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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광우병, '지지리 운 나쁜 놈'이 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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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광우병, '지지리 운 나쁜 놈'이 나라면?

[철학자의 서재] 제프리 로즈 등의 <예방 의학의 전략>

황당할 정도로 꼭 닮았다. 2008년 광우병 사태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마치 쌍둥이 같다.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앞두고 광우병 발병률과 위험성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었다면, 2011년 현재는 (최소한 인터넷에서는) 한국인의 피폭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이 두 논쟁의 공통점은 그 전개가 '전문가 vs 대중'이라는 양상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으며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정부와 정부 측 전문가들의 입장은 현재, 사고 원자력 발전소에서 배출되는 방사성 물질의 한국 유입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며 따라서 한국인은 안전하다는 주장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한편, 광우병의 낮은 발병률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안전의 불확실성이며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서는 안 된다는 시민단체와 대중들의 주장은 현재, 한국 및 일본 정부가 발표하는 방사성 물질의 확산 경로와 방사선량을 못 미더워하는 입장으로 재현되고 있다.

'과학' vs '괴담'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사태가 모두 '과학적 진실 vs 괴담'이라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정부와 정부 측 전문가의 입장은 '과학적 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와 다른 입장은 '괴담'으로 취급되었다. 지난 3월에는 외국 기상청의 발표를 근거로 한국에도 방사성 물질이 상륙할 것이라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렸던 한 네티즌이 루머를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검거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두 사태가 모두, 전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이다. 즉, 공중 보건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일 '과학적 진실' 측이 옳다면, 전 국민은 보다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방사선의 위협 따위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괴담' 측이 옳다면, 전 국민은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는 광우병에 노출될 위험뿐 아니라 치료 부담이 막대한 피폭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양측의 차이는, 결과에 있어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의미에 있어서만큼은 극과 극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괴담을 믿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하기란 힘들다. 괴담을 믿게 되는 이유는 광기나 비정상적인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진실' 측도 '괴담' 측도 그 어느 쪽도 믿기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정상적인 생존 본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과학 vs 괴담이라는 논쟁 구도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태의 본질은 우리 모두의 건강 아닌가?

광우병 사태나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일차적 접근은 공중 보건학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공중 보건학이 주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사태의 본질, 즉 우리 전체의 건강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우병이나 원자력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전문 의학, 확률을 따지는 수학, 우리 인간 자신이 아니라 사물을 다루는 공학과는 또 다른 관점을 공중 보건학은 제시해 준다.

제프리 로즈 등의 <예방 의학의 전략>(김명희·김교현·기모란·김성이·김수영·유원선 옮김, 한울 펴냄)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프거나 죽는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낫다. 이것이 예방 의학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논거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질병'과 '건강'은 구분할 수 없다

▲ <예방 의학의 전략>(제프리 로즈·케이­티 콰·마이클 마못 지음, 김명희·김교현·기모란·김성이·김수영·유원선 옮김, 한울 펴냄). ⓒ한울
<예방 의학의 전략>에서 제프리 로즈는 공중 보건학의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한 가지는 개인의 예방과 치료에 초점을 두는 '고위험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의 예방과 치료에 초점을 두는 '인구 집단 전략'이다. 이 두 가지 전략의 차이는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 차이에서 비롯된다.

1954년 조지 피커링은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식별 가능한 '질병'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과 질병 사이의 자연적인 구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구분 자체가 의학적 가공물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각종 감염병은 분명한 임상적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서부터 특별한 검사로만 확인할 수 있는 무증상 감염까지, 하나의 인구 집단 내에서 다양한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새로운 질병 모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건강과 질병, 건강한 사람과 환자만을 구분하는 단순한 이분법적 질병 모형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논란 이후 조지 피커링의 주장이 점점 사실로 검증되면서 이제, 질병이 분명하게 정의될 수 있고 정상과 엄격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가정은 힘을 잃게 되었다.

전통적인 이분법적 질병 모형을 따르는 의학은 이 가운데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심각한 사람들을 골라 질병에 걸린 환자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건강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때 분류 기준은 자연적 사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다. 즉 환자란 질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그 질병의 증상이 특히 심해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고, 정상인이란 잠재적으로 질병의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진단'의 개념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의사의 진단이란 질병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단은 질병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측정하고 그중 치료해야 할 사례를 가려내는 일이 된다. 이는 '불건강'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사와 대중이 각자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들에게 불건강의 척도가 치료받아야 할 상태라고 한다면, 대중들에게 불건강의 척도는 자신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느끼고 장애를 경험하는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위험 전략

이러한 의사들의 관점은 물론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제때 필요한 치료에 들어가고 치료가 필요 없는 사람을 과잉 치료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심각한 전염병 환자를 격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의사는 질병 모형이 어떻게 바뀌었든 지금도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환자와 환자 아닌 사람을 정확하게 분류해내야만 한다. 이 이분법적 관점은 지금도 여전히 환자 개인들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중요한 관점이다.

