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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를 덮친 양극화의 쓰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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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를 덮친 양극화의 쓰나미

[해방일기] 1946년 6월 17일

1946년 6월 17일

5월 30일자 일기에서 군정청 법령 제72호 이야기를 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로 폭압적인 법령이었다. 5월 4일 '발포'되어 5월 14일부터 효력을 '발생'한 이 법령이 5월 27일 '발표'되자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다. 6월 17일에 이르러 대법원장 김용무는 이 법령의 '정지'를 기자단에게 밝혔다.

"군정법령 제72호는 당분간 정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군정법령 제72호로써 집행 중에 있는 사람은 상부의 명령을 기다려 처리하겠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18일자)

짧은 기간 동안 이 법령이 발생한 효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기사 하나("단독 정부 수립 반대는 법령 72호 위반인가?")를 6월 12일자 <자유신문>에서 찾았다.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 반대하는 삐라를 법령 72호에 위반이라고 처단한 경찰서장이 있어 관계자를 아연실색케 한 사실이 있다.

지난 10일 아침 철도노조원 남광우 군은 6·10 만세 기념 삐라를 뿌리다가 용산서원에게 체포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안 장(택상) 경찰부장은 용산서장에게 즉각 석방 명령을 나리었으나 용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 삐라 속에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글이 있어 법령 제72호에 저촉된 고로 이 사실을 도 정보과장에게 보고하고 취조하여 11일 아침 송국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장 부장은 최 용산서장을 불러 문책하기로 되어 그 귀추가 주목되는데 장 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독 정부 수립 반대가 72호 법령에 걸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즉시 불러 문책하겠다."


용산서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조사하지 못했지만, 참 대단하다. 이 시점에서는 이승만 본인조차 단독 정부 수립이 자기 주장이 아니라 그런 민심이 있기 때문에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라고 둘러대며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천하의 장택상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앞서 달리는 경찰서장이 있었다니!

주구(走狗)의 속성은 그런 것인가? 권력자가 원하는 바를 권력자 자신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방법으로 실행하려는 경찰(또는 검찰) 간부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눈여겨 살필 점은 장택상조차 "말이 안 된다"고 여기는 조치를 군정청 법령 제72호가 뒷받침해 준다고 주장한 경찰서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용무 대법원장이 법령 제72호의 '정지'를 밝힌 기자 회견에서 이런 문답도 있었다. 6월 11일 김용무가 지방순시 중 광주재판소에서 한 발언을 기자들이 따지고 김용무가 해명한 것이다.

(問) 사법관에 있어서 엄정 중립이니 불편부당이니 하는 자는 사법관의 자격이 없다고 훈시하였다는데?
(答) 미군정에 협력하고 건국 사업에 협력하는 사람이라야만 사법관의 자격이 있다고 한 의미다.
(問) 그러면 엄정 중립과 불편부당이 미군정과 건국 사업에 비협력이라는 말인가?
(答) 사법관의 엄정 중립과 불편부당이라는 것은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가담하여 반대의 정당이나 단체에게 편파한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말이고 오늘 미군정 하에 있는 사법관으로서는 미군정에 협력하고 건국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야 말로 사법관의 책임이다.
(問) 증거 서류가 불비하더라도 건국을 방해한다면 단연 철퇴를 내려야 한다고 말하였다는데?
(答) 지금 상태로는 경찰 또는 검사의 취조 서류가 다소 불비한 점이 없지 아니하므로 재판소로서는 일층 완비한 증거 재료를 수집하여 판결을 내린다는 의미다.
(問) 신탁을 지지한다는 것은 건국 사업에 방해라고 말하였다는데?
(答) 그러한 말을 한 일이 없다. 신탁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사법관으로서 관여할 바 아니로되 신탁 지지라는 명목 하에서 미군정을 비방하고 건국을 방해하는 일을 불가하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問) 그러면 신탁 지지라는 명목 하에서 군정을 비방하고 건국을 방해한 사실이 있다는 말인가?
(答) 꼭 있다는 말은 아니다.
(問) 좌익 진영은 전부 건국 방해자라고 말하였다는데?
(答) 그런 말은 한 일이 없다.
(問) 건국 정신의 중점을 어디다 두고 사법을 운영할 터인가
(答) 진실한 민주주의 기초 위에서 사리사욕과 정치의 욕망을 버리고 우리 건국을 촉진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정신이 건국 정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問) 군정법령 72호가 폐지되었다는 풍설이 있는데 사실인가?
(答) 72호는 폐지가 아니라 정지다. 이에 관하여 앞으로 사법부장과 협의한 후에 처리하겠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18일자)


