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자신의 정적을 무수히 감옥에 처넣던 시대. 앞서 끌려간 피의자가 고문을 당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온 얼마 뒤에, 옆 방 사람들이 통방을 하기 위해 주먹으로 벽을 두드린다. 모르스 부호 같은 신호를 통해, 옆 방 사람이 알고자 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오늘은 어떤 새로운 고문이 나왔느냐?'라는 것.
비밀경찰에게 잡혀와 조사를 기다리던 피의자들이 '피떡'이 되어 돌아온 감옥 동료에게 새로 개발된(?) 최신 고문 기법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던 까닭은 굉장히 단순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받아야 할 고문이 어떤 것인지 미리 아는 게 중요했다.
조만간 자신이 당해야 할 고문이나,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고문을 미리 파악하고 나면, 무시무시한 고문도 일종의 '외과 수술'처럼 받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엽기적인 일화를 알게 된 것은 이십대 초반에 읽었던 어느 외국 소설에서였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작가도 제목도 기억하지 못한다.
폴 그리피스의 <현대 음악사>(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펴냄)와 이석원의 <현대 음악>(서울대학교 출판부 펴냄)에 대한 독후감을 고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분명 엉뚱해 보이지만, 현대 음악에 대한 우리들의 공포를 상기해보면 비유의 적실성이 납득될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 음악을 불편하고 난해하게 여기는 근저에는 현대 음악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대 음악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발생하고 발전했는지를 알게 된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보다, 현대 음악을 고문으로 느끼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근 30여 년 만에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을 다시 읽고서야, "작가도 제목도 기억하지 못"했던 소설이 바로 시인 최승자가 번역하고 한길사에서 펴낸 <한낮의 어둠>(한길사 펴냄, 1981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참고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저 가슴 아픈 일화는 이 책 77쪽에 있다.
루바쇼프는 지난번에 수감되었을 때 엄청 맞았다. 그러나 이 방법('한증막'이라는 새로운 고문-인용자)에 대해서는 그저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알려진' 육체적 고통이란 견딜 만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 정확히 알기만 한다면, 외과 수술을 받을 때처럼, 예를 들면 이를 빼는 것처럼 견딜 수 있었다. 정말 안 좋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경우 자기 반응을 예상할 기회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계산할 기준도 가질 수 없었다.
▲ <한낮의 어둠>(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혁명 1세대 활동가를 거의 숙청해버린 모스크바 재판은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을 전향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며, 1940년에 뒤이어 출간된 이 소설을 읽은 서구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공산주의와 소비에트에 대한 동경을 접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반공 소설'로 읽으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정통했던 쾨슬러의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루바쇼프는 감옥에 있는 동안, 마하엘 보그로프의 처형을 목격하게 된다. 작중에 설명된 보그로프는 전함 포템킨의 전직 선원이며, 동부 함대 함장이자, 첫 혁명 훈장 보훈자다. 그런 그가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게 된 이유는 뭘까?
루바쇼프가 물었다.
"왜 보그로프를 처형했나?"
이바노프가 대답했다.
"왜냐고? 잠수함 때문이지. 톤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네. 오래된 싸움이지. 그 싸움의 발단은 자네도 익히 알고 있을 텐데……. 보그로프는 큰 용적 톤수와 긴 작전 범위를 지닌 잠수함 건조를 주장했네. 당은 짧은 작전 범위를 가진 작은 잠수함을 선호했고. 큰 잠수함 하나를 만들 돈이면 작은 잠수함을 세 개는 만들 수 있거든. 양쪽 모두 타당한 기술적인 주장을 했지. 전문가들은 기술 도면과 대수학 정식들을 거창하게 내보였고. 그러나 실제 문제는 전혀 다른 데 있었네. 큰 잠수함이 뜻하는 건 세계 혁명을 더 진전시키려는 공격적 정책이지. 작은 잠수함은 해안 방어를 뜻하는 것이고. 말하자면 그건 자체 방어이자, 세계 혁명의 지연을 의미한다네. 후자가 넘버원과 당의 견해였지."
이 대목으로 쾨슬러가 암시하고자 하는 모스크바 재판의 본질은, 그 재판이 소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과 트로츠키 분파의 세계혁명론 간의 마지막 격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구세대인 이바노프의 후임으로 루바쇼프를 심문하게 되는 신세대 공산당원 글래트킨의 입으로 한 번 더 반복된다.
