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언급 빈도가 높아지는 것이 곧 그의 대표적인 경제학 저작, 즉 <자본(론)>의 판매 부수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도 미국발 금융 위기에 때맞춰 강신준이 독일어 본을 새로 번역한 <자본>(길 펴냄)을 낸 바 있지만, 눈에 띠는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은 결코 읽기 녹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혼자서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여럿이 공부 모임 정도는 만들어 서로 독서를 채근하고 자극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끝까지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도 있는데, 불행히도 <자본>은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곧바로 <자본> 읽기에 착수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좀 더 손쉬운 우회로를 찾곤 한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자본> 대신 그 내용을 적당히 압축한 대중적 입문서를 읽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용도로 소련이나 동독 아카데미에서 나온 정치경제학 교과서들(말하자면 이 나라들의 국민윤리 교과서)을 애용하곤 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한국인 저자가 쓴 이 방면의 괜찮은 책들이 간간이 선을 보이고 있다. 가령 <자본> 번역자인 강신준이 직접 <자본> 해설서를 내기도 했고(<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길 펴냄)), 또 다른 입문서인 강상구의
(레디앙 펴냄)는 자칭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제까지의 <자본> 관련 서적 목록에 좀 낯선 이력의 책 한 권이 추가되었다. 우선 저자가 자본주의의 총본산이자 중심 무대인 미국 출신인 것이 이채롭고, 또한 단순한 집필물이 아니라 저자의 <자본> 강독 동영상을 활자화했다는 점이 신선하다. 게다가 옮긴이가 <자본> 국역자인 강신준이라는 것도 범상치 않은 인연으로 다가온다.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 <자본> 강의>(이하 <강의>)가 바로 그 책이다.
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의 <자본> 읽기
하비는 국내에도 이름이 꽤 알려진 사회과학자, 더 정확히 말하면 지리학자다. 웬만한 사회과학 서적 독자라면, 그가 현재 생존한 주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중 한 명임을 대개는 알 것이다. <강의>를 읽다 보면, 한국과도 상당히 인연이 깊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한 도시에 도시 설계를 자문해준 일화가 나오니 말이다(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이 드러나 분위기가 영 어색해졌다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지리학자가 <자본> 강의를 맡는다는 게 좀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자본> 같은 경제학 고전이라면 경제학자가 다루는 게 상식 아닌가. 하지만 요즘은 하비의 고국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막상 대학 경제학과에 마르크스를 깊이 있게 다룰 만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뒷받침하는 시장 지상주의 경제 이론들이 경제학 생태계를 초토화해버렸기 때문이다.
한데 지리학자가 <자본> 강의를 맡는 것이 꼭 궁색한 일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자본> 자체가 워낙에 경제학이라는 분과 학문을 뛰어넘는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자본>의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책이 경제학 전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담고 있다면, 비 경제학 전공자가 경제학 바깥의 시각에서 다루는 것도 썩 어울리는 접근법이라 하겠다.
게다가 하비의 이력도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비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초기 대표작은 <자본의 한계>(최병두 옮김, 한울 펴냄)다. 이 책은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을 꼼꼼히 다시 읽으면서 <자본>이 채 다루지 못한 자본주의의 양상들을 특히 공간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한 저작이다. 하비의 출발이 이러하니, 다름 아닌 그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대위기 시점에 <자본>의 해설자로 나선 것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눈 밝은 이라면 대표작의 제목이 '자본의 한계'라는 것을 허투루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중의적인 제목으로서, 자본주의의 한계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이 갖는 한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비는 감히(!) <자본>의 '한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자다. <자본> 읽기를 근본주의 목사들이 <성서> 읽듯 할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기조가 <강의> 전체를 지배한다. 이 책에서 주일 예배의 격앙된 설교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기존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서>를 비평적으로 읽으려는 현대 신학자의 분위기가 더 강하다. 하비는 우리 시대를 밝히는 마르크스의 현대적 측면을 적극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이론이 갖는 시대적 한계 또한 냉정하게 짚는다.
