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세터로서 최고의 기술을 보여 준 것은 물론 매 경기 블로킹을 한두 개씩 잡아내며 재간둥이 역할을 하던 김호철은 이탈리아에서 감독으로 일하는 중에도 틈만 나면 비치발리볼 경기에 봉사자로 나서는 등 한국 배구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 오던 중이었습니다.
현역 시절에는 맞수라고 할 수도 없을 삼성화재 감독 신치용이 계속해서 우승 팀의 감독 자리를 누리고 있을 때 우승에 목마른 현대캐피탈의 욕구를 채워 줄 감독으로 김호철이 선택된 것입니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에 우승을 안긴 김호철
구단에 의한 은퇴 위기를 넘기고 다시 코트에 선 방신봉, 붙박이 국가 대표 선배를 은퇴 위기로 내몬 후배 이선규와 윤봉우로 구축한 센터 진은 맞수 삼성화재와 비교하여 한 수 위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에 비해 왼쪽 공격에 허점이 있었고, 수비를 포함한 조직력이 삼성화재에 뒤지는 현대캐피탈은 'KT&G V-투어 2004'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세미프로 리그 방식의 겨울 시즌에서 또 우승을 삼성화재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연고지를 도입한 세미프로 리그에서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대한배구협회는 프로화를 추진하여 2004년 겨울부터 본격적인 프로 배구 시대가 열렸습니다. V-리그라 이름 붙은 프로 리그 원년에는 용병 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상태로 대회가 진행되어 챔피언 결정전에는 예상대로(?) 삼성화재 블루팡스(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캐피탈)가 진출했습니다.
승자는 2차전에서 패배를 하기는 했지만 1, 3, 4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삼성화재였습니다. 창단 2년째에 현대자동차서비스로 방향을 잡았던 신진식이 삼성화재로 방향을 튼 이후 줄곧 겨울 리그 우승을 차지하던 삼성화재의 위력이 프로 리그 원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최우수선수는 삼성화재의 김세진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V-리그를 앞두고 우승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왼쪽 공격수 자리에 허점이 있던 현대캐피탈에 희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팀당 1명씩 외국 선수를 도입하기로 한 것입니다. 김호철은 당연히 왼쪽 공격수를 데려오고자 했고, 타 팀들이 검증된 선수를 선택하고 있을 때 현대캐피탈은 미국의 신예 공격수 숀 루니를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동안의 경력만으로는 다른 외국 선수들에 비해 내세울 게 없는 숀 루니였지만 성장 가능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현대캐피탈의 왼쪽 자리를 굳건히 지켜 주었습니다.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삼성화재가 창단되기 전 강만수가 이끄는 현대자동차서비스가 겨울 리그에서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한 것을 끝으로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현대캐피탈이 강산이 한 번 변한 후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삼성화재의 아성을 무너뜨린 김호철과 숀 루니는 화제에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숀 루니는 재계약을 하고 이듬해 시즌에도 현대캐피탈의 왼쪽 공격수로 나서서 또 한 번의 우승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프로 리그 시작 후 세 시즌을 보내는 동안 현대캐피탈이 두 차례의 우승을 차지했으니 김호철은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고, 김세진, 김상우, 신진식, 방지섭 등 초창기 삼성화재를 이끈 선수들이 은퇴를 바라보고 있던 시기였으니 이제 삼성화재의 시대는 끝나가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우승에서 준우승, 준우승에서 3위로
▲ 하종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뉴시스 |
창단 초기 멤버가 떠나면 언제 다시 우승을 노릴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던 삼성화재는 김세진, 장병철의 뒤를 이어 오른쪽 공격을 담당할 선수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의 안젤코를 영입했습니다. 안젤코는 기대에 걸맞게 공격을 도맡아 하다시피 맹활약을 함으로써 두 번의 우승을 맛본 김호철에게 준우승 전문 감독이 될 것을 예고하면서 삼성화재에 우승을 안겨줌은 물론 시즌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듬해에도 안젤코는 삼성화재에 또 우승을 안겨 주었고, 숀 루니가 그랬던 것처럼 두 시즌을 마치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삼성화재의 초창기 멤버들은 모두 팀을 떠나고 최태웅, 석진욱, 신선호 등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팀을 완전히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젤코가 떠난 자리를 메우러 온 가빈은 2009-2010 시즌에 안젤코 이상의 맹활약을 하면서 챔피언 결정전에서 7차전 5세트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현대캐피탈을 제치고 삼성화재에 세 번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안겨 주었습니다.
