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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여름, 한국을 덮친 전염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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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여름, 한국을 덮친 전염병은?

[해방일기] 1946년 6월 13일

1946년 6월 13일

맥아더가 미 육군성에 제출한 1946년 6월 월례 보고서 중 조선에 관한 내용이 1946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새 조선 건설의 지장(支障)"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식량 문제와 콜레라를 가장 큰 두 가지 장애물로 지적한 내용이다.

[워싱턴 25일발 AP 합동]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육군성에 제출한 6월 월례 보고서에 조선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2대 재난으로 인하여 조선인의 재건 노력은 6월 중 일대 지장을 받았다. 그 하나는 20년래 처음 보는 수해로 인하여 20퍼센트의 농작물이 유실되어 금년 역시 잡곡 수확량은 1940년부터 1944년간의 평균 수확량 142만7000톤의 60퍼센트에 불과할 것이다. 또 미곡 수확량은 1940년부터 1944년간의 평균 수확량 200만7600톤의 70퍼센트밖에 안 될 것이다.

현재 조선의 식량 부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맥류 급 소맥분 5만4827톤이 수출되었으나 이 역시 가격 비등을 방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조선의 일반 물품 소매가격 조사에 의하면 그 가격은 1945년 12월 가격의 200퍼센트 이상이 등귀되었다.

수해에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시할 바는 통신·수송망에 지장이 재래되어 현재 조선이 당면하고 있는 제2의 재난, 즉 중국으로부터 전재민이 전염하여 온 호역(虎疫)의 만연 방지 대책에 지장을 주고 있다. 6월 중에 보고된 호역 환자 수는 1212명인데, 그중 651명은 사망되었다.

1946년 여름 조선 주민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의 하나가 콜레라였다. 5월에 나타난 콜레라는 가을에 접어들며 수그러들었는데, 10월 12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환자 발생이 1만4909명이고 그중 96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걸리면 죽는다"는 것이 일반인의 인식이었다. 이 높은 치사율에 관해 대구에서 콜레라 환자들을 진료한 당시 23세의 초짜 의사 박희명은 이렇게 회고했다.

아무튼 그 당시 콜레라는 사망률이 거의 100퍼센트였어요. 왜 그렇게 높았는가 하면, 치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은 정맥을 통해서 대량의 액체를 공급해주는 것인데, 그 당시 그런 약이 하나도 없었어요. 단지 가뭄에 콩 나듯 미군들이 가져다주는 약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죠.

상당한 시일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공급이 조금 원활해지긴 했지만 필요한 양에 비하면 절대 부족했어요. 그나마 공급이 나아지고부터는 사망률이 70, 80퍼센트 정도로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내려갔으면 상황이 좋아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세계적으로 콜레라 환자의 사망률이 70 내지 80퍼센트에 달했다는 기록은 찾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일제 때 쓰고 남은 의약품들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고, 환자에게는 정맥 내로 하루에 몇 리터의 액체를 공급해야 되는데, 일제 때 수액용으로 만든 주사액이란 많아봤자 500~200밀리리터, 대부분이 그 미만이었습니다. 심지어 일제 때는 대량의 액체를 정맥 내에 주사하면 심장에 부담이 많이 가서 위험하다고까지 했어요.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수액 약품은 전적으로 미군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것도 정기적으로 충분한 양을 갖다 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단 말이죠. 의사 입장에서는 치료 수단을 뻔히 알면서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어요.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158쪽)

박희명의 회고 중에는 환자를 병원으로 실어올 때 따라오려는 가족이 거의 없었고, 죽은 후 시신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콜레라의 공포 앞에 기본적 인간관계까지 위축되었던 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에서 "콜레라"와 "호역"으로 검색해 보니 5월 하순에서 8월 초순까지 <자유신문>과 <동아일보>에 거의 매일 콜레라 관계 기사가 실렸다. (이 시기에 제공하는 신문은 이 두 가지뿐이다.)

<동아일보>의 첫 기사는 "歸還船에 虎列刺 猖獗 上陸 못하는 三千餘同胞"(5월 7일자)였다. 해남도 등 중국 남부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 3150명을 실은 수송선이 부산에 입항했으나 선상에 콜레라와 파라티푸스가 발생, 미군 방역부의 격리 소독을 받느라고 1주일째 상륙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5월 8일자 <동아일보>에는 "忠南에 虎列刺 猖獗"이란 제목으로 보령군 대천에 약 200명의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5월 14일자 <자유신문> "某島의 虎疫 발생은 浪說" 기사에는 대천 인근의 한 섬에 200명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보건후생부의 발표가 보도되었다.

