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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세 번째 눈'을 가린 결과는…

[프레시안 books] 정정훈의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마키아벨리(1469~1528년)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악을 상징한다. 사전 속에서 '마키아벨리'라는 단어는 "권모술수, 책략"을 지칭하고, '마키아벨리즘'은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 지상주의적 정치사상"으로 설명된다.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각종 정치 문서와 문학 작품들 속에서 그 이름은 음험함·교활함 같은 어두운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악한이 아니며, 도리어 인간과 정치의 속성이 사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어 왔다. 악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외친 아이들처럼. 이쪽 편에서 보자면 그는 인간과 정치의 악한 속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 '과학자'가 된다. 근대 자연과학이 갈릴레이로부터 시작하듯, 사회과학은 마키아벨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에는 선과 악, 중세와 근대, 도덕과 과학, 통속과 비범이라는 상반되고 대립된 이미지들이 겹쳐있다. (근래 번역된 퀜틴 스키너의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강정인·김현아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이라는 책 제목이 그의 복합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를 독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난점은 마키아벨리의 주저인, <군주론>(강정인·김경희 옮김, 까치 펴냄)과 <로마사 논고>(강정인 옮김, 한길사 펴냄) 사이의 모순으로 집약된다. 즉 마키아벨리 해석의 문제는 권모술수와 무자비한 권력 행사를 요구하는 <군주론>과 공화정을 옹호하는 <로마사 논고>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어떻게 해석해 낼 것인지가 관건이다.

마키아벨리 해설서를 읽는 독자들의 눈길도 이 지점을 지켜본다. 마키아벨리의 진심이 공화정에 있다고 볼 것인가 혹은 군주정에 있다고 볼 것인가. 정치의 중심을 인민을 위주로 삼았다고 보는가 아니면 군주를 중심으로 보았다고 하는가. 또 마키아벨리의 시각이 군주 중심에서 인민 중심으로 시간적으로 변모했다고 해설할 것인가 혹은 문자화된 언술 밑에 저류하는 마키아벨리의 일관된 어떤 비전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등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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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정정훈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최근 마키아벨리에 대한 흥미로운 해설서가 출간되었다. 문화 연구가인 정정훈이 상재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그린비출판사 펴냄)이 그것이다. 그린비출판사가 대학 바깥 연구 단체인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젊은 학자들의 책을 주로 내는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정정훈은 머리말에서 자기도 본래는 마키아벨리라고 하면 권모술수를 연상하고 그저 심드렁했을 뿐이었노라고 토로한다. 그러다가 현대 서양 사상가들을 공부하는 와중에 새로운 마키아벨리를 운명적으로 만났노라고 회상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마키아벨리를 정면으로 연구한 전문 학자가 아니다.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현대 사상가들의 저술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그 문맥 속에 등장하는 마키아벨리를, 이를테면 '정면'이 아니라 '등짝'으로부터 만났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전제 권력 옹호자로서의 군주가 아닌 사회 변혁과 인간 해방의 정치가로서 군주를 발견하는 '눈뜸'을 얻었다고 술회한다. 이를테면 인민 해방의 기수로서 마키아벨리(알튀세르), 그리고 공산당을 '집단적 형태로서의 군주'로 연역했던 그람시의 마키아벨리를 만났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있었던 듯하다. "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는 승리의 기록보다는 패배의 기록이 더 많았을까?"(14쪽)라는 식으로 질문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키아벨리로부터 발견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술적 관점으로 <군주론>을 새롭게 독해하던 저자는 결국 "인민 해방의 꿈을 단지 꿈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우리는 철저하게 냉혹하고 엄정한 현실 속에서 현실적으로 사유하고 활동해야 한다"(15쪽)는 점을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이런 지적 편력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출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좌파적 당파성에 기초한 마키아벨리 읽기와 쓰기야말로 이 책의 의미이자 또 다른 해설서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읽어낸 마키아벨리 해석의 결론은 마지막 제6장 "마키아벨리와 해방의 정치"라는 제목 속에 선명하게 들어있다. 그러나 <군주론>을 해방의 정치로 읽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저자도 "마키아벨리조차 그렇게 읽는 것에 의아할 것"이라며 동의를 표한다. 그럼에도 또 그는 이렇게 강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해방적 정치의 노선 속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읽어내는 마키아벨리는 낯선 얼굴을 한 얼굴일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마키아벨리의 초상화는 그 자신에게조차도 자기의 낯선 얼굴을 보여주는 초상화일지도 모른다. (…) 정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사유가 지니는 해방적 성격의 가장 분명한 차원은 그가 정치의 근본적 모판을 인민으로부터 찾고 있다는 점에 있다. (223쪽)

