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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삶이건만 끝이 왜 이리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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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삶이건만 끝이 왜 이리 다른가?

[꽃산행 꽃글·5] 울릉도는 대단하다

프레시안 인문학습원에서 주최하는 울릉도학교 봄꽃 트래킹에 신청을 하였다. 울릉도도 울릉도였지만 꽃에 꽂히게 되면서 이 학교에서 내건 교훈에 마음이 그만 쏠렸기 때문이다.

"보석 같은 섬에, 화려한 꽃들의 향연."

손꼽아 소풍을 기다리듯 며칠을 보낸 뒤 관광버스와 쾌속선을 번갈아 타고서 울릉도 저동항에 마침내 상륙했다. 오래전부터 소망해온 바로 그 섬에 왔다는 가벼운 흥분이 멀미처럼 일어났다.

점심 무렵. 우람한 후박나무가 서 있는 선창을 지나 홍합밥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 딸린 화장실은 아주 낡고 칙칙했다. 수도꼭지는 노후해서 녹이 많이 슬었고 세면대와는 헐거워져 겉돌고 있었다.

▲ 저동항의 후박나무. ⓒ이굴기

황동규 시인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고 한 것처럼 나는 수도꼭지를 보면 틀고 싶어진다. 틀고는 싶었지만 늙은 쇠뭉치를 보니 어쩐지 물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더구나 여기는 섬이 아닌가.

내기를 하는 기분으로 꼭지를 돌려보았다. 오호라, 놀라운 수압과 수량이여!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도꼭지는 그래도 수도꼭지였다. 대기하던 맹물이 콸콸콸 기세 좋게 쏟아졌다. 메말랐던 내 손금이 일거에 물벼락을 맞았다.

현진오 박사가 펴낸 책, <사계절 꽃산행>의 울릉도 편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그중에서 몇 개의 특이한 정보를 습득했다. 울릉도는 화산섬이며, 육지와 한 번도 연결된 적이 없으며, 쥐를 제외한 포유류가 없으며, 뱀과 개구리 같은 양서류와 파충류도 없으며, 특산 식물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울릉도의 그 특산 식물들은 신기하게도 잎과 꽃이 아주 크다는 것이었다. 작은 섬에 큰 식물 그리고 힘찬 물의 세례. 화장실을 나서며 울릉도가 정말로 만만찮은 섬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성인봉 등산로 초입에 얌전한 집이 한 채 있었다. 빨갛게 녹슨 양철 지붕이었고 텃밭에는 붉은완두가 피어 있었다. 울릉도에는 비와 눈이 엄청 많이 온다고 한다. 이 집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그것들을 맞이한다면 기분도 그 얼마나 흥건하랴. 오늘은 구름과 바람만이 얼쩡거렸다. 빨간 지붕을 덮는 흰 눈, 양철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상상하면서 녹색의 세계로 입장했다.

▲ 붉은완두. ⓒ이굴기

성인봉에 오르면서 너도밤나무, 동백나무, 곰솔, 큰졸방제비꽃, 큰두루미꽃, 선갈퀴, 괭이밥 등을 만났다. 뱀딸기, 섬딸기나무도 보았다. 한편, 이번에 나는 못 보았지만 산딸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신기하게 가시가 없다고 한다. 이 섬에서는 저를 괴롭히는 뱀이나 개구리가 없어서 안심한 결과일까.

▲ 큰졸방제비꽃. ⓒ이굴기

▲ 뱀딸기. ⓒ이굴기

조릿대, 마가목이 울창한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서 정향나무, 참식나무, 눈개승마, 두메오리, 섬노루귀, 큰구슬붕이, 섬남성, 개종용, 주름제비난 등을 보았다. 쥐오줌풀도 많이 보았다. 꽃과 뿌리에서 쥐의 오줌 냄새가 난다고 그 이름을 갖게 된 식물이다. 울릉도의 것은 잎이 크다고 해서 넓은잎쥐오줌풀로 구분하기도 한다. 울릉도에 서식하는 포유류는 사람과 쥐의 두 종뿐이다. 지린내는 사람오줌에서도 나는 법이다. 더구나 쥐의 몸피는 사람의 방광 부피와 거의 맞먹을 것이다. 그러니 혹 이름을 두고 말이 나온다면 쥐로서는 좀 억울하기도 하겠다.

