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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년, 그가 있어서 두산 팬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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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년, 그가 있어서 두산 팬은 행복했다!"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라이벌 열전 : 김경문 대 조범현

오늘은 고등학교 동기인 두 명의 포수를 비교합니다. 포수로 팀을 이끄는 것은 물론 각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던 두 명은 전국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각각 한 차례씩 우승을 맛본 후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습니다.

A는 고교 선발팀에 선발되었지만 B는 고교 선발팀에 선발되지 못한 채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A와 B가 진학한 대학교에는 훌륭한 선배 포수가 있었으므로 A는 선배가 졸업한 4학년 때 주전 포수가 되었고, B는 선배가 군에 입대한 후 3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습니다. B는 3학년 때 대학 선발팀에 선발되기도 했고, 졸업과 동시에 프로 야구가 창단되자 A와 B는 한 팀에서 누가 주전이고 누가 후보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각축을 벌였습니다.

약 10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친 후 A와 B는 서로 다른 프로팀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B가 2003년 시즌에 먼저 감독 자리에 올랐고, A는 2004년 시즌부터 프로 야구 감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A는 일곱 시즌 동안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우승을 맛보지는 못했고, B는 팀을 옮기는 부침을 겪은 후 2009년 시즌에 챔피언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A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에 극적인 금메달을 안겨 준 김경문 감독이고, B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에 금메달을 안겨 준 조범현 감독입니다.

고교 시절 조범현의 전학에 얽힌 이야기

안방에서 개최된 아시아 야구 대회에서 세 번째로 우승을 차지한(앞선 두 번의 우승도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때이며, 원정 대회에서는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1975년에 한국 야구 대표팀은 캐나다에서 개최된 대륙간컵 야구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에 처음 출전한 해에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선수 중 앞날이 기대되는 포수가 여럿 있었으니 이만수(대구상업고등학교, 현재의 상원고등학교), 김경문(공주고등학교), 조범현(대건고등학교), 정종현(선린상업고등학교, 현재의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최영환(동산고등학교)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만수(봉황기)와 정종현(청룡기)이 1학년 때 이미 전국 대회 결승에 올라 우승 문턱까지 진격해가고 있을 때 그 이름이 지극히 미약했던 김경문과 조범현은 이름없는 고등학교에서 대성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황금사자기 대회에 초청된 대건고가 준결승까지 오르는 예상외의 선전을 한 것이 조범현에게는 첫 전국 대회 무대였습니다.

시즌이 끝나자 야구부를 운영할 형편이 여의치 못했던 대건고 야구 팀이 해체될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계속해서 야구를 하고 싶었던 조범현은 옮겨갈 팀을 알아보던 중에 공주고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경문이라는 걸출한 포수를 지닌 공주고에서는 조범현을 받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팀 해체 움직임이 잠잠해지면서 조범현은 2학년이 되어 대건고 유니폼을 입고 전국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 후 대건고 야구부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고, 조범현은 충암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충암고는 대건고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해체된 철도고등학교 선수들을 받아들여 1977년 시즌을 준비했습니다.

전국 대회에서 최초로 우승한 충청도 고등학교

최동원(경남고등학교-연세대학교)과 김시진(대구상고-한양대학교) 등 유난히 우수한 투수가 많았던 1977년 고등학교 졸업생이 모두 대학으로 진학한 후 1977년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 최고 인기 종목의 하나였던 고교 야구의 열기는 여전했지만 뒤를 이을 투수들이 부족한 탓에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각 팀의 승패를 전망하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5월이 되어 전국 대회 첫 대회인 대통령기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야구 팀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무명이라 할 수 있는 공주고는 무명의 에이스 오영세, 포수이자 4번 타자 김경문, 꺽다리 1루수 이근식 등을 앞세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공주고는 전력이 더 강하다고 평가된 신일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3대 3 무승부로 연장전에 돌입하는 혈전을 치렀지만 신일고 유격수 김경표가 부정 선수로 밝혀지는 바람에 행운의 몰수 게임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결승에서도 역시 더 강하다고 여겨진 부산고를 4대 3으로 격파함으로써 충청도 고등학교 야구팀으로는 최초로 전국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김경문은 이 대회 우승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만수(현재 SK 2군 감독)와 함께 한일 고교 야구 대회에 출전한 고교 선발팀 포수로 선정되었습니다.