여기 해방의 정치란 곧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이 인민 중심의 정치 체제를 지향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는 군주의 역할이,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것이 저자의 마키아벨리 군주 독해의 핵심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군주의 독재 권력을 통해 창건된 국가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군주정이라는 국가 형태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국가 형태는 공화정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군주는 오로지 자신의 일인 지배를 폐지하기 위해서만 군주국을 창건하는 것이고 공화정으로 이행하기 위해서 군주정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치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이 되는 것은 계급을 폐지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그들이 정치권력을 쥐는 것은 정치권력을 없애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이다. (239쪽)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역사유물론에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의 역할과 같다는 것이다.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지만(군주정) 그러나 끝내 인민 해방의 계기(공화정)로 이행하기 위한 역할에 한정되듯, 마키아벨리의 군주의 역할도 그러하다는 것. 이런 파격적인 주장은 알튀세르를 위시한 좌파 해석가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이 알튀세르 해설서가 아닌 마키아벨리 해설서라는 점이다.

저자는 "나는 공부라는 것은 현실에 개입하고 그 속에서 작동하는 지식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천명한 바 있는데, 과연 오늘 한국 땅이라는 '현실' 속에서 마키아벨리와 알튀세르, 그람시를 공부한 그는 어떤 '개입과 작동의 방식을 펼쳐내, 이 땅의 인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생사는 그 설득력에 달려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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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이 책 속에서 두 개의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 같다. 하나는 '주제'로서의 마키아벨리다. 저자가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를 해설하고 그 사상을 소개할 때가 '주제로서의 마키아벨리'가 등장하는 경우다. 이건 대부분의 해설서들이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군주론>의 핵심 개념들, 가령 비르투(역량)와 포르투나(운)를 마키아벨리는 이러저러하게 해설하였는데, 오늘날 관점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식의 논술이다. 정정훈의 <군주론> 속에서도 이런 전통적 해설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 하나는 '소재'로서의 마키아벨리다. 그람시 등 현대 서양 사상가들이 해석한 마키아벨리론을 소개하고 이를 토대로 저자의 사유를 풀어내는 경우다. 이 책의 특징이 이곳에 오롯하다. 이 책에는 현대 서양 사상가들의 마키아벨리를 소재로 한 해설들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예컨대 스피노자,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들뢰즈, 지젝, 네그리 등과 같은 사상가의 상유를 접할 수 있다. 이들 현대 사상가의 '마키아벨리론'을 맛보고, 또 그 지적 동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한 미덕이다.

헌데 문제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크지 않은 책 속에 너무 많은 외부 해설자들이 등장하다 보니, 과연 본문 속 문장이 정정훈의 것인지 외부 해설자의 것인지가 모호해지는 곳이 많다. 또 가령 스피노자와 네그리의 마키아벨리 관점은 각각 나름의 맥락을 갖고 있고 또 그만큼 서로 다른 처지에서 마키아벨리에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속에서는 그런 맥락과 접근 방향의 다양성은 언급되지 않고, 마키아벨리를 소재로 취했다는 공통점에 근거하여 필요에 따라 부분 부분 절취되어 모자이크 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또 그렇다고 정정훈이 해설하는, 예컨대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론이 정확한 것인지도 이 책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런 데가 한 두 곳이 아닌지라, 과연 저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각박하게 표현하자면, 이 책이 정정훈의 저작인지, 서구 현대 마키아벨리 해설가들의 해석을 스크랩한 편집물인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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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의 글쓰기 스타일은, 오래고 먼 우회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진면목'을 만났다는 흥분 때문인지 격정적이고 단정적이며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형용사나 부사와 같은 수식어들의 과다한 사용과 과격하고 단정적인 어투가 저자의 주장을 모호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런 수식어들이 독자 대중들과 소통의 벽을 허무는 기제가 되기를 기대하였는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도리어 독자와의 소통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책 전체에 걸쳐 그런 식의 문장들이 많은데 그 중 몇 대목을 예시해본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란 철저히 인간사의 영역이고 인간의 의지를 실현해 가는 활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정치는 일차적으로 운(fortuna)의 규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100쪽, 밑줄은 인용자)

'정치가 인간사의 영역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라고 요약되는 인용문은 '철저히'와 '결코'라는 단정적인 부사들로 인해 도리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더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운의 노예일 뿐이며, 모든 것을 운에 맡겨놓기만 해야 할까? 모든 것은 운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 뿐이란 말인가? (…) 마키아벨리는 운의 힘이 인간사에 결정적이라는 생각에 상당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이 운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운명론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운의 힘을 강조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견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간혹 어느 정도까지는 이 의견에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곧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0쪽)

