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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직장인이 야근을 하는 진짜 이유는?

[공작의 꼬리 경쟁·27] 반쪽짜리 효율과 보이지 않는 고통

기업이 어떤 상품에 들어가는 비용을 낮추면 그 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되는 경우 중에 하나가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 단가를 낮추는 것이다. 비용이 절감되어 가격을 낮출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이윤이 증가하는 것이다. 물론 증가분의 일부가 피고용자에게 가고, 상품 가격이 낮아진다면, 이는 기업과 소비자, 피고용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용 절감으로 인한 이윤 증가가 단지 고용된 노동자들을 더 압박하여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효율 증가가 아니다. 고용 인원을 줄이거나 업무는 증가시키면서 상응하는 보수는 지불하지 않으면서 달성한 비용 절감을 통한 기업의 이윤 증가는 기술 혁신의 경우와는 달리 근로자의 고통 증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시장에서는 이윤 증가는 계산되지만 피고용자의 고통은 아무리 클지라도 무시된다.

전기톱

어떤 미국의 유명한 경영인의 별명이 '전기톱'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고용원을 냉혹하게 잘 자르는 데 수완을 발휘하여 붙인 별명이다. 그에 따른 노동의 비용 절감으로 회사의 이윤은 증가하고, 그 회사의 주가가 많이 올라서 경영인으로서의 인기(악명)를 누린 사람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근래에 많은 기업들은 피고용자의 수는 줄이고 근로자의 업무 부담을 늘려 비용을 절약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이윤이 증가하면 효율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노동을 압박함으로써 얻어낸 이윤 증가는 효율하고 상관이 없다.

예를 들자면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단가가 1000원 들어간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생산하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 약간의 임금 상승과 함께 각 고용원들의 업무 시간을 30퍼센트(%) 늘렸다고 하자. 그 결과 생산 단가가 1000원에서 700원으로 떨어졌다고 하면, 같은 물건을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한 것이니, 그 기업의 효율이 올라갔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 기업이 판매 가격을 내려 더 많은 양의 제품을 판매하여 이윤을 높였다고 하자.

그러면 여기서 기업은 이윤이 올라가고, 소비자는 싼 가격에 제품을 구매하게 되고, 피고용자는 임금 상승으로 더 많은 월급을 받게 된다. 이것이 시장주의자들이 자랑할 만한 성공 사례의 하나다. 경쟁이 효율로 연결되며 그 열매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겉으로는 모두가 다 이익을 본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업무가 30퍼센트 늘어나는 데 따른 고통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보수는 증가했지만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한 고통 증가로 고용원들은 오히려 더 불행해졌을 수 있다. 그들의 고통 증가를 외면하면서 효율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피고용자들의 고통 증가를 고려한다면 봉급이 오르고, 일인당 국민 소득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대다수 구성원들은 더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임금 결정은 효율적이다?

한국은 외한 위기 이후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10여 년 동안 꾸준히 직장인들을 압박하는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비정규직이 많이 도입되었으며, 직장인들을 더욱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직장인들은 직업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훨씬 더 증가했다. 그 불안감으로 그들은 기업이 업무를 증가시키거나 부당한 대우를 해도 불평 없이 이를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고용원의 고통 증가는 이윤 증가나 효율 증가를 이야기할 때에 고려하지 않고 무시한다. 물론 국민 소득의 계산에도 피고용자의 고통 증가는 계산하지 않는다. 이윤의 증가를 위해서 피고용자가 부담하는 비용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으므로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의 이윤 증가에 이러한 숨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윤 증가만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그 숨은 고통은 점점 더 커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현재의 한국 상황이다. 시장주의자들은 그러한 고통의 대가는 가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즉 기업에서 지불하는 임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며, 그 임금 결정에 따른 자원 배분이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어진 임금 조건 하에서 노동자에게 얼마나 일할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노예와 같이 노동이 강요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일을 선택한 것이니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이 효율적이라는 완전 경쟁의 경제 이론의 결과는 한국의 현실 경제에 적용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선택이 극도로 제한된 노동 시장에서 형성된 임금과 그에 따른 자원 배분을 완전 경쟁 이론을 적용하여 효율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노동 시장이 효율적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전제 조건들 중 중요한 것의 하나는 주어진 임금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고용의 기회가 열려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있어, 같은 일을 하면서 낮은 임금을 받는 차별적 대우가 존재하는 경우가 없어야 하며, 실업자와 비실업자로 구분되는 상황 역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완전 경쟁 이론의 노동 시장에서는 실업이나 비정규직과 같은 두려움에 바탕을 둔 노동자들에 가해지는 압박 역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만약 한 기업이 어느 노동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그 노동자는 다른 기업으로 옮기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노동자는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는 것과 실업자로 전락해야 하는 두 가지 선택 밖에는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실업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과중한 업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기업이 임금은 240만 원으로 동결된 상태에서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10시간으로 증가시켰다고 하자. 즉 초과 업무를 수행하든지 아니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 직장인은 회사를 그만두고 실업자가 되는 것보다는 초과 시간을 받아들이고 회사에 남는 선택을 하게 된다.

