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의 해변 모래언덕의 식물 생태를 조사하는 데 보조 요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식물 공부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석가탄신일을 낀 징검다리 휴일을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서울을 출발할 때는 조금 끼무룩한 날씨였는데 홍천에 들어설 무렵 비가 흩뿌릴 태세였다. 인제의 용대리를 통과할 때 제법 굵은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문자를 휘갈기며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는 차창 너머로 백담사 안내판이 보였다. 촉촉하고 달콤한 봄비 속을 질주하는데 만해 한용운 선사의 시, <군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리는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미시령 터널을 지나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설악산 울산바위 부근의 절경이었다. 예전에는 바위에 감탄하고, 그 바위 위로 떠 있는 구름과 그 너머의 아득한 허공에 나는 주로 눈길을 주었다. 개의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던가.
최근 짧은 두 글자가 나를 많이 바꾸어놓았다. 오늘의 나는 하늘 아래 구름, 그 구름 아래 바위, 그 바위 아래의 아래쪽으로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왜 나는 자꾸 아래가 좋아지는 것일까. 왜 내 발등보다도 아래에서 피어난 쇠별꽃이 눈에 밟히는 것일까.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저 다종다양한 식물들은 그들의 님인 봄비한테 죽비로 맞듯 흠씬 두들겨 맞고 있을 터! 동해로 치달아가는 외설악의 산자락에서 벌어지는 녹색의 저 흥겨운 잔치판! 할 수만 있다면 울산바위 밑으로 내리꽂히는 빗속으로 낑겨들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 설악산 울산바위와 그 아래 풍경. ⓒ이굴기 |
▲ 쇠별꽃. ⓒ이굴기 |
고성 근처의 바닷가 콘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부터 몸을 움직였다. 계획했던 일을 모두 소화하고 한계령을 넘을 땐 점심 무렵이었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오늘도 오락가락하였다. 홍천 부근 어디였나. 소양강 댐에 갇힌 물들이 길을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어느 굽인가에서 차가 섰다. 이 능선 어딘가에 멸종 위기 식물이 산다고 했다. 그 식물의 생태를 확인하는 게 오늘의 마지막 임무였다.
차에서 내려 우중의 산으로 들어갔다. 비는 차별 없이 모든 것을 골고루 적시고 있었다. 초입부터 경사가 심했다.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조금 걸었을까. 우산나물이 눈에 들어왔다. 맑은 날이면 장난감 우산 같은 식물이다. 이 귀여운 식물을 보면서 나는 오늘 산행의 주제를 혼자 속으로 다음과 같이 슬쩍 바꾸었다. 비오는 날 강원도를 여행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우중에 산중을 헤매는 날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런 드문 기회에 제대로 관찰해 보자. 과연 비오는 산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 맑은 날의 우산나물. ⓒ이굴기 |
나무들은 모두 비탈에 서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한테도 땅의 가파른 각도가 힘든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산과 분리되어 있는 나에게만 비탈일 뿐 나무들에게 이 비탈은 아무런 경사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등산할 때 힘이 드는 까닭은 산이 높고 가팔라서가 아니다. 오로지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잠시 휴식시간에 퍼질러 앉아 보라. 나의 무게를 즉시 누가 가져간다. 그리고 엉덩이 들고 다시 일어서 보라. 땅에서 분리되는 것과 동시에 무게도 돌려받는다.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듯 내가 발목을 흙에 묻기 전에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몹시 힘이 드는 것이다.
이런 나의 딱한 사정을 알았는지 나무들이 알맞은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신갈나무, 생강나무, 싸리나무는 좋은 지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철쭉이나 진달래, 싸리나무 등도 있었다. 그들은 키는 나보다 작았고 가지는 내 손가락 굵기만한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미끄러운 비탈에서 용을 쓰는 나의 악력에 맞먹는 힘을 주면서 내 무게도 분산시켜 주었다.