"여기서 뭐가 문제인지 당신도 알고 있잖소.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혁명이 권력을 정복했고, 그것을 보유하고 있소. 우린 우리나라를 새 시대의 요새로 만들었소. 그것은 세계의 6분의 1이고, 세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오. (…) 우리 혁명이 성공했을 때 지구상의 나머지 국가들도 우리의 선례를 따를 거라고 믿었소. 그러나 반동의 물결이 닥쳐와 우릴 삼킬 듯 위협했소. 당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소. 하나는 모험자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국외 혁명을 위해 우리가 획득한 걸 걸고 싸우려고 하오. 당신은 그들에 속하오. 우린 그 경향이 위험한 것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걸 청산해 버렸소. (…) 당의 지도자는 넓은 관점과 집요한 전술을 갖고 있었소. 그는 모든 것이 세계 반동의 기간을 견뎌 내고 요새를 지키는 데 달렸음을 깨달았소. 새로운 혁명의 물결을 받아들일 만큼 세계가 성숙하려면 10년 혹은 20년, 어쩌면 5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걸 그는 깨달았소. 그때까지 우린 홀로 견딜 거요. 그때까지 우린 오직 한 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 사멸하지 않는 것. 요새는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져야 하오. 당의 지도자는 이 원칙을 선견지명으로 자각했고, 그걸 일관되게 응용했소. 인터내셔널 정책은 우리의 국가 정책에 종속되어야 했소. 이런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라도 파멸되어야 했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루바쇼프를 굴복시키려는 이바노프와 글래트킨의 설복에 무조건 넘어갈 필요는 없다. 먼저 보그로프의 처형은 해군 본부와 구파 장교들 사이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전제적인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 소비에트를 위협한다고 가정되는 세계 정세 역시, 모든 독재자들이 선호하는 "예외적 방어 조처를 요구하는 '예외적 환경'" 조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모스크바 재판의 폭력성(고문)과 피고인들의 자백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제출하지 못했던 법적 하자에 눈감자는 뜻이 아니라, 모스크바 재판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지 못할 때, 이 책에 관한 무수한 독후감이 그랬던 것처럼, <한낮의 어둠>에 대한 독법은 반공 문학의 일종이거나, 정치 혹은 정치 투쟁이 말끔히 사라진 휴머니즘의 밀실에 갇히고 만다.
실제로 루바쇼프는 누명을 쓴 결백한 죄수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권력은 폭력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이 책 279~281쪽에서 명백하게 자백하고 있듯이 '폭력적인 행동(내전)'을 계획했고, 나아가 끝내 인정할 수 없었던 '넘버원 암살 음모'마저 마음속으로 수긍한 바 있다.
반대파(루바쇼프 일당)가 당 관료 계층과 그 막대한 기구에 대항하여 오로지 내전이란 수단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면, 집단 행동이라는 이 대안이 넘버원의 도시락에 독약을 넣는 것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인가. 넘버원을 제거하면 더 빨리 그리고 피를 덜 흘리고 정권을 붕괴시킬 텐데 말이다. 어떤 점에서 정치적 살해(암살)가 정치적 집단 살해(내전)보다 덜 명예롭단 말인가?
비록 스탈린을 추종하는 두 심문자의 입을 통하여서였지만, 쾨슬러는 소비에트가 처한 역사적 맥락 속에 모스크바 재판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스탈린의 입장을 충분히 변호해 놓았다. 이런 균형 감각은 쾨슬러가 모스크바 재판 이후 공산당과 결별하긴 했지만, 바다 가운데 홀로 떠 있는 섬 같은 소비에트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라는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만의 상상이지만, 작가는 스탈린/공산당과 소비에트를 분리해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든 <한낮의 어둠>이 출간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 가장 영향력 있고 완성도 높은 소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딱히 공산주의 체제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치권력과 혁명 그리고 국가에 대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혁명(한낮)은 왜 성공하는 순간 폭력이나 독재(어둠)에 빠지고 마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혁명 뿐 아니라, 국가나 정치권력은 항상 '선한 믿음(의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치에서의 선한 믿음은 민주주의의 원칙인 대의(代議)와 대중의 여론은 물론이고 쾨슬러가 "윤리라는 바닥짐"이라고 부르는 최소한의 것도 의식하지 않는다.
