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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등록금 '반란', 유일한 해결책은…

[철학자의 서재]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아이들을 잡는 교육,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

얼마 전 KAIST에서 4명의 학생이 자살하였다. 이유는 학업 성적.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 무슨 성적 비관이냐고 하겠지만, 문제는 단지 학점이 아니었다. 새롭게 달라진 학업 방식에 따라 전 과목 외국어 수업, 그리고 평균에 미달되는 학점에 부과되는 수업료라는 학제적 무리수가 가져온 결과였다.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아이, 성적이 나쁘다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공부를 못했으니 그 대신 수업료를 내라고 한 것은 아이들의 자존심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혔으리라.

물론 성적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는 아이들의 나약한 의지력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차별하는 것이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교육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이 아이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교육 현실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수치로 환산하여 평가하는, 성적이라는 숫자 놀음에 아이들을 몰아넣음으로써 내가 아닌 숫자로 자신을 인식하여 단순한 체제 순응자로 만드는 정치적 전략이 실행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교육 현실이다.

지금의 교육은 미래를 책임질 인재로서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현 체제에 적합한 예스맨을 양성하는 교육에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의 현장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잡는, 죽음으로 아이들을 몰아넣는 무서운 살육장이 되고 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이라는 싸움을 해야 하며, 낙오자가 되거나 실패자가 되면 절망 속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힘겹게 끊으려는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 무기력한 상황,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찾고자 한다.

▲ <페다고지>(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페다고지>는 이 황망한 전쟁터로 변해버린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는 한 편의 오래된 교육서이다. "Pedagogy of the Oppressed", 즉 "피억압자들의 교육학"은 브라질 빈민 지역에서 태어난 프레이리의 자전적 교육서이자 억압자들에 대항하는 피억압자들의 자기 의식화를 위한 교육 방법으로, 지도/편달이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의 대화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프레이리의 교육 방법은 단지 아이들에게만 혹은 브라질의 교육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계에서 정치적 지배 권력의 독점적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을 볼모로 모든 사람을 종속화시키려는 현 세계에 적용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여는 데 하나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3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페다고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화와 비인간화

교육의 목적은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화야말로 인류의 궁극적 목적이다. 또한 인간화는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인식함으로써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기의식화로의 길이다.

하지만 비인간화 역시 인간화 과정과 함께 진행된다. 더구나 비인간화는 단지 피억압 민중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비인간화는 인간성을 빼앗긴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간성을 빼앗은 사람들과도 관련되며, 더 완전한 인간성을 찾으려는 소명의 왜곡이다." 억압자는 비인간화를 위해 피억압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은 다시 비인간화를 낳는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억압-피억압의 고리가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피지배자들에 대한 지배자의 억압은 그들을 자신들의 세상에 순응하도록 길들이는 데 있다. 하지만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유를 상실한 채 비인간적 상태로 삶을 그저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길들여지면 지배자의 억압의 희생물이 되어, 세계 안에서 나의 존재는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억압적 힘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길들여짐을 거부하고 공격해야 한다. 이것은 프락시스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성찰과 행동의 목적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테제 11번에서 밝혔던 것처럼, 더 이상 세상을 해석하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때의 변혁은 무력 혁명을 통해 그냥 세상을 뒤엎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모든 피억압인들의 인간화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억압의 희생제물로서 비인간화의 늪에 빠져 있는 민중들을 인간화의 길로 이끄는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인식하여 변혁의 길로 들어서게 할 교육의 몫이라 할 것이다.

변혁을 위한 투쟁은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변혁의 선두에 서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삶이 가장 열악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부르주아와의 적대적 관계에서 혁명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던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이야기처럼, 프레이리의 투쟁 역시 자기 의식화 혹은 자기 환경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투쟁은 적과의 무력 투쟁이나 상대를 파괴시켜 전멸하게 하는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의식화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갖도록 하는 교육적 투쟁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인간화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인간화로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선전, 책략, 조작은 인간성 회복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유일한 도구는 인간화 교육이며, 이를 통해 혁명 지도부는 피억압자와 항구적인 대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화 교육의 방법은 교사가 학생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표현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교육 방법이다.

지식은 무조건 쟁여놓는 은행 금고의 돈이 아니다

거슬러 생각해 보니 강단에 선 지 15년이 되어간다. 꽤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학생들은 내게 교수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그 호칭만큼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나는 그냥 학생들보다 먼저 태어났고 먼저 조금 더 배웠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교수보다 선생이란 호칭을 더 좋아한다. 사실 가르치는 것도 별로 없으니 교수라는 말이 버겁기는 당연할 듯싶다.