읽는 이들에 따라서는 이런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하비가 취하는 뚜렷한 해석상의 입장이 오히려 '반(反)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가령 <자본> 해석과 관련한 마르크스주의 내의 오래된 논쟁들에 대해 하비가 편드는 입장은 하나같이 다 마르크스주의의 엄격한 고수보다는 그 이완을 낳을 수 있는 쪽들이다.
이른바 '투하노동가치설'이 아니라 '추상노동가치설'을 지지하는 것이 그렇고, <자본> 제1장 '상품'이 묘사한 세계를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논리적 설명'으로 보는 것도 그렇다. 또한 하비는 자본주의의 위기(공황)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설명하는 데도 찬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입장이다.
<자본>의 구조를 알게 해주는 책
하지만 하비는 이 책에서 <자본>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쟁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사실 <자본> 해설서임을 내건 책들 중에는 이런 번잡한 논쟁들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는 것들도 있어서 멋모르고 책을 손에 든 독자들을 낭패감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 하비의 책은 적어도 이런 위험 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비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한 이론적 논쟁들을 건너뛴다. 후대의 해석들과 관련해서만 그런 게 아니라 <자본> 자체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접근한다. 큰 줄기를 짚는 식이지 가지들에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상 외로 시원스레 읽히는 감이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자본>에 접근하는 기본 태도와 직접 관련된다. 하비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세부 내용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직접 다루는 것은 <자본> 총3권 중 제1권이지만, 계속해서 2권, 3권의 내용을 환기시키면서 <자본> 3권 전체의 구조를 밝히고 그 속에서 <자본> 1권이 갖는 위상을 보여준다.
<강의>에서 <자본>에 대한 '전과 학습서'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좀 실망스러운 접근법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특장점이자 중대한 공헌이다. 이 책은 <자본> 1권에서 숲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만을 보기 쉬운 독자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조감도(鳥瞰圖)를 제시해준다.
<자본>을 처음 손에 들고 그 첫 장(어렵기로 악명 높은 바로 그 '상품' 장) 몇 쪽을 읽어 내려간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품 교환 사회야말로 애덤 스미스 등이 제시한 환상 속의 자본주의 그것이 아닌가 하는 당혹감. 상품이 생산되면 그것은 결국 교환되고 소비된다. 여기에는 위기도 없고, 만물은 등가 교환이라는 조화로운 법칙에 지배된다. 마르크스는 어느 고전파 경제학자보다도 더 고전파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반면, 하비가 반복해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 2권, 3권의 세계는 이러한 <자본> 1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자본> 2권, 3권은 '위기'의 세계다. 여기에서는 모든 상품이 교환과 소비, 즉 가치의 최종 실현이 교란될 항상적 위험에 처해 있다. <자본> 2권, 3권까지 읽은 독자라면, 아니 적어도 여기에 전개되어 있는 마르크스의 복잡한 자본주의 위기 이론의 개요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자본> 1권의 세계가 더욱 억지스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하비는 한편으로 독자들이 이러한 <자본> 전체의 납득하기 힘든 구조에 주목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 바로 이 구조로부터 마르크스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를 뽑아낸다.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얼핏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억설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즉, 등가 교환 혹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유주의의 논리를 '그 논리 그대로' 따르더라도 그 심층에서는 반드시 착취와 저항이라는 계급 투쟁이 작동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파 정치경제학 그 자체의 논리를 극한까지 전개함으로써 그것의 추악한 속살을 드러내는 주도면밀한 비판 전략('정치경제학 비판')이다.
하비의 이러한 지적은 지금 우리 시대의 양상에 대한 시의적절한 환기를 통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된다. 등가 교환의 이상이라는 깃발에 시장의 예정 조화설이라는 총포를 앞세워 행진하던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자유주의는 20세기 말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격세 유전했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고전 자유주의의 환상 세계 저 밑의 심층에 자리한 스캔들로 지적한 계급 투쟁의 난투극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의 우리 상황과 얼마나 몸서리쳐지게 닮았는지 지적한다.