혁명이라도 좋고 국가라고 해도 좋으며 하다못해 일시적인 정치권력이라고 불리는 것마저도, 선한 믿음을 내세운다. 이를테면 이명박이 부득불 우겨대는 4대강 공사처럼, 정치나 정치권력이란 선한 믿음에 대한 확신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법과 폭력의 무제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력자의 선한 믿음은 시간과 역사에 의해 잘못이라고 판단될 때까지는 제지할 수단이 없는데다가, 훗날 그것이 어떻게 판명 날지조차 알 수 없다. 때문에 정치 세계의 선한 믿음은, 더욱 협소한 목전의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 맹목적인 선한 믿음은 자신의 믿음이 '선'한지 결코 묻지 않고, 자신의 선이 진정 '믿을'만 한 것인지 따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 하는 매춘부의 논리("매춘부의 형이상학")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목표가 수단을 정당하게 한다는 매춘부의 논리의 정상에 <한낮의 어둠>이 실감나게 묘사하는 저 끔찍한 '고문'이 자리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루바쇼프가 리하르트·리틀 뢰비·알로바를 차례대로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나, 명예를 버리고 치미는 굴욕을 억누르며 당을 위한 희생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그 자신이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냉혹한 혁명가(정치가)의 논리를 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충격적인 역설은 끝까지 저항하리라는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40년 동안 혁명가로 살면서 당의 무오류성을 철저히 믿어온 루바쇼프가 스탈린의 선한 믿음을 끝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결말이다. 루바쇼프는 자신의 유죄 인정이 당에 대한 "마지막 봉사"가 되기를 소원하며, 선한 믿음이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항상 필요한 "자발적 희생양"이 된다. 까닭은 그가 논리적으로 신봉하는 국가나 혁명이란 "학살 행위를 없애기 위해 학살자가 되고, 양을 도살하지 않기 위해 그 양을 희생시키고, 인민을 매로 채찍질함으로써 그들이 채찍질당하지 않도록 가르치"며,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류를 감히 증오하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혁명, 그리고 역사의 진행 앞에서 "연민"과 "인간성", "윤리"는 알코올과 같은 싸구려 도취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루바쇼프형 인물들은 "스파르타쿠스에서 당통과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도 이 유혹 앞에서 무너졌"고, "역사의 가장 위대한 범죄자는 네로와 푸케 타입이 아니라, 간디와 톨스토이 타입"이며, "간디의 내면 목소리는 인도의 해방을 막는 데 영국의 총보다도 더 많은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런 맹신은 국가·혁명·권력에 대한 더 깊은 병리학을 요구할 정도다.
하지만 루바쇼프는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넌 대체 무얼 위해 죽고 있는 것이지?"라고 자문하게 된다. 인간도 정치도 '우리'가 아닌 '일인칭 단수'라는 각성을 그제야 하게 된 그는 "수학적 단위가 인간일 때 2곱하기 2는 4가 아니"라는 라스콜니코프의 발견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새로운 깃발, 새로운 운동, 새로운 정신은 '경제적 숙명성'만 아니라, 개개인의 의식이 공동의 신념에 구속되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펼쳐나가는 '대양적 감정'을 동시에 요구한다는 깨달음에 가닿는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이 소설을 20대 초반에 읽었으나, 고문 이야기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읽었던 이고르 구우젱코의 <거신의 추락>(사상계출판사 펴냄, 1961년)은 좀 더 자세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그 책을 읽은 직후, 친구의 자취방에서 이 소설의 줄거리를 들려 준 적이 있어서 일 것이다. (밤늦게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옆방에 사는 육군 소위인가 중위인가가, '잠 좀 자자' 하면서 방문을 두들겼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낮추었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거신의 추락>은 <한낮의 어둠>보다 시간적으로 약간 앞선 스탈린 독재 초기가 무대며, 제목 중의 '거신'은 고리키를 가리킨다. 그는 작고한 레닌의 친구였으면서, 소비에트 민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였고, 세계에 알려진 소비에트 최대의 작가였다. 그런 그가 스탈린 독재와 함께 긴 침묵에 빠진다. 그가 작품 활동을 하지 않자, 소비에트 민중과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 온갖 소문이 떠돈다. 고리키가 스탈린 정권 아래서는 집필하기를 거부한다거나, 스탈린이 고리키에게 집필을 금지했다는 설들이 그것이다. 고리키와의 불화설이 부담스러운 스탈린 정권은 비밀경찰에 약점이 잡힌 한 문학 교수에게, 고리키를 감시하고 고리키로 하여금 스탈린을 지지하는 소설을 쓰도록 만드는 임무를 맡긴다.
반 연금 상태에 놓여 있는 고리키를 찾아가 그의 친구가 된 문학 교수는, 피터 대제에 대한 소설을 쓰도록 고리키를 설득한다. 피터 대제는 유럽의 후진국인 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든 절대 군주. 문학 교수는 현재 스탈린이 하는 독재가 피터 대제가 했던 역할과 같다는 논리로 스탈린에 대한 고리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스탈린에 대한 은유적 지지로 해석될 게 뻔한 고리키의 신작 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민중과 서구 세계에 스탈린 체제를 선전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고리키는 문학 교수의 설득에 자진해서 넘어간다. <한낮의 어둠>에 나오는 루바쇼프가 그랬던 것처럼, 고리키 역시 자신의 일생을 바친 혁명과 소비에트를 부정 할 수 없었고, 자신이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혁명과 소비에트를 합리화하고 싶었다. 스탈린에게 핍박받고 위협을 당하면서도 소비에트를 버릴 수 없었던 혁명 1세대의 자부심과 정신적 공황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거신의 추락>과 <한낮의 어둠>의 주인공들은 동류들이다.
<한낮의 어둠>도 단연 뛰어난 작품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거신의 추락>이 더 박진감 있다. 후마니타스가 이 소설도 다시 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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