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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식물학자였던 그 산의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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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식물학자였던 그 산의 친구여!

[꽃산행 꽃글·4] 허물어져가는 산소 앞의 할미꽃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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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산문을 보니 그이도 어디서 전해들은 것이라며 이런 문장을 적어놓았다. 꽃이 아름다운 건 땅에서 이만치 떨어져서 피어 있기 때문이라고.

수학적 모델을 이용하여 이렇게 한 겹 더 말할 수도 있겠다. 산은 땅을 x축으로, 나를 y축으로 하는 좌표 공간이다. 그 아득한 공간의 x축에서 이만치, y축에서 저만치 교차하는 곳에서 미지수로 피어난 꽃. 그래서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 한계령풀.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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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 //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 꽃이 좋아 / 산에서 / 사노라네 // 산에는 꽃 지네 / 꽃이 지네 /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너무나도 유명한 소월의 산유화이다. 이 시에서 '꽃'만큼이나 핵심적인 시어가 있다. 그것은 '저만치'이다. 자연과 인간의 거리이기도 하고 인간과 자연의 향수에 대한 거리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미당은 그 부사의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저 수세(守勢)의 난처(難處)한 아름다움."

▲ 진달래. ⓒ이굴기

진달래꽃 한 무더기가 산등성이에 저만치 피어 있었다. 같은 나무에서도 꽃들의 운명은 다 다르다. 모두들 혼자서 피고 지는 것이다. 활짝 만개한 꽃들이 있었다. 그 옆에서 몸살을 앓는 꽃봉오리가 있었다. 이제 겨우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하는 꽃자리가 있었다. 벌써 색깔이 많이 수척해진 늙은 꽃잎이 있었다. 그리고 또 있었다. 나무 아래로 흩어진 꽃잎들. 흙속으로 녹아잠기는 꽃잎들.

3

식물학과 졸업하고 30년도 더 지나 뒤늦게 꽃에 빠지니 눈에 보이는 게 다 식물이다. 이 뒤늦은 후회를 어찌하나. 지나치는 사람들도 모두 나무로 보인다. 파라택소노미스트(준분류학자)의 어설픈 지식으로 이렇게 동정(同定)해 보았다.

암수딴몸. 두 개의 가지가 겨드랑이에서 마주나기로 난다. 가지 끝은 다섯 갈래로 찢어진다. 갈래의 끝마디마다 힘이 생기라고 단단한 각질로 덮여 있다. 각질 안에는 반달 모양의 흰 무늬가 떠오른다. 꽃받침은 없다. 밋밋하게 짧은 대궁이 있고 그 위로 일곱 개의 구멍이 뚫린 둥근 덩어리가 있다. 그 덩어리에서 희고 검은 잔뿌리가 울창하게 나 있다. 잔뿌리는 하늘을 지향하지만 이내 아래로 추락한다. 이 둥근 덩어리 부위를 통틀어 꽃이라고 해도 될까?

이 종의 가장 큰 특징은 뿌리이다. 잎자루처럼 잘록한 발목 아래 몽당한 뿌리가 둘 있다. 서로 정확히 대칭이다. 그 말단도 가지 끝과 마찬가지로 다섯 갈래로 찢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무엇에서 떨어져 나온 듯, 큰 상처가 아물어지는 듯, 질긴 가죽으로 동여매어 져 있다. 그것들은 돌아다니는 데 능숙하다. 그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아직도 찾아 헤매는 중일까?

산 아래쪽이나 물가에 주로 모여서 산다. 내부에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영양분을 외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연약한 풀을 삶아먹거나 그 풀을 뜯어먹고 알토란같이 키운 짐승의 살을 가로채 먹는다. 즉, 기생살이를 한다. 손바닥, 발바닥을 제외한 전신에 부드러운 솜털이 빽빽하다. 무슨 소리가 웅얼웅얼 나오는 입구인 입술에도 털이 없다. 직립형에 작은 키. 여러 해 내지 수십 년 살다가 그 어디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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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떠나서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전라북도 순창의 회문산.

봉우리와 골짜기가 첩첩산중을 이루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동학 혁명과 한말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또 한국전쟁을 전후해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와 정치훈련원 및 세탁공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회문산은 우리나라에서 5대 명당으로 꼽힌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여느 산들보다 묘가 눈에 많이 띄었다.

▲ 할미꽃. ⓒ이굴기

정상인 큰지붕(해발 837미터)에서 내려오니 양지바른 곳에 허물어져가는 산소가 두 기(基)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묘전화(墓前花)처럼 할미꽃이 서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할미꽃. 논에서 잘 익은 벼처럼 할미꽃은 고개를 얌전하게 숙이고 저만치 있었다. 나는 할미꽃과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납작 엎드렸다.

5

할미꽃의 나라에도 저기에 엎드려 꽃과 눈 맞추려 애쓰는 현진오 박사에 필적하는 식물 분류학자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나라에도 소월이나 미당 같은 시인이 있을 것이다. 할미꽃은 암수한몸이다. 그러니 그 할미꽃 박사는 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겠다. 그분은 지금 자신을 찍어가는 풍경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겠다.

▲ 할미꽃을 찍는 현진오 박사. ⓒ이굴기

사람에게도 참 아름다운 때가 있나니, 그중의 최고는 바로 지금이로다! 땀 뻘뻘 흘리며 내 얼굴 앞에 엎드린 이여. 아주 먼 촌수의 내 친척이여. 오체투지하듯 그대가 온몸을 흙으로 던지고, 그대 전부를 땅에 포개놓는 이 순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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