공주고의 에이스 오영세는 숨겨진 투수일 뿐 고교 야구 정상급의 투수는 아니었으며, 먼 훗날 메이저리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박찬호 선수가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여 찾은 사람이 바로 자신을 투수의 길로 입문시킨 과거의 은사 오영세였습니다.

이만수는 그 해 고등학교 최고의 포수이자 타자였습니다. 대학에서도 2학년 때부터 3년간 대학 선발 팀 주전 포수로 활약했고, 프로에서도 첫 해부터 삼성 4번 타자를 치면서 1984년도에 타격 3관왕을 차지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포수입니다. 다만 프로 야구 감독 경력이 없으므로 이번 원고에서는 제외합니다.

봉황대기의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복수혈전의 주인공

대통령기 이후 공주고가 잠잠하고 있을 때 고교 야구에서는 대회마다 명승부가 펼쳐지면 팬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지금은 프로 야구 이외의 야구 경기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지만 1970년대에는 고등학교 야구가 축구와 함께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황금사자기와 봉황기에서는 한동화(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감독이 이끄는 신일고와 김성근(현재 SK 감독) 감독이 이끄는 충암고의 혈전이 볼만 했습니다.

충암고의 주축 선수 중 조범현 외에 투수 기세봉, 중심 타선의 이태현, 1번 타자 이근식(동명이인 공주고의 이근식과 달리 키가 아주 작았고, 두 선수 모두 프로 야구 창단 시 OB 베어스에 입단했습니다. 이 이근식이 그 해 고교 선발 팀 1번 타자와 프로 야구 초창기에 OB의 테이블세터로 활약했습니다)이 모두 (경북고와 대구상고의 위세에 눌려 있던) 대구 대건고 출신입니다.

1976년 시즌을 앞두고 창단된 신일고는 이미 창단 첫 해에 우승을 함으로써 창단 후 가장 빠른 시일에 우승을 하는 기록을 세운 팀으로 1학년 때부터 에이스를 맡은 2학년 김정수가 에이스이자 4번 타자였고, 3학년 박종훈(현재 LG 감독)이 3번 타자이자 두 번째 투수 역할을 했으며, 2학년인 1루수 김남수와 2루수 양승호(현재 롯데 감독)가 주요 선수들이었습니다.

황금사자기 준준결승에서 만난 두 팀의 경기는 9회말 1사가 될 때까지 충암고의 기세봉이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2대0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일고는 3, 4번인 박종훈, 김정수가 연속 안타로 1사 1, 3루의 찬스를 만들자 김남수가 역전 3점 홈런을 치면서 경기장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두 팀은 다음 대회인 봉황기 준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충암고의 기세봉은 5회에 신일고 김정수에게 2점 홈런을 맞기는 했으나 좋은 투구를 했고, 신일고의 김정수도 역시 호투를 하면서 9회까지 2대2 무승부를 이루었습니다. 연장 10회 말, 2사 2루에 등장한 5번 타자 조범현은 굿바이 2루타를 날림으로써 전 대회의 패배를 설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충암고는 여세를 몰아 우승까지 차지했으며, 조범현은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창단 9년째인 충암고의 첫 우승이자 김성근 감독의 첫 우승이기도 합니다.

대학을 거쳐 프로 팀에서 함께 만난 두 사람

김경문이 진학한 고려대학교에는 손상득이 주전 포수로 활약하고 있었고, 조범현이 진학한 인하대학교에는 김진우가 주전 포수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김경문과 조범현은 각각 손상득이 졸업하고, 김진우가 군에 입대한 후 3학년이 되어서야 주전 포수로 마스크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범현은 동기인 이만수와 함께 대학 선발 팀에 뽑혀 한미대학야구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김경문과 조범현이 대학에서 후보 생활을 하던 1978년에는 국가 대표 터줏대감 박해종이 연세대 포수이자 대학 선발 팀 주전으로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1979년에는 인하대의 김진우와 한양대의 이만수가 대학 선발 팀에 선발되었습니다. 1980년에 모두 주전 포수가 되기는 했으나 조범현이 이만수와 함께 대학 선발에 뽑힐 때 김경문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고, 대학 4학년 때는 이만수와 함께 1년 후배인 동아대의 한문연이 대학 선발 팀에 선발되는 바람에 둘 모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 결정을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프로 야구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김경문과 조범현은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주전 자리를 놓고 오랜 기간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 모두 수비에는 강점이 있으나 타격에서는 큰 활약을 못했으므로 8년 동안 누가 주전이고 누가 후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대로 안방마님 자리를 차지했고, 그 결과 둘 중 누군가가 규정 타석을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서른을 넘기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주전 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김경문은 1990년에 태평양에서 1년을 보낸 후 친정으로 돌아와 다시 1년을 보낸 후 은퇴했으며, 조범현은 1991년부터 삼성에서 2년간 선수 생활을 더 한 후 은퇴를 했습니다.