'마키아벨리는 운의 힘이 결정적이라는 점에 상당히 동의하면서도 운명론자는 아니었다'는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는 내용을 번쇄하고 각박한 자문자답으로 길게 늘여 해설하는 것이 '리라이팅'은 아닐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바로 이 '나머지 반'의 영역이었다. (…) 운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이 주체의 의지는 그 어떤 긍정적 작용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운의 작용을 완전히 제쳐둘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 어쩌면 운이란 정치적 주체를 둘러싼 외부적 환경 전체인지도 모른다. (…) 마키아벨리는 이 외적 힘인 '운'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의 상대적인 힘을 역량(virtu)이라고 부른다. (111쪽)

"마키아벨리는 ~이다. 하지만 ~만은 아니다" 하는 문투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자주 반복된다. 그리고 ~할 뿐, ~만, 모든~, 결정적~, 결코~ 등 과도한 강세어들은 쓸데없는 감정의 예각(銳角)을 만들어 모순되지 않는 문장들조차 서로 부딪치는 느낌을 갖게 만들고 또 내내 글 읽기를 힘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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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지적했듯 마키아벨리 정치학에서 큰 난제는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위치한다. <군주론> 속에서는 인면수심의 군주를 철저히 용인하면서, 또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정(역사적으로는 로마공화정)의 탁월한 옹호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상가 마키아벨리를 일관되게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이다.

정정훈은 "기본적 세계관을 비롯하여 군주정체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로마사 논고>는 <군주론>과 연속된다"라고 확신한다(221쪽).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동일하지만, 다만 분석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 나아가 군주는 인민에 의지하며, 인민과 연합 전선을 꾀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정확히 군주가 이탈리아에 통일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귀족이 아니라 인민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 군주의 적이 귀족이 아니라 인민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 군주의 적이 귀족이라면 군주의 동지는 인민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귀족과 대항하기 위한 인민과의 연합 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254쪽)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해석을 따라 '해방의 정치학'으로 읽고자 하는 저자로서는 인민 위주의 정체, 또 인민을 위하는 군주, 그리고 군주와 인민의 연합 전선은 필요했을 것이다. <로마사 논고>에 주의하면 넉넉히 그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면 <군주론> 속의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계'를 갖추고서 군주에게 덮치는 운명을 극복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군주는 어디로 갔을까?

"분명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신민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때로는 인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공포의 힘을 활용하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군주와 인민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인민을 제어하기 위한 군주의 강제력은 결코 군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232쪽)

과연 군주와 인민 사이에는 고작 "일종의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는 표현 정도로 그 길항 관계를 봉합할 수 있을까? 또 한편 군주와 인민 사이에 긴장 관계라도 존재한다고 하면, 바로 그 위 인용문 속에 개진된 "정확히 군주가 이탈리아에 통일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귀족이 아니라 인민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과 '정확히'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어떤 때는 "인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공포의 힘을 활용하는 것도 불사해야 하는 군주"와 또 어떤 때는 "귀족에 대항하기 위한 인민과의 연합 전선이 필요하다"는 진술 사이의 모순을 고작 '긴장 관계'라는 표현으로 메울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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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견으로는 사상가를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해설하려는 시도가 도리어 그 사상의 진면목을 해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들은 인간과 사물에 대해 육안에 비치는 거죽만이 아니라 심층으로도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공자가 그러했고(공자는 3겹의 눈을 갖고 있다고 맹자는 말한다), 석가모니도 그러했다(석가는 5가지 눈을 갖췄다고 <금강경>은 말한다). 사상가들의 힘은 눈에 보이는 피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배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패러독스의 이치를 이해하고, 또 아이러니를 통해 이를 표현해내는 구사력에 있을 터다.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역시 '혼합정체'를 이상적으로 여긴 데서 보이듯 사회의 세 요소(군주, 귀족, 인민)들이 갈등하고 길항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다양한 현상들을 용인하는 입장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가 유의한 것은 공화정이냐 군주정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또 인민 중심의 '해방의 정치학'을 일방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인정되는 체제일 터였다.

마키아벨리에겐 도시의 세 계급들이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 조화를 만드는 것이 '건강한 사회'(겹과 다양성)요, 반면 한 요소의 일방적 지배와 억압이 일어난 곳은 '부패한 사회'(홑과 일방성)였지 싶다. 외면의 체제가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어느 정도는'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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