세상에는 다양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내 삶의 터전인 교육 현장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두 부류만 있다. 이들은 수직적으로 위치하여 서로를 견제하거나 의지한다. 프레이리는 교육 현실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를 아래의 열 가지로 특징지었다. 자신이 어느 쪽에 있든 상관없다. 이것들 가운데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

1.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운다.
2.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3. 교사는 생각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생각의 대상이다.
4. 교사는 말하고 학생들은 얌전히 듣는다.
5. 교사는 훈련을 시키고 학생들은 훈련을 받는다.
6. 교사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고 실행하며 학생들은 그에 순응한다.
7. 교사는 행동하고 학생들은 교사의 행동을 통해 행동한다는 환상을 갖는다.
8. 교사는 교육 내용을 선택하고 학생들은 거기에 따른다.
9. 교사는 지식의 권위를 자신의 직업상의 권위와 혼동하면서 학생들의 자유에 대해 대립적인 위치에 있고자 한다.
10. 교사는 학습 과정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단지 객체일 뿐이다.


"이건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항목이 있는가? 나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 애를 많이 쓰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항목은 솔직히 없다. 은연중에 '나는 교수이고, 너는 학생이다'라는 권위주의적 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상하 수직적 혹은 종속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자신을 인식하기 위한 교육이기보다는 세상에 널려 있는 지식들을 머릿속에 채워 넣음으로써 남들보다 조금 더 유식해지기 위한 몸부림이라 할 것이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교육 방식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 이야기한다.

은행 저금식 교육관에서 지식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잘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무엇이다. "네가 모르니까 내가 알려줄게. 내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이것이 바로 은행 저금식 교육관이다. 이 상황에서 학생은, 자신이 그 교육의 주체임을 망각하고, 알려주는 내용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려고만 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억압 이데올로기의 한 특징이다.

은행 저금식 교육은 학생들의 창의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르치는 것에 댓글을 달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과묵한 학생들을 요구한다. 의문이나 호기심은 불필요한 행동이며,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단지 교수는 가르치기만 하면 되고, 학생은 배우기만 하면 된다. 배우고 있는 내용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줄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단되고 반듯하게 제시되어 그 틀에 맞추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틀이 바로 억압자의 이익인 것이다.

그 틀에 딱 맞게 재단된 사람들은 자신이 정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 뿐만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는 현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단순해져 버린다. 그래서 세계의 문제를 폭로하고 변혁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지배 이데올로기는 견고한 성을 쌓게 될 것이며, 그들의 정치 전략적 교육의 희생양으로 죄 없는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게 될 것이다.

대화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제 교육은 주고받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프레이리는 "문제 제기식 교육을 통해 자신들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세계와 더불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단지 지식을 아는 사람이 지식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수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 서로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를 풀고자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교육 방식이다.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며, 그러한 인식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짐으로써 서로를 알아가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대화는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혹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해서는 안 되며, 비인간화된 인류의 인간화를 위해, 종속적 관계를 깨뜨리고 해방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할 것이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대화를 위해 필요한 것 다섯 가지-세계와 인간에 대한 원대한 사랑, 겸손한 태도, 인류에 대한 깊은 신념, 희망, 비판적 사고-를 제시하고 이것이 없으면 진정한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조건들은 대화를 나누는 나와 너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목줄에 매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현 교육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며, 비인간화의 굴레로부터 인간화로의 해방을 실현가능하게 해 줄 동아줄이 될 것이다.

최근 서울시청 앞 광장에 또 다시 촛불이 켜졌다.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히는 촛불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공부에 전념해야 할 학생들이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청춘을 모두 허비하고 있는 현실에 맞서는 그들의 대안이 바로 "반값 등록금"이다.

이 말을 꺼낸 어느 정치인은 공약(空約)이라 생각하면서도 내심 당선 욕심에 불쑥 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또 논의했던 학생들은 현재의 교육 현실을 타파하고 능동적인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의식화할 수 있는 도구로서 "반값 등록금"의 실현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을 대화로 전달하려는 학생들의 뜻은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오히려 대화를 하려는 학생들을 연행하거나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정부는 자신들이 가진 힘의 논리를 과시하려는 제스처로 일관했다. 대화가 단절된 상황에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아이들을 잡는 교육으로 점점 끌려가게 될 것이다.

아고라에 촛불이 켜졌다. 대화를 하려고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상대가 나보다 유식한 사람이면 어떡할지 고민하지 말고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 그리고 속 시원히 이야기를 나눠라. 그러다 보면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도, 수치로 평가된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아이들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대화의 장으로 한 걸음 내딛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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