이러한 하비식 독해법을 따라가다 보면, <자본> 1권을 접하는 독자들이 누구나 갖는 또 다른 의문도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것은 <자본> 1권 전체에 마치 툭 튀어나온 혹처럼 붙어 있는 제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한 의문이다. <자본> 1권의 나머지 전체가 다 등가 교환의 세계인 데 반해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갑자기 약탈과 살육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것은 위대한 고전의 결말로서는 너무 예상 밖이다.
하비는 이러한 납득하기 힘든 구성 역시 <자본> 1권을 관통하는 마르크스의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힌다. 제24편 이전의 내용 전체를 통해 마르크스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등가 교환의 '계몽된 세계' 이면에 자리한 투쟁들을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이러한 '계몽된 세계'의 출발점(본원적 축적)이 사실은 등가 교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약탈 과정이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크레센도로 점강하던 비판이 종결부에서 귀를 찢는 굉음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하비는 이러한 <자본> 1권의 구성과 우리 세계의 구조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환기시킨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을 칭송하지만 막상 이들이 실제 막대한 이득을 착복한 것은 시장 교환이 아니라 공유재의 약탈을 통해서였다. 대대적인 공공 부문 사유화(민영화) 물결이 이런 것 아닌가. 하비는 단지 일상적인 '착취'만이 아니라, '본원적 축적'의 반복인 '약탈적 축적'이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재해석에서 더 나아가 역사유물론의 재구성까지
이것이 하비의 강독법이 갖는 힘이다. 하비는 끊임없이 독자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도록 개입한다. 이것은 악명 높은 저 '상품' 장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독자들이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 등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이들을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변증법적 관계가 교환으로, 화폐로, 자본으로 끊임없이 변주, 확장하는 것이 <자본> 1권 초반부의 주조(主調)임을 밝혀준다. 그림으로까지 친절히 정리된 이 악보(205쪽에서 그 결정판을 제시한다)와 함께 보다 보면, <자본>이라는 난해한 현대 음악도 점차 귀에 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런데 하비의 포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본> 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마르크스의 문구들을 재해석해 이것을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으로까지 확대한다. 제6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많은 부분이 이 작업에 할애된다. 독자에 따라서는 어쩌면 <자본>의 본래 내용과는 상관없는 객담으로 느낄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말이다.
하비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다음의 짧은 문구, 그것도 각주로 포함되어 있는 문구다.
"공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 즉 인간 생활(따라서 인간 생활의 온갖 사회적 관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강의>의 352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하비는 6개의 개념적 요소들을 뽑아낸다. '기술(공학)', '자연과의 관계', '현실의 생산 과정', '일상의 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정신적 개념들'.
하비는 이 6개의 개념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358쪽에서 역시 그림으로 정리한다)를 통해 역사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마르크스가 도달한 역사유물론의 완성본이라고 파악한다. 흔히 역사유물론의 기본 도식으로 이해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저 '토대-상부구조' 모델보다 훨씬 유용하고 발전된 모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새 모델은 '정신적 개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경직된 정통적 입장과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자연과의 관계'가 끼어들어 온다는 점에서 역사유물론에 생태주의적 인식을 접목시킬 지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본의가 무엇인지는 훈고학자들의 작업에 맡기고, 우리는 일단 하비가 제시하는 이 도식이 우리의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흥미로운 것은 하비가 역사유물론의 새 모델을 추출해낸 '상대적 잉여가치' 관련 부분이 <자본>에서 그간 기술결정론의 대표적인 사례로 읽혀온 대목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하비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기술결정론을 교정할 정반대의 인식을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입문서가 아니라 동반자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강의>는 단순한 <자본> 입문서나 해설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본>의 구석구석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단순한 입문서에 담기에는 너무 큰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오히려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특징이라고 본다. 이 책의 원제는 "A Companion to Marx's Capital"이다. "companion"을 '참고 서적' 정도로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본뜻대로 하면 '동반자'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함께 읽어 내려갈 만한 책이라는 이야기다.