프로 야구 우승팀 감독이 된 조범현

▲ 조범현 기아 타이거즈 감독. ⓒ뉴시스
실속 있는 포수이기는 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라고는 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선수 생활 때보다 지도자로서 더 나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퇴 후 약 20년이 지나는 동안 쉬고 있던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에서 은퇴한 조범현은 삼성에서 1년, 쌍방울에서 6년간 코치를 지냈습니다. 2000년 시즌부터 다시 삼성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한 그는 김응룡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승리를 차지함으로써 우승에 목맨 삼성의 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성을 떠나 SK 감독으로 2003년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쌍방울을 인수한 후 여러 훌륭한 선수를 받아들였지만 하위권에서 맴돌던 SK는 조범현 감독이 이끈 2003년에 정규 리그 3위를 기록한 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이후 우승의 염원을 달성하지 못한 채 3년이 지나가자 2006년 시즌을 마치고 팀을 떠나야했지만 기아 서정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7년 시즌에는 기아 코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서정환 감독이 떠난 기아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조범현이 떠난 SK는 충암고 시절 조범현의 스승이었던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습니다. 부임 후 네 시즌을 보내는 동안 김성근 감독은 2009년을 제외한 세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SK가 놓친 2009년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 바로 조범현 감독이 이끈 기아입니다.

SK의 3연패를 저지하고 기아의 우승을 결정지은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은 <야구멘타리 위대한 승부>라는 책에 그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우승에 의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감독으로 선임된 조범현은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다시 한 번 명성을 올렸습니다.

▲ 김경문 전 두산 베어스 감독. ⓒ뉴시스

우승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올림픽 우승팀 감독 김경문

1991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김경문은 2년간 애틀랜타에서 연수를 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3년간 배터리 코치로 일한 다음 1998년부터 두산에서 배터리 코치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시즌이 끝나고 김인식 감독의 퇴진을 전제로 선동렬을 감독으로 영입하기 위해 나섰던 두산은 선동렬이 삼성 수석코치로 방향을 틀자 신속하게 김경문을 감독으로 선임했습니다. 그는 2004년 시즌부터 감독으로 일곱 시즌을 보내면서 5위를 한 번 차지한 걸 제외하면 정규 리그에서 2등 3회, 3등 3회를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적을 올리면서 지도력을 과시했습니다. 비싼 비용을 치러가며 뚜렷하게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지 않으면서도 팀 내에서 선수를 키워가면서 매년 두산 팬들에게 멋진 가을 야구를 선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승을 목표로 한 금년 시즌에서 지난 5월부터 팀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팀이 7위로 떨어지자 지난 13일에 사퇴를 함으로써 지도자 생활에 일단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은퇴 후 약 2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쉬었던 시기는 1년밖에 없을 정도로 꾸준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이 있는 지도자였지만 갑자기 감독직을 사퇴하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경문 감독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야구계에 나타날 것인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야구팬이라면 아마도 일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의 하나로 기억에 남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의 감격을 맛보게 해 준 감독이 바로 김경문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라이벌 관계를 유지한 김경문과 조범현 감독은 프로 야구 선수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아주 실속 있는 선수로 활약한 후 지도자가 되었고, 지도자 시절에도 화려한 각광을 받기보다는 내실 있는 지도자로 명성을 쌓아가던 중 비슷한 시기에 프로 야구팀 감독이 되어 각각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우승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제 김경문 감독은 야구계를 떠났지만 두 감독 모두 앞으로 더 큰 성과를 거두는 지도자가 되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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