이분법적 질병 모형이 공중 보건학에 적용되면 '고위험 예방 전략'이 된다. 고위험 예방 전략이란 특별히 위험성이 높은 소수의 개인들을 선별해서 그들 위주의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주의가 그다지 필요치 않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고위험 전략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한 개인들을 선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질병 모형에 입각할 때, 이러한 고위험 예방 전략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고려할 때, 과연 위험한 개인들로 분류된 사람들만이 위험에 처해 있고 나머지는 정말로 괜찮은지가 문제되는 것이다.

질병의 심각한 정도가 소위 '환자'와 '건강한 사람' 모두에게 다양한 수준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질병이 하나의 인구 집단 전체에 연속적으로 분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인구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단지 서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질병에 대한 위험성을 모두 함께 골고루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고위험 전략은 환자로 분류된 사람만을 신경 쓸 뿐, 정상으로 분류된 사람은 환자가 될 가능성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안게 된다. 더구나 실제로 대부분의 질병은 소수의 고위험군에서보다 낮은 위험에 처한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만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자 한다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환자가 정말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거꾸로 더 적은 사람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한다면, 전체적으로 질병 예방 효과는 점점 미미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떻게 분류 기준을 정해야 하는지가 문제로 남는 것이다.

다양한 질병의 원인들을 고려할 때 분류 기준의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역치(인체에 영향을 주는 최소한의 자극)가 존재하는 질병의 경우에는 역치를 기준으로 삼아 정상인과 환자를 분류하면 되므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치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방사선과 암의 관계가 그러하다. 역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사선이라는 위험에 노출될수록, 정확히 그에 비례해 암 발생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예방법은 모든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고위험 전략은 정상인과 환자의 분류 기준을 결정하기가 힘들게 된다. 고작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의 수준'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내밀 수 있을 뿐이다. 고위험 전략은 결국 이 모호한 기준을 넘어서서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만을 위해 노력할 뿐, 기준치 이하의 사람들은 돌보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인구 집단 전략

이때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또 다른 관점이 '인구 집단 전략'이다. 인구 집단 전략은 '환자/건강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질병 모형에서 벗어나 예방 대상을 해당 집단에 속한 인구 전체로 본다. 집단 전체의 특성을 바꿈으로써 환자들을 포함하여 인구 집단 전체가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전략이다. 즉, 개인을 기본 단위로 삼는 고위험 전략과 대조적으로, 인구 집단 전략은 하나의 집단 전체를 기본 단위로 삼는다. 왜냐하면 집단의 일탈자에 대한 책임은 일탈자 개인이 혼자 떠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가 함께 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전적 다양성이나 사회적·문화적·교육적 환경 차이, 개인 각자의 독창성과 같은 요소는 사회 안에 다양한 특성의 개인들을 만들어낸다. 한편 유전적·환경적 생존 조건이나 사회적 규범 등과 같은 요소는 개인들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사회를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압력을 가한다. 따라서 한 사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이의 범위는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변이는 이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선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 변이라는 것은 인구 집단의 평균에서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균이 변이 정도를 결정한다. 정상이 비정상을 결정한다.

환자도 마찬가지이다.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특정 질병에 대해 좀 더 예민하거나 또는 특정한 위험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나타나는, 일종의 극단적 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자가 변이될 수 있는 범위 역시 그 인구 집단의 평균에 달려 있다. 즉 정상인들의 평균이 환자가 나타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한다. 따라서 환자의 위험을 줄이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환자와 정상인을 모두 포함하는 인구 집단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된다.

'고위험 전략'이 이미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된 개인들만을 대상으로 위험 요소를 제거하거나 줄이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인구 집단 전략'은 집단 전체가 위험에 노출될 기회를 제거하거나 줄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즉 각 개인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가장 기저의 원인, 이른바 '원인의 원인'을 찾고 이를 조정한다.