영문 원제를 알고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제목이 책 내용에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입문서는 <자본>의 대체물 역할을 한다. 입문서만 읽고서 마치 <자본>을 읽은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입문서의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다. 역설적으로, 보다 친절한 입문서일수록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일 학교 교재가 <성서>가 아니듯이, 입문서로 <자본>의 맛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강의>는 독자들에게 <자본> 독서를 대신해주는 효과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독자는 이 책에 빠져들면 들수록 <자본>을 읽어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안 읽어본 이는 직접 <자본> 읽기를 시도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고, 한 번이라도 읽어본 이는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든다. <자본>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동반자를 만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몇 가지 한계, 가령 <자본> 1권만을 다루고 있다거나 미국인 학자가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풀어낸 내용이라는 점, '절대적 잉여가치'나 '상대적 잉여가치'를 둘러싼 계급 투쟁의 동학에 대해 너무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할 가치를 지닌다.
한 번 읽어보시라. 물론 <자본>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제까지의 <자본> 관련 서적 목록에 좀 낯선 이력의 책 한 권이 추가되었다. 우선 저자가 자본주의의 총본산이자 중심 무대인 미국 출신인 것이 이채롭고, 또한 단순한 집필물이 아니라 저자의 <자본> 강독 동영상을 활자화했다는 점이 신선하다. 게다가 옮긴이가 <자본> 국역자인 강신준이라는 것도 범상치 않은 인연으로 다가온다.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 <자본> 강의>(이하 <강의>)가 바로 그 책이다.
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의 <자본> 읽기
▲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 <자본> 강의>(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신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사실 지리학자가 <자본> 강의를 맡는다는 게 좀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자본> 같은 경제학 고전이라면 경제학자가 다루는 게 상식 아닌가. 하지만 요즘은 하비의 고국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막상 대학 경제학과에 마르크스를 깊이 있게 다룰 만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뒷받침하는 시장 지상주의 경제 이론들이 경제학 생태계를 초토화해버렸기 때문이다.
한데 지리학자가 <자본> 강의를 맡는 것이 꼭 궁색한 일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자본> 자체가 워낙에 경제학이라는 분과 학문을 뛰어넘는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자본>의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책이 경제학 전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담고 있다면, 비 경제학 전공자가 경제학 바깥의 시각에서 다루는 것도 썩 어울리는 접근법이라 하겠다.
게다가 하비의 이력도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비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초기 대표작은 <자본의 한계>(최병두 옮김, 한울 펴냄)다. 이 책은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을 꼼꼼히 다시 읽으면서 <자본>이 채 다루지 못한 자본주의의 양상들을 특히 공간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한 저작이다. 하비의 출발이 이러하니, 다름 아닌 그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대위기 시점에 <자본>의 해설자로 나선 것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눈 밝은 이라면 대표작의 제목이 '자본의 한계'라는 것을 허투루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중의적인 제목으로서, 자본주의의 한계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이 갖는 한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비는 감히(!) <자본>의 '한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자다. <자본> 읽기를 근본주의 목사들이 <성서> 읽듯 할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기조가 <강의> 전체를 지배한다. 이 책에서 주일 예배의 격앙된 설교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기존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서>를 비평적으로 읽으려는 현대 신학자의 분위기가 더 강하다. 하비는 우리 시대를 밝히는 마르크스의 현대적 측면을 적극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이론이 갖는 시대적 한계 또한 냉정하게 짚는다.
읽는 이들에 따라서는 이런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하비가 취하는 뚜렷한 해석상의 입장이 오히려 '반(反)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가령 <자본> 해석과 관련한 마르크스주의 내의 오래된 논쟁들에 대해 하비가 편드는 입장은 하나같이 다 마르크스주의의 엄격한 고수보다는 그 이완을 낳을 수 있는 쪽들이다.
이른바 '투하노동가치설'이 아니라 '추상노동가치설'을 지지하는 것이 그렇고, <자본> 제1장 '상품'이 묘사한 세계를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논리적 설명'으로 보는 것도 그렇다. 또한 하비는 자본주의의 위기(공황)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설명하는 데도 찬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입장이다.
