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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에도 '국기 모독죄'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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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에도 '국기 모독죄'가 있었구나!

[해방일기] 1946년 6월 10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1946년 6월 10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오늘은 6·10 만세 운동 2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민전에서는 서울운동장에서 11시 반부터 만세 운동 기념식을 열었는데, 한편에서는 10시부터 독촉국민회 전국대회가 10시부터 정동예배당에서 열렸습니다.

지난 3·1절 행사를 끝내 양쪽에서 따로 열어 뜻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사더니 6·10 기념일에도 조선의 정치계는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군요. 독촉국민회 진행 중 "6·10 희생 동지에 대한 묵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국내 민족 운동의 가장 큰 발현의 하나였던 만세 운동의 의미를 우익에서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3·1절 행사 통합 문제도 애초에 발단은 어쨌든 마지막 단계에서 우익 쪽에서 너무 무성의하게 나왔기 때문에 언론사 대표단이 우익 행사 보도 거부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취했죠. 민족주의를 받든다는 우익에서 민족적 행사에 무성의하다는 사실이 언어도단이라는 개탄이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경쟁적으로 행사를 벌이는 것도 아니라 아예 만세 운동을 묵살해 버리는 꼴이니, 이것을 '점입가경'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선생님은 독촉국민회에 참석하셨죠. 20년 전에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때의 만세 운동을 묵살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심경이 어떠셨습니까?

안재홍 : 부끄럽다는 말씀부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년 전을 돌아보며 <조선일보> 1926년 6월 10일자 사설의 한두 대목을 떠올려 봅니다.

"아아, 2300만의 조선인 대중아. 오인은 이제 우리의 최종의 제왕을 봉결(奉訣)함에 당하여, 다시 역사적 유래를 말하고자 아니하고, 선민선철(先民先哲) 서로 전하던 의법(儀法)을 말하고자 아니하고, 이 어른으로 하여금 그 척강(陟降)하시는 영이 만중의 애끓는 정곡을 굽어 살피시기를 하소할 사이도 없도다.

(…) 모든 식자와 청년과 마음이 있는 자들도 울어라. 평생의 품고 있는 지원(至願)과 불같이 타오르는 이상은, 이 어른의 기구하던 일생과 한가지로, 항상 실의의 눈물 속에 잠겨버리지 아니하였는가.

모든 가난한 자, 괴로운 자, 세상이 귀치않은 자,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자, 그 몸을 둘 곳이 없는 자는, 각각 그의 선 자리 앉은 자리 넘어진 자리 얽매인 자리에서, 마음껏 기운껏 목청껏 울지어다. 가슴 치고 발 구르고 몸부림하고 울지어다. 이 어른의 역사가 한 걸음씩 향하여 가던 그대로, 당신들의 운명도 걸음걸음 암담한 세계로 갔었느니라."

만세 운동은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일어난 것이었죠. 순종의 승하는 우리 세대의 민족의식에 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7년 전 고종 승하 때 3·1 운동으로 일어난 변화가 완결된 것입니다. 조선인의 민족 운동이 조선 왕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 해의 만세 운동 자체는 크게 격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별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고 전국적으로 피검자 1000여 명에 수감자 53명, 그중 1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민전에서 기념식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우익에서 맞대응을 피한 데는 그 만세 운동이 3·1 운동과 비할 바 없이 연약한 것이었다고 보는 까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크게 터지지 않았어도 조선인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그 일은 조선 민족 운동의 큰 고비였습니다. 그 기념식을 "6·10 운동 20주년 기념식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촉진 시민 대회"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목적과 결부시킨 민전 측의 처사도 안타깝지만, 민족 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민족 진영'의 무능함에 스스로 참담함을 느낍니다.

김기협 : 선생님은 당시 <조선일보> 주필로 필봉을 휘날리실 때인데, 사건 후에 남기신 논설을 보여주실 만한 것은 없는지요?

안재홍 : 6월 10일 이후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는 글을 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6월 15일에야 문제를 개관하는 사설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끝부분만 옮겨놓죠.

"책임을 구태여 논할진대, 전 조선의 위정당로자가 그 책임자이요, 전 조선에 군림코자 하는 40만의 일본인이 또 그 책임자이요, 조선 2300만 대중의 스스로 참기 어려운 불행한 지위를 목전에 던져두고 홀로 고침사지(高枕肆志)하고자 하는 천견편견인 전 일본 국민 된 자는 또 그 책임자임을 피치 못할 것이다. 6월 10일의 사건이 당로의 주장하는 의미대로 경미할는지 모른다.

