연한 척 했다. 마치, 세상 모든 일을 내가 다 안다는 듯이, 참 똘똘한 제자를 두어 미칠 듯이 기쁘다는 표정으로, 6교시 수업 시간의 공기처럼 나른한 목소리를 내며 자상하게 대답해주곤 했었다. 물론 그때 내가 한 말들이 '정답'인지는 그때도 몰랐지만, 지금도 모른다. (아니, 사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마지막 말은 늘 같았다.

"그런데 얘들아,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 들어봤지? 그래서 '만약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란다."

돌아서 교실을 나오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토록 황당한 질문에 이토록 깔끔한 답변을 하다니! 역시 난 훌륭해! 뭐 그런 마음이었을 게다.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의 나는 30대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내 손에 놓인 책, <만약에 한국사>(김연철·함규진·최용범·최성진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는 오랜만에 그때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새삼 '무식한 교사'를 만났던 그때 내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에'가 얼마나 훌륭한 질문인지 저자들의 말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의 비극은 경부고속도로에서 잉태했다

"우리는 왜 '만약에'라는 프리즘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 하는가? 지난 100년 우리는 수도 없이 역사의 갈림길에 섰다.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은 결코 숙명이 아니다. 피할 수도 있었다. 식민지 시기 우리 내부에 확고한 '대안 정부'가 있었다면, 해방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쟁취할 수 있었다. 혹은 해방 정국에서 좌우가 연대해서 분단을 피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우리가 겪은 냉전이 그렇게 가혹했을까? 다른 경로를 상상해보자. 우리가 걸어왔던 길옆에 다른 길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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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에 한국사>(김연철·함규진 외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 ⓒ페이퍼로드
이 책이 예로 들었듯이 자연스럽게 먼저 관심이 가는 대목은 '만약에'가 바꿔놓았을 우리 역사다. 1987년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대선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1973년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암살되었다면, 외환 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 대신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면 등과 같은 가정은 사실 흔한 이야기다. 술자리에서, 어떤 논쟁 중에 자주 하는 얘기들 아닌가.

그러나 색다른 가정들도 <만약에 한국사> 곳곳에서 눈길을 끈다.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늦춰졌다면"과 같은 가정이 그것이다. 포항제철이 기공식을 열고, 전태일이 분신했던 그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해 2년 5개월 만에 준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까지 퇴색하지 않는 '신화'를 낳았다." 말 그대로 "기적적인 속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야당뿐만 아니라 정부와 여당 내에서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있었다. 심지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도 한국의 교통 실태를 조사한 결과, 국토 종단 도로보다는 국토 횡단 도로와 지역 연결 도로가 시급하다고 분석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오랫동안 이 구상을 비밀에 부치다 단독 작품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 경부고속도로의 후과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각도로 불거졌다. 국토의 불균형 발전, 수도권의 인구 집중, 땅 값 상승 등은 말할 것도 없다. "휴일도 없이 매일 19시간 이상 작업하느라 사고가 잇달아 77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공사 현장에서 스러진" 것은 40년도 넘게 지난 2011년 4대강 언저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저자들은 얘기한다.

"'소통할수록 효율은 떨어진다'는 것이 경부고속도로를 '성공리에 건설'한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이 얻은 교훈이었으며, 따라서 이후 정치를 갈수록 일방통행식으로 몰고 가게 됐다. (…) 정부에서 민간까지, 사회 구석구석까지 '일단 길부터 닦고 보자! 그 길이 꼭 필요한 길인지, 그 길에 문제점은 없는지 따위는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철학도 없는 세계관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 세계관이 다리와 백화점을 무너지게 했고,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초래했다고 하여 반성하던 시기도 어느새 잠깐이 됐고, 지금 바로 여기, 온갖 소통을 거부하며 경부고속도로를 밀어붙이던 시절을 방불케 하는 일 추진 방식이 이 땅에 버젓이 재현되고 있다."

이만섭 "10·26 없었다면 지금의 박정희 인기도 없었다!"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인 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의 달라졌을 인생도 시선을 끄는 대목이다. 만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다면, 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박정희가 암살당하기 1년 전인 1978년 12월, 총선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민심은 이미 박정희를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는 대규모 항쟁이 벌어졌다. 전 국회의장 이만섭은 "10·26이 나지 않아 부산·마산 사태가 서울까지 확산되기라도 했다면 박 전 대통령의 말로도 좋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인기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죽어서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었다면 그의 딸이 2012년 독보적인 대권 주자로 자리 잡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암살을 단면으로 잘라 놓고 보면 '독재자가 사라진' 순간이었지만, 오랜 세월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전에 작은 걸림돌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당시에는 땅을 치고 통곡할 순간이었으나 오히려 역사의 발전을 가져온 사례들이다.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가 한 예다. <만약에 한국사>는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가 불발되거나 실패했더라도 다른 쿠데타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고 미국의 노골적 개입과 국정 혼란이 장기화됐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보기에는, 만약에 하는 가정이 무의미한 순간도 있다. 흔히들 역사의 분기점으로 생각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큰 의미가 없는 경우다. 현재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상징하는 대원외국어고등학교의 개교, 흔히들 분단의 시작점 중 하나로 평가하는 <동아일보>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관련 '오보' 등이 대표적인 예다.

"가지 않은 길을 가보면 헤맬 필요가 없다"

한 순간의 선택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고, 그것은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닌 이유가 된다. 또 그것은 내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마냥 지루해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국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이유기도 하다. 저자들을 대표해 김연철은 이렇게 말했다.

"가지 않은 길을 가보면 무엇이 우리가 가야할 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라는 가정은 멀리 있는 것만이 아니다. 현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길을 알면 헤맬 필요가 없다."

책장을 펴면서 떠올렸던 8년 전 아련한 기억이 책장을 덮으면서 이런 의문으로 남았다. 만약, 8년 전 아이들이 어리석은 풋내기 교사를 '만약에'라는 질문으로 가르치고 있었음을 그때 알았다면, 내 인생에 다른 길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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