<자본>의 구조를 알게 해주는 책
하지만 하비는 이 책에서 <자본>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쟁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사실 <자본> 해설서임을 내건 책들 중에는 이런 번잡한 논쟁들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는 것들도 있어서 멋모르고 책을 손에 든 독자들을 낭패감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 하비의 책은 적어도 이런 위험 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비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한 이론적 논쟁들을 건너뛴다. 후대의 해석들과 관련해서만 그런 게 아니라 <자본> 자체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접근한다. 큰 줄기를 짚는 식이지 가지들에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상 외로 시원스레 읽히는 감이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자본>에 접근하는 기본 태도와 직접 관련된다. 하비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세부 내용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직접 다루는 것은 <자본> 총3권 중 제1권이지만, 계속해서 2권, 3권의 내용을 환기시키면서 <자본> 3권 전체의 구조를 밝히고 그 속에서 <자본> 1권이 갖는 위상을 보여준다.
<강의>에서 <자본>에 대한 '전과 학습서'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좀 실망스러운 접근법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특장점이자 중대한 공헌이다. 이 책은 <자본> 1권에서 숲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만을 보기 쉬운 독자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조감도(鳥瞰圖)를 제시해준다.
<자본>을 처음 손에 들고 그 첫 장(어렵기로 악명 높은 바로 그 '상품' 장) 몇 쪽을 읽어 내려간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품 교환 사회야말로 애덤 스미스 등이 제시한 환상 속의 자본주의 그것이 아닌가 하는 당혹감. 상품이 생산되면 그것은 결국 교환되고 소비된다. 여기에는 위기도 없고, 만물은 등가 교환이라는 조화로운 법칙에 지배된다. 마르크스는 어느 고전파 경제학자보다도 더 고전파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반면, 하비가 반복해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 2권, 3권의 세계는 이러한 <자본> 1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자본> 2권, 3권은 '위기'의 세계다. 여기에서는 모든 상품이 교환과 소비, 즉 가치의 최종 실현이 교란될 항상적 위험에 처해 있다. <자본> 2권, 3권까지 읽은 독자라면, 아니 적어도 여기에 전개되어 있는 마르크스의 복잡한 자본주의 위기 이론의 개요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자본> 1권의 세계가 더욱 억지스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하비는 한편으로 독자들이 이러한 <자본> 전체의 납득하기 힘든 구조에 주목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 바로 이 구조로부터 마르크스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를 뽑아낸다.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얼핏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억설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즉, 등가 교환 혹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유주의의 논리를 '그 논리 그대로' 따르더라도 그 심층에서는 반드시 착취와 저항이라는 계급 투쟁이 작동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파 정치경제학 그 자체의 논리를 극한까지 전개함으로써 그것의 추악한 속살을 드러내는 주도면밀한 비판 전략('정치경제학 비판')이다.
하비의 이러한 지적은 지금 우리 시대의 양상에 대한 시의적절한 환기를 통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된다. 등가 교환의 이상이라는 깃발에 시장의 예정 조화설이라는 총포를 앞세워 행진하던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자유주의는 20세기 말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격세 유전했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고전 자유주의의 환상 세계 저 밑의 심층에 자리한 스캔들로 지적한 계급 투쟁의 난투극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의 우리 상황과 얼마나 몸서리쳐지게 닮았는지 지적한다.
이러한 하비식 독해법을 따라가다 보면, <자본> 1권을 접하는 독자들이 누구나 갖는 또 다른 의문도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것은 <자본> 1권 전체에 마치 툭 튀어나온 혹처럼 붙어 있는 제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한 의문이다. <자본> 1권의 나머지 전체가 다 등가 교환의 세계인 데 반해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갑자기 약탈과 살육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것은 위대한 고전의 결말로서는 너무 예상 밖이다.