이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방법이다. 깨끗한 식수 공급과 같은 19세기의 공중 보건 개혁은 인구 집단 전체의 평균적인 위생 상태를 개선함으로써 집단 전체가 질병의 위험에 노출될 기회 자체를 줄였다.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예방 접종의 실시는 전염병에 대한 집단 전체의 평균적인 면역력을 높임으로써 세균이 번식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최소화한다.

의학의 문제는 곧 정치의 문제다

방사선에 지나치게 노출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예방 조치를 취하거나 또는 광우병 증상이 실제로 나타나는 환자의 경우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것은 '고위험 전략'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이 현재 우리 사회가 질병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구 집단 전략'에 따른다면, 집단 전체의 방사선 피폭 위험을 최소화함으로써 암과 같은 관련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줄일 수가 있다. 이로써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된 소수의 고위험군뿐만 아니라, 비교적 적게 노출되어 잠재적으로 암에 걸릴 가능성을 안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까지 돌볼 수 있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환자/건강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관행이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은 질병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자신이 불건강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질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집단 전체 즉 사회적 문제이다. '고위험 전략'뿐만 아니라 '인구 집단적 전략'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고민해볼 시점이다.

제프리 로즈는 강조한다. '의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접근만이 질병의 근본 원인들에 대적할 수 있다.' 건강 문제는 결코 불건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건강하다고 분류되는 사람들도 불건강에 이미 노출되어 있고, 또 건강이 불건강을 결정한다. 즉,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사회의 건강 불평등을 개선하여 평균적인 건강 상태 자체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질병 예방에 있어 우리 사회가 '인구 집단 전략'을 선택하는 데는 정치적 문제가 따른다. 인구 집단 전략은 위험의 기저 원인이 주거나 노동 환경, 생활 습관, 교육 등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에 개인적 처방이 아닌 사회 정책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접근만이 질병의 근본 원인들에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정책적인 접근은 '고위험 전략'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인구 집단 전략'은 질병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 기저 원인에 대응하고자 하기 때문에 예방책과 효과의 인과적 확실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과연 사회적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책적으로 도입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논란이 된다.

단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 가능성' 때문에 우리 사회는 다른 더 확실한 기회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광우병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즐기고 싶은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제프리 로즈에 따르면, 건강 관련 정책뿐 아니라 모든 정책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시민 전체의 몫이 되어야 한다. 정책을 도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시민의 몫이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도 시민의 몫이다. 시민들 스스로가 위험 및 각종 기회비용을 충분히 숙고하여 선택한 정책만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즉, 정책의 결정자는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 자신이 되어야 한다.

불확실성에 대한 책임

물론 시민들이 전문적인 각종 정보를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전문가의 역할이다. 단, 전문가는 시민들을 대신해서 '선택'하거나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는 단지 시민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과학 분야의 전문가는 자신이 기술적 전문가이지 사회적 가치나 정치적 사안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기술적 영향력이지, 무엇이 사람들에게 최선인지를 결정할 권리가 아니다. 이 점을 전문가들이 혼동할 때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생겨난다.

전문가는 가능한 한 투명한 정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전문가의 정보 해석이 대중의 조작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정보의 불완전성을 감추고 특정 정보의 확실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다양하고 상충되는 정보들 배후에 놓인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까지 명료하게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시민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최선의 방법이다. 물론, 전문가라고 해서 항상 100퍼센트(%) 확실한 과학적 입증을 해낼 수는 없다. 제프리 로즈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결국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과 일본 후쿠시마 사고 관련 정책에 대한 선택과 결정은 시민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책들은 반드시 그 도입 '이전에' 시민 사회의 민주적 의사 수렴 과정을 거쳤어야만 했고, 또 거쳐야만 한다. 나아가, 다양한 정보 가운데 무엇이 괴담이고 무엇이 믿을 만한 정보인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시민들의 자유이다.

광우병에 대해서도, 피폭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현재 우리는 모두 완전하게 확실한 정보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시민의 선택도, 정책 결정도, 어쨌거나 불확실한 근거 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프리 로즈에 따르면 "확실성은 행동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정부의 존재 이유는 선견지명이 아니라(그럴 능력도 거의 없다), 도전과 위기에 대한 실용적인 반응이다."

'과학적 진실 vs 괴담'이라는 논쟁 구도는 소모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 구도의 일차적 원인은 전문가 및 정부가 시민들이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과학적 입증의 불확실성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전문가의 오만일 수 있다. 칸트가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을 모든 학문의 모범으로 정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 칸트가 이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자연과학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에 최고의 의의를 둔 것이다. 자연과학에 기댄 모든 주장은, 이러한 칸트의 기획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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