그러나 하순으로 접어들며 각지의 환자 발생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5월 25일자 <동아일보> "각지에 콜레라가 만연" 기사에는 부산의 41명을 비롯해 대전 3명, 인천, 양주, 마산, 강화 각 1명의 환자 발생이 보도되었다. 5월 23일자 <자유신문> "歸還同胞船에 虎疫 침입, 今後 各地로 波及의 위험"은 대전과 인천에서 발견된 환자들이 상해로부터 부산을 거쳐 입국한 귀환 동포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6월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서울과 대구의 환자 발생이 확인되며 전국이 '콜레라 공포증'에 빠져들었다. 신문에는 콜레라 확산 보도와 함께 방역을 위한 홍보 기사도 자주 실렸다. 예를 들어 <자유신문> 7월 30일자에는 "환자는 즉시 屆出하라" 기사가 실렸고, 8월 4일자에는 "환자 숨긴 결과의 비극" 기사로 서울 상왕십리에서 환자 신고를 기피했다가 9명의 환자가 집단으로 발생한 사례를 보도했다.

전우용은 <현대인의 탄생>(이순 펴냄) 제1장에 "미생물도 해방을 맞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일본 제국의 질서가 무너진 자리를 새 질서가 미처 채우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보건의료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생활사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해방은 한국인의 몸과 의식을 갑작스럽게 혼돈 속으로 던져 놓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혼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의 활동 무대를 넓혀주었다. 조선총독부의 보건 행정 체계는 일시에 무너졌고, 그 틈에 세균과 바이러스가 굶주린 채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기 시작했다. (19쪽)

지배자로서 미군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못지않은 야만성과 폭력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보건·위생 방면에서는 단연 문명인이었다. 일본인 지배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질병을 범죄처럼 다뤘다. 그래서 공중 보건에 관한 업무를 경찰이 맡고, 의료인들은 종속적 역할만 맡았다. 전염병자 격리 병원인 순화병원은 비참한 죽음의 상징처럼 여겨져서 "순화병원 갈 놈"이란 말이 극악한 욕설로 통했다. (<현대인의 탄생>, 51~52쪽)

미군은 진주 직후 군정청에 대규모의 보건후생부를 만들고 각 도에 보건후생국을 두었다. 질병에 대해 인도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실무를 맡을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는 경찰이 공중 보건 업무를 주재하는 식민지 시대의 관행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946년 여름 콜레라가 터질 때까지는 식민지 시대 경찰의 업무 능력도 회복되지 못한 채로 미군이 목표로 삼은 보건후생 행정 조직도 갖춰지지 못하고 있었다.

1946년 조선의 도시들, 특히 38선 이남의 대도시들은 질병에 극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해방 당시 한반도 밖에 나가 있던 조선인 500만 명 가운데 200여만 명이 해방 후 1년 동안에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 70여만 명이 돌아갔으니 약 130만 명의 순증가다.

이 증가가 서울 등 38선 이남의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귀국 동포 중에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유민이 많았는데, 질서가 일찍 잡힌 이북 지역에는 자리 잡을 여지가 적었고, 1946년 3월의 토지 개혁을 계기로 이북 주민들의 이남 이주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촌 지역에는 노동력을 흡수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혼란스러운 대도시라야 유민들이 열악하나마 생존의 여건을 찾을 수 있었다. 서울의 거주 인구는 해방 후 1년 동안에 30퍼센트 이상 늘어났는데, 물 공급을 비롯한 생활 조건은 확충되기는커녕 혼란 속에서 파괴되고 있었다. 게다가 식량난으로 일반 주민들의 영양 상태도 악화, 면역력이 떨어져 있었다.

1946년 여름의 콜레라는 조선인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생활 조건의 한 모퉁이가 드러난 것이었다. 공중 보건은 미군정이 다른 어느 분야보다 양심적이고 성실한 노력을 쏟아 부은 분야라 할 수 있는데도 식민지 시대보다 더 심한 참극을 겪어야 했다. 행정부로서 미군정의 기능이 수준 이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였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인의 행동 양식을 이해하는 데는 이처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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