하비는 이러한 납득하기 힘든 구성 역시 <자본> 1권을 관통하는 마르크스의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힌다. 제24편 이전의 내용 전체를 통해 마르크스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등가 교환의 '계몽된 세계' 이면에 자리한 투쟁들을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이러한 '계몽된 세계'의 출발점(본원적 축적)이 사실은 등가 교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약탈 과정이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크레센도로 점강하던 비판이 종결부에서 귀를 찢는 굉음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하비는 이러한 <자본> 1권의 구성과 우리 세계의 구조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환기시킨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을 칭송하지만 막상 이들이 실제 막대한 이득을 착복한 것은 시장 교환이 아니라 공유재의 약탈을 통해서였다. 대대적인 공공 부문 사유화(민영화) 물결이 이런 것 아닌가. 하비는 단지 일상적인 '착취'만이 아니라, '본원적 축적'의 반복인 '약탈적 축적'이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재해석에서 더 나아가 역사유물론의 재구성까지
이것이 하비의 강독법이 갖는 힘이다. 하비는 끊임없이 독자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도록 개입한다. 이것은 악명 높은 저 '상품' 장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독자들이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 등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이들을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변증법적 관계가 교환으로, 화폐로, 자본으로 끊임없이 변주, 확장하는 것이 <자본> 1권 초반부의 주조(主調)임을 밝혀준다. 그림으로까지 친절히 정리된 이 악보(205쪽에서 그 결정판을 제시한다)와 함께 보다 보면, <자본>이라는 난해한 현대 음악도 점차 귀에 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런데 하비의 포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본> 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마르크스의 문구들을 재해석해 이것을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으로까지 확대한다. 제6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많은 부분이 이 작업에 할애된다. 독자에 따라서는 어쩌면 <자본>의 본래 내용과는 상관없는 객담으로 느낄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말이다.
하비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다음의 짧은 문구, 그것도 각주로 포함되어 있는 문구다.
"공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 즉 인간 생활(따라서 인간 생활의 온갖 사회적 관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강의>의 352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하비는 6개의 개념적 요소들을 뽑아낸다. '기술(공학)', '자연과의 관계', '현실의 생산 과정', '일상의 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정신적 개념들'.
하비는 이 6개의 개념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358쪽에서 역시 그림으로 정리한다)를 통해 역사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마르크스가 도달한 역사유물론의 완성본이라고 파악한다. 흔히 역사유물론의 기본 도식으로 이해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저 '토대-상부구조' 모델보다 훨씬 유용하고 발전된 모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새 모델은 '정신적 개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경직된 정통적 입장과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자연과의 관계'가 끼어들어 온다는 점에서 역사유물론에 생태주의적 인식을 접목시킬 지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본의가 무엇인지는 훈고학자들의 작업에 맡기고, 우리는 일단 하비가 제시하는 이 도식이 우리의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흥미로운 것은 하비가 역사유물론의 새 모델을 추출해낸 '상대적 잉여가치' 관련 부분이 <자본>에서 그간 기술결정론의 대표적인 사례로 읽혀온 대목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하비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기술결정론을 교정할 정반대의 인식을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입문서가 아니라 동반자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강의>는 단순한 <자본> 입문서나 해설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본>의 구석구석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단순한 입문서에 담기에는 너무 큰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오히려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특징이라고 본다. 이 책의 원제는 "A Companion to Marx's Capital"이다. "companion"을 '참고 서적' 정도로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본뜻대로 하면 '동반자'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함께 읽어 내려갈 만한 책이라는 이야기다.
영문 원제를 알고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제목이 책 내용에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입문서는 <자본>의 대체물 역할을 한다. 입문서만 읽고서 마치 <자본>을 읽은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입문서의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다. 역설적으로, 보다 친절한 입문서일수록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일 학교 교재가 <성서>가 아니듯이, 입문서로 <자본>의 맛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강의>는 독자들에게 <자본> 독서를 대신해주는 효과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독자는 이 책에 빠져들면 들수록 <자본>을 읽어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안 읽어본 이는 직접 <자본> 읽기를 시도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고, 한 번이라도 읽어본 이는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든다. <자본>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동반자를 만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몇 가지 한계, 가령 <자본> 1권만을 다루고 있다거나 미국인 학자가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풀어낸 내용이라는 점, '절대적 잉여가치'나 '상대적 잉여가치'를 둘러싼 계급 투쟁의 동학에 대해 너무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할 가치를 지닌다.
한 번 읽어보시라. 물론 <자본>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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