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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본보다 전염병 사망률이 낮았다?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1] 조선의 전염병

대한제국 시기 한국인의 전염병 발병 상황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필자가 알기로는, 내부 위생국이 1909년에 펴낸 책자인 <한국 위생 일반(韓國衛生一斑)>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책을 발간한 1909년 6월말 현재 위생국 직원 23명 가운데 한국인은 8명, 일본인은 15명이었다(<한국 위생 일반> 30쪽). 당시 국장은 한국인 염중모(廉仲模)였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사(技師) 4명과 사무원 1명, 기수(技手) 3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이 자료도 일본인이 주도하여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02년 콜레라(恠症) 대유행 때의 신문 보도들을 보면(제6회), 이 <한국 위생 일반> 이전에도 대한제국 정부가 전염병 발생에 대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한국인과 재한 일본인의 전염병 실태에 관한 통계가 수록되어 있는 <한국 위생 일반>(1909년).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에서 출간한 것이지만 실무적으로는 일본인이 주도한 것이었다. ⓒ프레시안

<한국 위생 일반>에는 표 11-1과 같이 콜레라(虎列刺), 장티푸스(腸室扶私), 적리(赤痢), 디프테리아(實布垤里亞), 두창(痘瘡), 발진티푸스(發疹室扶私), 성홍열(猩紅熱) 등 1908년과 1909년 상반기의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가 국적별, 지역별로 집계되어 있다.

▲ <한국위생 일반>(1909년). ⓒ프레시안

이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08년 한국인 전염병 환자는 2050명, 사망자는 584명이었으며, 1909년 상반기에는 각각 4354명과 904명이었다. 한편 일본인은 1908년 환자 1164명, 사망자 314명이었으며, 1909년 상반기에는 각각 433명, 119명이었다.

전체 법정(法定) 전염병(당시 대한제국 법령에는 성홍열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글에서는 함께 다루었다)의 치명률은 20%를 상회했으며, 특히 콜레라의 치명률은 무려 65~81%나 되었다.

1908년과 1909년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가장 흔했던 전염병은 두창(천연두)이었으며, 장티푸스와 적리 등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 그 뒤를 이었다. 한국인보다 우두 접종률이 높았던 일본인도 두창의 위협으로부터 별로 안전하지 않았다. 반면에 디프테리아와 성홍열 등 호흡기 질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전염병 발생을 보면(표 11-2), 적리와 장티푸스가 선두를 다투었고 디프테리아가 그 뒤를 이었으며 두창은 상대적으로 적은 점 등 한국과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치명률에서는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프레시안

▲ <한국 위생 일반>(1909년),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프레시안

인구 규모의 차이를 보정(補正)하기 위해 인구 10만 명당 환자 및 사망자를 계산해서 비교해 보면(표 11-3), 세 인구 집단 사이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인구 10만 명당 전염병 환자는 재한 일본인 1001명, 재일 일본인 181명, 한국인 23명이었으며,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재한 일본인 270명, 재일 일본인 49명, 한국인은 7명이었다. 같은 일본인인데도 한국에 거주하는 경우 본국 일본인에 비해 환자와 사망자 모두 5배 이상 많았으며, 이들에 비하면 한국인 환자 및 사망자 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한국인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일본인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1908년에 나타난 재한 및 재일 일본인 사이의 차이가 예외적인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1906년과 1907년의 자료들을 비교해 보았다(표 11-4). 그러나 이때에도 역시 재한 일본인은 본국 일본인보다 환자 수에서 6배 이상, 사망자 수에서는 9배가량이나 되었다.

요컨대 1906년~1908년 사이 재한 일본인은 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보다 전염병의 피해를 훨씬 많이 받았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것은 당시 한국이 전염병 천국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인들이 낯선 한국 풍토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자료를 좀 더 상세히 보면 장티푸스, 적리,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과 두창에서 차이가 뚜렷했고 성홍열은 상대적으로 차이가 적었으며, 디프테리아는 재한 일본인에서 오히려 조금 적었다. 디프테리아와 성홍열은 주로 영아에서 발생하는 전염병이므로 아직 영아가 적었던 재한 일본인에서 발생률이 적었던 것이었을까?

▲ 제1차(1907년) 및 제2차(1908년) <통감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프레시안

재한 일본인의 전염병 발생률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데에 반해, 같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그것은 지나치리만큼 낮았다. (일본인보다 한국인의 전염병 발생과 사망이 적은 양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지속된다.) 위생 환경, 의료 접근, 위생 지식과 습관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보다 크게 열악했을 한국인에서 전염병 발생과 사망이 엄청나게 적었던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한국 위생 일반>에 언급되어 있듯이, 당시 의사와 당사자 및 가족에 의한 한국인의 전염병 신고가 극히 낮았고 위생 경찰의 "검병적(檢病的) 호구 조사"에도 매우 비협조적이었던 점이 실제 상황과는 크게 동떨어진 통계치가 작성된 가장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한국인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는 대체 얼마나 되었던 것일까?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이다.

▲ <한국 위생 일반>(1909년),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일본 거주 일본인에 비해 재한 일본인의 전염병 사망자 수는 지나치게 높게, 반대로 한국인은 지나치게 낮게 나타나 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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