아차, 하는 어느 순간 실제로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아래를 짚어야 했다. 산의 표면에는 낙엽이 아주 두텁게 퇴적되어 있다. 그것들은 흙과 나무들의 보온 보습에 아주 효과적으로 보였다. 산이 덮고 있는 이불 아래에서 흙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둔한 내가 이렇게 미끄러지면서 산의 피부를 할퀼 때 비로소 맨흙이 드러났다. 등산화가 고급이라서 흙이 더 깊게 패는 것 같았다.
미끄러질 때, 반사적으로 한 손으로 신갈나무의 밑둥을 잡았고 다른 손으로 낙엽을 짚었다. 땅을 짚고 일어서니 손에는 각종 부스러기와 흙이 묻었다. 그러나 깊은 산속에서도 걱정할 게 없었으니 손바닥으로 나뭇잎사귀를 몇 개 쓰다듬자 물수건으로 닦은 듯 금세 깨끗해졌다. 이 작은 신갈나무 잎사귀에 달려 있는 빗물만 모두 긁어모아도 그 양이 상당할 것 같았다. 땀으로 얼룩진 몸뚱아리 하나는 씻길 수 있는 양이 족히 되고도 남지 않을까.
▲ 비 맞는 신갈나무. ⓒ이굴기 |
어느덧 능선에 올라섰다. 능선에는 소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었다. 흔히들 비가 오면 산이 흠뻑 젖는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비오는 산중에서 관찰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나무는 덩치가 상당해서 웬만한 비는 그 허리둘레를 다 적시지 못했다. 또한 굴참나무의 껍질은 단단할 뿐더러 아주 울퉁불퉁해서 그 안으로 비가 좀처럼 들지 못했다. 집 나온 개미나 벌레들이 갑자기 비를 피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처럼 보였다.
▲ 비 맞는 소나무. ⓒ이굴기 |
식물들은 광합성을 하기 위해 햇빛을 많이 받는 게 유리하다. 그러기 위해 대부분의 잎사귀는 가급적 수평으로 떠 공중에 머문다. 그래서 그럴까. 오늘 나는 제대로 알았다. 비바람이 몰아쳐 나뭇잎들이 잔뜩 웅크리기는 했지만 그 뒷면은 좀처럼 비에 젖지 않는다는 것을. 하늘도 잎사귀의 뒷면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한편 식물들도 숨을 쉰다. 식물들의 기공은 잎의 뒷면에 나 있다. 동물들의 콧구멍이 하늘로 향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멸종 위기 식물의 생육지를 조사하고 하산할 때, 나는 우산나물의 그 우산 같은 속을 꼭 확인하고 싶어졌다. 식물 생태 조사를 할 때 올라온 길을 되짚어 가는 법은 없다. 지형도 익히고 뜻밖의 식물도 발견할 겸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게 보통이다. 물론 올라올 때 못 본 꽃을 내려갈 때 볼 수도 있다. 과연 올라올 때 본 우산나물을 내려갈 때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빗속에서 그 뒷면은 어찌하고 있을까.
혹 다시 못 볼까 조마조마했는데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우산나물의 군락을 만날 수 있었다. 나물이라기보다는 돌풍에 우산살이 아주 많이 휘어져 가냘픈 우산처럼 보이는 우산나물. 이 연약한 우산나물 앞에서 내 손가락은 너무 굵고 손바닥은 까끌하고 넓었다. 우산나물의 잎이 만들고 있는 공간으로 손을 넣었다. 옴방한 그곳의 공기가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잎 뒷면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아하, 그곳은 너무나 뽀송뽀송했다!
▲ 비 맞는 우산나물. ⓒ이굴기 |
비는 계속 내렸다. 이 봄비야말로 산중의 모든 식물들한테 님일 것이다. 강원도 깊은 산중의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주재하러 오시는 부처님! 부처님이 어디 사람들만의 부처이겠는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부처의 행방이 묘연하기에 부처를 찾는 소리가 더 많겠다. 부처가 곁에 있어도 부처를 모르기에 부처를 외는 소리는 더욱 커지겠다. 그래서 그만큼 더더욱 시끄러운 그곳, 서울로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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