4월 8일자 일기에서 김용무 대법원장의 거취를 살펴본 일이 있다. 1945년 10월 서울법원장(대법원장)에 취임하면서 법원의 중립을 위해 한국민주당을 탈당했지만 그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던지 1946년 2월 25일 재판소 현직 판·검사 전원의 8할 이상의 연명으로써 대법원장 불신임안을 법무부 당국에 제출했고(<서울신문> 1946년 3월 24일자), 4월 3일에 사표를 냈다. 그러나 5월 16일 러치 군정장관이 사직서를 반환하며 그를 유임시켰고, 이틀 후 그의 불신임을 주동한 자들을 숙청하는 대규모 인사가 있었다.

3월 2일자 일기에서는 장택상이 개입한 박흥식 불법 석방을 놓고 "이 사건의 발단은 소위 영어마디나 하는 자의 중간 모략으로 군정을 모독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는 김용무의 논평을 소개한 일이 있다. 장택상 같은 기회주의자에 대비되는 원칙론적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논평이었다.

그러나 3월 11일자 일기에서는 김계조 사건과 관련해 이와 다른 면모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당 판사 오승근을 2월 20일 다른 부서로 전임시켰는데, 오승근이 이 이동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김용무가 김계조 사건에 간접적으로라도 연루된 사실을 밝히는 담화를 발표했던 것이다. 김용무의 불신임안 제기에는 오승근 전임 조치의 부당성에 대한 공감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오승근은 5월 18일 광주재판소 장흥지원으로 발령받았고, 곧 법복을 벗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방법원 지원에 보낸 셈이다. 오승근과 같은 '좌익' 법관들이 숙청성 좌천을 당하고 법원을 떠났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진짜 '좌익' 법관이었을까?

4월 8일자 일기에 소개했던 사법부 총무국장 강중인은 어떻게 봐도 중도파, 굳이 따지자면 우익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사법부를 떠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는 1946년 가을에 정판사 사건 변호인단에 참여했고, 1949년 '법조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 3년형을 언도받음으로써 '좌익 법조인'의 딱지가 굳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이런 인물의 거취를 더 세밀하게 조사하면 1946년 5월 이후 극우로 치닫고 있던 법원 분위기를 잘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김용무의 행보에서도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박흥식 석방 사건에서 장택상에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차카게 살자'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다. 오승근을 민사부로 전임시키는 데도 큰 악의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김계조 사건의 연루라는 것이 김계조가 세운 국제문화사의 중역을 맡았다는 것인데, 김용무 같은 명망가가 사업에 실제로 관계하지 않으면서 중역으로 얼굴 내미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6월 17일 기자 회견에서의 궤변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인가? 자기 '살 길'을 거기에서 찾았기 때문 아니겠는가. 불신임안이 현직 판·검사 8할 이상의 연명으로 제출되었다고 하니, 거기 참여한 사람들에게 인간적 배신감을 느낀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불명예 퇴진에 직면한 그를 미군정은 재신임했다. 미군정은 그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주는 상전이 되고, 미군정에 비판적이며 그에게 위협을 주는 '좌익'은 그의 적이 된 것이 아닐까.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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