물론 시장주의자들이 이용하는 교과서 경제에는 이러한 노동 시간 증가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이 말하는 완전 경쟁 시장에서는 이 직장인이 받는 임금에서 같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다른 회사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부당한 10시간 근무를 요구하면 똑 같은 보수에 똑 같은 노동을 요구하는 다른 회사로 옮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이론이 얘기하는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한 직장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택이라는 것은 실업밖에 없는 상황인 경우가 대다수이며, 이런 상황에서 그러한 불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자유 거래가 아니고 불안감에 기초한 압박으로 봐야만 한다.

한국의 현실 시장 상황이 이론에서 얘기하는 것과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경제 교과서의 결론을 현실에 무리하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직장인들의 임금, 노동 시간, 처우 등과 그 효율성에 대한 문제를 논할 때 단순히 이론에서 얘기하는 완전한 시장을 강조하여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에 의한 자원 배분이 효율적이라는 주장과, 그 효율성을 근거로 노동 시장의 운영을 정당화하려는 주장 역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연합뉴스

반쪽짜리 효율을 위한 경쟁 논리

경쟁 논리는 경쟁 강화를 통해 효율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효율의 증가는 경제성장과 국민 소득 증가를 가져와서 모두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잘못된 논리라는 것은 효율이 진짜 효율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경쟁 강화가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그런 효율 증가가 아닐 수도 있으며, 설사 경제 성장이 된다 하더라도 다수가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기업의 이윤 증가만을 고려한 것이라면 쓸모없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경쟁 강화를 통한 효율 증진은 직장인들의 희생을 통하여 달성된 기업만을 위한 반쪽짜리 효율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반쪽짜리 효율은 어떻게 증가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불안감 조성이다. 그 불안감 조성은 경쟁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다. 우리가 경쟁을 반대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심지어는 경쟁은 좋은 것이라는 사고가 팽배한 경쟁 만능의 사회에서는 경쟁 뒤에 숨은 그 불안감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연속되는 경쟁의 삶에서 입시 경쟁에서 뒤처질까 불안해하고, 진급을 하지 못할까 불안해하고, 조기 은퇴 당할까 불안해하고, 실직할까 불안해한다. 경쟁의 강화는 이러한 불안감 강화를 위한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기업의 고위직으로부터 말단 사원까지 모두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사회 전체에 조성된 불안감은 일하는 사람들이 과중한 업무나 부당한 대우에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을 압박함은 이윤 증가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윤 증가는 한 기업의 새로운 기술 개발과 같은 변화로 이윤이 증가하는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기술 개발을 통한 효율 증가는 기업의 이윤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경쟁 강화를 통해 피고용자를 압박함으로 생기는 이윤 증가는 쉽게 말하자면 피고용자의 고통의 증가 때문에 생기는 반쪽짜리 효율 증가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경쟁의 증가와 효율의 증가로 얻는 경제성장으로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기업만 살아야 하나?

기업이 잘 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직장인들의 처우 개선과 같은 요구에 대하여, 흔히들 "기업도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기업 없이는 일자리도 없다. 그러나 "기업도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이 말은 기업이 죽고 사는 극단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직장인들의 요구 부정이라는 결론을 이미 질문 안에 포함시켜 놓은 것이다.

"기업이냐, 아니냐" 둘 중 하나만 선택 가능하고, 다른 가능성은 배제한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논리는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편 가르기를 수월하게 한다. 일단 노동자 편이냐 기업 편이냐 하는 두 편이 갈라서면 그 논의는 끝이다.

그래서 기업도 살아야 한다는 편에 선 사람과 노동자도 살아야 한다는 편에 선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기업 없이 노동자가 없듯이 노동자 없는 기업도 없다. 어느 한 쪽이 사는 것이 다른 쪽이 죽는 걸 의미하는 극단의 사고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멈추게 한다.

논의의 핵심은 그 사회의 경제 환경이 과연 건실한 기업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건전한 기업들이 번성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은 경쟁 만능의 논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독점력을 가진 큰 기업의 시장 장악력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많은 기업들 특히 작은 기업들은 경쟁의 논리가 팽배한 현실의 악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

큰 기업은 독점력을 이용해서 작은 기업들을 압박한다. 그래서 작은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피고용자들을 압박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생존권을 쥔 대기업이 결정하는 납품 가격을 경제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효율이라는 말로 정당화하는 것은 무리다. 마찬가지로 기업이 결정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들의 차별적 보수나 근무 조건들이 효율적이라고 정당화할 수 없다.

현실과 괴리된 그리고 현실을 외면한 이론, 특히 그 현실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무시한 이론 적용은 틀린 것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물론 기업은 이윤을 올려야 하지만, 그것이 다른 작은 기업이나 일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한 것이라면 그 희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저울의 한 쪽만의 추만 본다면, 저울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알 수 없다. 둘 다 봐야만 한다. 그리고 특히 경쟁과 그에 따른 성장으로 국민 소득이 올라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저울의 기울어진 다른 추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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