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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보다 무서운 삶의 진짜 재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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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보다 무서운 삶의 진짜 재난은?

[프레시안 books] 김인숙의 <미칠 수 있겠니>

재난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어떻게 모든 것이 파괴되는가. 둘째, 어떻게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가.

<인디펜던스데이>, <딥 임팩트>, <타이타닉> 등 익숙한 할리우드적 재난 서사를 보면서 우리는 주인공이 끝내 영웅이 되거나 구원 받는 결말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재난 영화의 화려한 스펙터클은 '어떻게 모든 것이 파괴되는가'에서 판가름 나지만, 재난 영화의 감동은 '어떻게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가'에서 결정되니 말이다.

주인공의 용기, 사랑, 인내, 구원을 통해 감동은 배가되고 재난 서사는 완성된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삶 속에서의 재앙은 그렇게 두 시간 만에 판가름 날 수 없다. 재난의 여파는 소의 되새김질처럼 느리고 길게 반복되고, 구원의 희망도 일시적인 영웅적 행위만으로는 지탱되지 못한다. 재난 이후의 시간은 견딜 수 없이 더욱 느리고 더디게 흘러간다.

▲ <미칠 수 있겠니>(김인숙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김인숙은 바로 이 '느림'을, 그 '더딤'을 끈질기게 포착해낸다. 김인숙의 신작 소설 <미칠 수 있겠니>(한겨레출판 펴냄)는 재난에 맞닥뜨린 인간에게는 더더욱 참혹하게, 더 없이 느리고 더디게 진행되는 시간을 그려낸다. 이 소설의 인물들을 덮친 재앙은 지진과 해일이지만, 그 참혹한 자연의 재앙 이전에 그들은 이미 인공의 재앙을, 일상의 재앙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재난을 당하기 전에도 이미 생은 보이지 않게 파괴되어 있었음을. 열정이 문드러진 삶, 사랑조차 매너리즘이 되어버린 삶. 재난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재앙은 이미 깨져버린 '관계'의 파국이었다. 재난은 삶을 파괴한다. 그러나 재난은 깊은 고민 없이도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일상의 패턴과 관습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삶의 치명적인 본질을 투명하게 폭로하기도 한다.

재난은 공포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삶을, 세계를, 이 시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영혼의 황폐함이라는 것을, 김인숙의 주인공들은 온몸으로 보여준다.

"정말이지 한 번도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요. 매일매일이 죽음이니까. 굳이 목을 매달지 않아도. 그게 그냥 죽음이었어요."

우리의 삶은 재난 이전에도 이미 부서져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계속 일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비틀비틀 '오늘과 똑같을 내일'을 향해 무심결에 맹목적으로 걸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진'은 자신과 같은 이름의 남편 '진'의 끔찍한 배신 앞에서 살의를 느낀다.

본래 사랑이란 물질을 닮기보다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이 어떤 대단한 물건을 빼앗기는 정도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시간과 공간 전체가 붕괴되는 고통이다. 진에게 사랑의 배신은 세상이 온통 무너지는 재난과 정확히 등가였다. 진에게 사랑의 죽음과 세상의 죽음은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지진과 해일로 폐허가 되어버린 섬은 무너져버린 개개인의 삶과 소름끼치게 닮았다. 재앙은 건축물의 파괴나 인간의 죽음 뿐 아니라 그때, 거기, 그 공간이 있었던 기억마저도 사라지게 만든다. 재앙과 함께 공간도, 시간도, 세계 자체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래된 흑백 필름의 영화다. (…) 우주탐사선의 기장인 찰턴 헤스턴은 불시착한 혹성에서 원숭이들과 혹독하고 외로운 싸움을 벌이며 지구로 귀환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발견하는 것은 사막화된 혹성의 벌판에 쓰러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혹성이라고 여겼던 곳은 미래의 지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찰턴 헤스턴은 혹성에 갇힌 것이 아니라 시간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가 탈출하여 돌아가야 할 곳은 그의 현재가 머물고 있는 과거였다. (…) 참혹해진 피해 현장은 더는 타운이라거나 비치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사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사막, 혹은 기억의 사막. 그래서, 그 영화가 떠오른 것일까. (…)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시체가 무더기로 몰려들고 몰려나가는 것처럼 환시가 보였다. 누구라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밤이었다. (189~190쪽)

모든 갈등을 휴머니즘이라는 기적의 콘크리트로 간단히 메워버리는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에서는 오직 '살고자 하는 의지'와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우곤 한다. 그러나 실제 재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중 하나는 바로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과 싸우는 것, 삶 자체에 대한 증오와 싸우는 것이다. 이 삶이 정말 견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이 정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를 둘러싼 모든 소중한 것들이 사라졌는데, 내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일까. <미칠 수 있겠니>는 바로 그런 절망의 목소리들을 차곡차곡 담으며 재난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끝내 외면할 수 없다. 대재난 이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도 비릿한 빗물 냄새보다 더 강하게 끼치는 것은 눈물 냄새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사람들, 그들의 실낱같은 희망이, 바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움이 아직 우리를 버티게 하고 있음을. '차라리 죽고 싶다'는 절규는 '미치도록 제대로 살고 싶다'는 진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사람들은 재난이 일어나고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이미 와 있던 내면의 재앙을. 문명의 재앙이나 자연의 재앙이 오기 전에 이미 오래 전에 개개인의 내면에 찾아와 있던 광기와 절망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단지 '머나먼 타국의 재앙'이 아니라, 그렇게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미쳐가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투명한 얼굴과 만난다. 무너진 건물을 복원하는 것에는 자본과 기술과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너진 삶, 무너진 관계, 무너진 영혼을 복원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미칠 수 있겠니>는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복원', '만질 수 없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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