두 번의 우승 후 세 번의 준우승을 차지한 것은 현대캐피탈 팬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기는 했지만 만년 3, 4위를 차지하고 있는 LIG 그레이터스(LIG)나 대한항공 점보스(대한항공)에게는 더 큰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이 두 팀은 프로 리그 시작 후 감독 계약을 연장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감독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선수를 보강하기도 하면서 "올해만큼은"을 외치며 새 시즌을 맞이했지만 결과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빈의 원맨쇼로 2009-2010 시즌이 끝난 후 맞이한 스토브리그에서는 유난히 뉴스거리가 많았습니다. 박기원이 떠난 후 김상우 체제로 운영되던 LIG는 차기 감독으로 현대캐피탈과 계약이 끝난 김호철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김호철은 현대캐피탈에 남았고, 결과적으로 김상우가 프로 배구 팀의 최연소 감독으로 2010-2011 시즌을 맞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승을 하기는 했지만 외국 선수 1명에 의해 승부가 결정 나는 일이 벌어지자 삼성화재의 신치용은 시즌이 끝난 후 팀 재건을 위해 자유 계약 선수로 풀린 현재캐피탈의 박철우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김호철이 재계약한 현대캐피탈은 KEPCO45 입단을 피한 채 외국에 진출해 있던 문성민을 스카우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 현대캐피탈이라는 이름보다는 삼성화재라는 이름이 익숙한 최태웅과 이형두를 데려왔고, 대신 하경민과 임시형을 KEPCO45로 보내는 등 각 팀의 재편이 한창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각 팀이 평준화되기는 했지만 많은 이들이 현대캐피탈의 우승을 점치는 가운데 2010-2011 V-리그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철우가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가빈 한 명에게 의존하다시피한 삼성화재가 시즌 초반 하위로 떨어지고 있을 때 왕년의 삼성화재 코치 신영철이 지휘봉을 잡은 대한항공은 현대캐피탈을 제치고 선두를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승을 기대했던 현대캐피탈은 대한항공에 이어 2위로 시즌을 마쳤고, 시즌 후반에 좋은 성적을 거둔 삼성화재는 LIG를 4위로 밀어내고 3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가빈으로 시작해서 가빈으로 끝나는 삼성화재의 경기력은 우승을 예상하기 어렵게 했으나 프로 배구 창립 이후 처음으로 삼성화재는 시즌 3위 팀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문성민과 헥터 소토 영입을 비롯하여 많은 준비를 한 현대캐피탈은 전보다 못한 3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프로 배구가 시작된 후 일곱 시즌을 보내는 동안 줄곧 감독으로 현대캐피탈의 벤치를 지킨 김호철이 예상 밖의 성적인 3위로 시즌을 마치자 현대캐피탈은 감독 교체라는 처방을 냈습니다. 일곱 회의 V-리그에 참여하여 2회의 우승, 4회의 준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우승을 차지하는 등 선수와 감독으로 성공적인 길을 걸어 온 김호철이지만 올해 V-리그에서 현대캐피탈이 3위에 그치고 만 것이 감독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감독 최초로 프로 팀 사령탑에 오른 하종화
현재 프로 배구 팀 사령탑은 장기간 삼성화재를 지도하는 신치용을 제외하면 지난 시즌에 사령탑에 오른 대한항공 신영철, 우리캐피탈 박희상, 지난 시즌에 감독 대행 직을 수행한 후 시즌을 마치고 감독을 맡은 LIG 박희상, 이제 막 감독직을 맡게 된 KEPCO45의 신춘삼 과 현대캐피탈의 하종화가 전부입니다.
신치용 외에는 2년이 지난 감독이 없는 데다 예전에 프로팀 감독 경험을 지닌 이도 신영철 하나이니 최근 2년 새 프로 배구 감독이 거의 물갈이 된 셈입니다. 박희상과 김상우는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했고, 신춘삼은 대학에서 프로로 자리를 옮겼으며 하종화는 고등학교에서 프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나이로는 김상우, 박희상보다 위지만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코치를 역임한 후 강산이 한 번 변할 세월 동안 고등학교 감독으로 일한 이가 프로팀 감독을 맡는다는 것은 1980년대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프로 야구 청보핀토스의 감독을 맡은 허구연 만큼이나 참신한 감독 인선으로 생각됩니다.
대체로 고등학교 3학년이 주축이 되는 청소년 배구 팀이지만 1980년대 초 일본 청소년 배구 팀에서 왼쪽을 맡은 주공격수는 오오다니라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국가 대표 선수로는 별 활약을 못했지만 고등학교 언니들을 제치고 고비마다 스파이크를 터뜨리는 모습은 앞으로 여자배구가 10년 이상 오오다니에게 시달려야 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지게 했습니다. 다행히 예상이 틀리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중학생이 청소년 대표에 선발되는 건 남의 나라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몇 년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중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청소년 대표에 이름을 올린 하종화가 그 주인공입니다. 실제로 경기에 출전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인 1986년도 아시아 청소년 배구 대회였고, 이듬해에는 마낙길, 김은석, 서남원, 박삼룡 등과 함께 한국 배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진학을 앞둔 상태로 출전한 슈퍼 리그에서는 신인왕에 올랐고, 대학 3학년 말인 1990-1991 슈퍼 리그에서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 팀이 실업 선배들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 주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선배인 노진수, 마낙길과 후배인 임도헌, 신진식, 박희상이 나타나기까지 국가 대표 왼쪽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고, 은퇴 후에는 2년간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코치를 지낸 후 모교인 진주 동명중학교와 동명고등학교에서 자신의 현역 시절 만큼이나 좋은 성적을 거두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선수들의 세대교체가 늦어져 예전에 못 미치는 전력을 보유하고서도 안젤코와 가빈의 힘을 받은 삼성화재가 4년 연속 V-리그 챔피언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현대캐피탈이 하종화라는 신임 감독을 맞이하여 우승의 한을 풀게 될 것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신치용과 신춘삼을 제외하면 신영철, 하종화, 김상우, 박희상는 현역 시절에 함께 국가 대표 팀에서 태극 마크를 달고 뛰던 관계인데 앞으로 배구 코트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사족
3주에 걸쳐 현대캐피탈의 지난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안 현대캐피탈의 홈페이지는 전혀 기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승을 염원하고, 배구 팬이 있어 그 존재 가치를 지닌 배구 팀이라면 홈페이지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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