(…) 천하의 민중으로 더불어 융체와 성패를 만세에 결정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만중의 가슴속에 소용도는 엄숙한 사실을 엄폐하고 써 일시를 호도하고자 할진대, 그는 겹겹의 의미로써 무성의의 심한 자이라 할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일시의 정실(情實)관계로써 엄연한 사실을 비켜놓고 책임의 전가를 기획하는 자도 또한 무성의한 자이라 할 것이다."

그 때 만세 운동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이런 글을 쓰고 있던 내가 당시 내가 책임을 묻던 자들이 쫓겨난 이제 와서 그 운동을 기념하는 일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무성의한 자입니다. 참담한 일입니다.

김기협 : 순종의 죽음이 당시 사람들의 민족의식에 한 분수령이 되었다는 선생님 말씀에 좀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순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데 따라 즉위했고, 3년 후 합방에 이르기까지 임금 노릇을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괴뢰 황제'로 인식되는 존재입니다.

1919년 고종의 죽음이 3·1 운동의 계기가 되는 데는 그 공과를 차치하고 임금으로서 고종의 실체가 사람들의 의식에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7년 후 순종이 죽을 때 순종의 실체가 사람들에게 강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1926년 당시의 민족주의자로서 선생님이 느끼고 생각하신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요?

안재홍 : 순종의 실제 역할이 없었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지요. 고종은 40여 년간 재위 중에 잘한 일도 없지 않겠지만, 꾸준히 망국의 길을 걸었던 임금입니다. 순종에게는 망국을 향해 더 잘못할 일거리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 죄 없이 왕위를 잃은 순종에게 아무 죄 없이 나라를 잃은 대다수 국민이 동병상련의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일본의 '문화 정책'의 작용으로 민족주의 운동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식민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죠. 식민지 상태에서라도 민생은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물산 장려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자치 운동도 물산 장려 운동과 같은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족 주체성의 포기 여부가 그 사이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타협파와 비타협파의 경계선이었지요. 아무 죄 없이 나라 잃은 사실을 순종의 승하를 보며 되새긴 것이 비타협파 민족주의의 정서였습니다.

김기협 : 만담가 신불출 씨가 6·10 만세 기념 공연 중 봉변을 했다더군요. 6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재담꾼 신불출이가 재담을 잘못하다가 경을 쳤다. 신불출이는 11일 밤 8시 40분경 시내 국제극장에서 6·10 만세 기념 주간 공연에 나와 재담으로 실소사전(失笑辭典)이란 만담을 하고 있을 즈음 말끝에 우리나라 태극기에 언급하여 청색은 소위 우요 적색은 좌다. 그리고 팔괘는 연합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조선은 좌우가 갈리 우고 연합국은 언제나 우리나라 주위에 있다. 또 미소는 전쟁을 하리라는 재담을 하자 돌연 관중석에서 신성한 국기를 모독한 데 의분이 폭발되어 신불출을 하단시킨 다음 그 중 일부 격분한 군중에게 구타되어 일시 극장은 소란하였다. 급보에 접한 경찰과 MP의 제지로 동 9시 반경 수습되었는데 불출은 방금 백인제 외과에 입원 중으로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경찰에서는 또한 주최 측인 조선영화동맹과 예술통신사 책임자도 소환하여 조사를 하고 있다.

신불출 씨는 좌익 대중 집회에 많이 등장, 관중의 인기를 끄는 인물이라서 극우파에게 단단히 찍혔던 모양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며 실소를 금치 못한 것이, 요즘도 전임 총리가 어느 행사에서 태극기를 밟고 사진을 찍었네 어쨌네 하고 야단이죠. 애국심을 형상에 묶어놓는 것은 극우파의 전통인가 봅니다.

안재홍 : <동아일보>가 티를 좀 낸 기사군요. 신불출을 애 이름 부르듯 하는데, 그 사람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일대의 풍류객이죠. 그 사람 창씨개명을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강원야원(江原野原)이에요. '에하라 노하라'. 풍자적인 이름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내 보기에 그중 일품이었습니다.

신 씨가 명성을 날린 것이 1931년의 일입니다. "동방이 밝아온다"란 연극의 마지막 대사를 이렇게 바꿔서 외치고 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하더군요.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 삼천리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 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 학력 없는 연극 배우가 <삼천리> 1937년 1월호에 기고한 글 "극예술협회에 보내는 공개장"은 연극계뿐 아니라 문화계 전체에 큰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인텔리 연극인들의 모임인 극예술협회에서 예술극과 상업극을 구분해 상업극을 폄하하던 풍조에 대한 반론이었죠. 이 글에서 그는 예술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 그리고 흥행적 측면, 세 가지를 모두 연극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했습니다. 상업극과 예술극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제시한 탁견으로 많은 사람들이 탄복했습니다.

광대를 자처하면서 스스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이지만, 생각 있는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문명인이요, 지사라고 여깁니다. 그런 사람을 주먹으로 다스리려고 나서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 사회의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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