▲ 쥐오줌풀. ⓒ이굴기

▲ 주름제비난. ⓒ이굴기

나리분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오후에는 와달리 옛길을 걸었다. 이번 울릉도 트래킹에서 백미에 해당하는 길이었다. 옛날 폭풍우가 심해 배를 띄울 수 없을 때 이용한 길인데 수많은 동백나무와 마가목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울창한 숲은 물론이요 특히 응달이 발달해서 일색고사리, 공작고사리, 고비고사리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오르고, 내리고, 굽어지고, 휘어지는 길의 장단에 몸을 맞추며 따라 걷는데 어느덧 옛길의 끝이 보였다. 그곳에는 임도를 내면서 사방 공사를 하였고 석축이 높게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간 자취가 완연했고 길도 반들반들했다. 시멘트 냄새가 좀 나는 것도 같았다. 옛날 냄새는 여기에서 그만 끊기는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저 멀리 바다에서 죽도(竹島)가 바로 육박해왔다.

이제는 좀 넓어진 길. 아주 멀리에서 관광버스가 몇 대 보이고 조금 멀리에서는 웬 물체가 길 가운데 떨어져 있었다. 색채는 햇빛에 반사되어 가늠할 수 없었다. 한 무더기 새의 똥일까. 쥐의 사체일까. 비탈에서 굴러온 돌멩이일까. 아니면 이 문명의 길에 어느 관광객이 흘린 모자나 수건일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우산고로쇠 잎사귀 뭉치였다. 아니 애꿎은 나뭇가지는 왜 꺾을까, 속으로 그자를 욕하면서 지나치는데 이런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산업 도로 한가운데서 처참하게 터져 / 죽은 강아지 한 마리 / 그 시체를 하루 종일 자동차 바퀴들이 수없이 밟고 지나간다 / 개는 매어서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 할아버지의 영구차 / 점심때마다 사철탕집으로 달려가는 / 백전무의 벤츠 승용차 / 잃어버린 강아지의 주인 / 영이가 타고 가는 노선버스 / 그리고 덤프트럭과 컨테이너 화물차들이 / 조그만 주검을 먼지로 만든다 / 산업 도로 중앙 분리선 위에서 / 뽀얗게 피어오르는 / 강아지 아지랑이

(김광규, '강아지 아지랑이' 전문)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이곳은 개활지였고 우산고로쇠는 사람의 키보다는 훨씬 컸다. 등산객이 지팡이를 동원한다 해도 쉽게 닿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더구나 길옆으로는 초본이나 관목들이 주로 있었고 키 큰 나무들은 도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더 자세한 관찰이 필요했다.

나는 걸음을 뒤로 돌려 잎사귀 뭉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산고로쇠 잎사귀는 널브러지기는 했지만 잎몸에는 수분이 통통했다. 측맥도 힘줄처럼 뚜렷하고 잎자루에도 탄력이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인 듯했다.

다만 부러진 줄기 끝은 매끈했으나 물기가 없었고 색깔도 막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일부러 꺾었다면 껍질이 조금 덜렁덜렁 남아 있어야 했다. 아무리 잔인한 사람일지라도 나무의 팔을 꺾으려면 조금은 망설이고 주저하지 않겠는가.

나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울릉도의 바람은 몹시 세다. 그 바람에 나무는 낭창낭창 몹시 흔들린다. 이러다가는 가지 전체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무는 자신의 말단 일부를 잘라내기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그것은 결국 바람의 소행이었다!

입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동물과 식물은 그 마지막 운명이 몹시 서로 달랐다. 산업도로 한복판에서 죽은 강아지는 아스팔트와 같은 높이가 되도록 자동차에 깔리고 깔렸다. 바퀴장(葬)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아지랑이가 되었지만 여느 동물처럼 썩는 냄새가 몹시 지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의 산길 한복판에 떨어진 잎사귀는 모든 발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 뭉치는 물만 먹고 자라는 나무의 후예답게 고약한 냄새도 전혀 풍기지 않았다. 흙으로 녹아들고 공중으로 흩어지면서 잎사귀는 서서히 풍장(風葬)할 것이다. 바람 때문에 떨어져 바람 따라 이 세상을 뜨는 것이리라. 우산고로쇠 아지랑이가 되어서 작은 먼지로 떠나는 것이리라.

▲ 길에 떨어진 우산고로쇠 잎사귀 뭉치. ⓒ이굴기

조문하듯 조용히 잎사귀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진 한 방 찍고 서둘러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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