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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노랑, 파랑은 색의 3원색이다. 색을 모두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빨강, 초록, 파랑은 빛의 3원색이다. 빛은 합치면 흰빛이 된다. 왜 그럴까. 왜 뭉칠수록 색은 검어지고 빛은 하얗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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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신각신했다. 전라남도 순창의 회문산으로 꽃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어느 톨게이트에서 내리고 몇 번 국도를 타는 게 좋을까를 두고 각자의 판단이 달랐던 것이다. 말 못하는 내비게이션도 의견을 내놓았지만 무시되었다. 요즘 새로 뚫리는 도로가 많아서 내비게이션도 종종 엉뚱한 길로 안내하기가 일쑤이다. 그만을 믿고 무턱대고 따라가다가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기계를 잘 믿지 않는 풍조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우세한 의견이 없자 결국은 핸들을 쥔 분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고속도로의 어느 구간이었나. 가로수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던 조팝나무를 떠올리며 나는 필드가이드북인 <봄에 피는 우리 꽃 386>(현진오 지음, 신구문화사 발행)을 뒤적거렸다. 문득 바깥을 보니 차는 전주 시내를 통과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도심은 번잡했다. 조금 우회하는 것 같고 시간도 걸리는 것 같았지만 운전하는 분의 권리를 인정해 주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 조팝나무. ⓒ이굴기 |
겨우 전주를 빠져나오자 긴 터널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부터는 도로가 뻥 뚫렸다. 그리고 넓은 호수가 시원하게 나타났다. 옥정호라고 했다. 호수 건너편 깎아지른 절벽에 큰 뼝대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활성탄층을 막 빠져나와 깨끗해진 물처럼 피곤에 지쳤던 일행들의 얼굴이 모두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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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했다. 옥정호의 수면은 거울처럼 투명해서 주위의 모든 풍경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옥정호가 넓다 하나 나의 시야는 그보다도 더 넓었다. 사람의 눈도 보통은 아닌 것이다. 잔잔한 수면 아래 산이 자맥질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 일행 중에 순창이 고향인 분이 있었다. 저 산 너머너머 어딘가가 우리가 내일 올라가야 할 회문산이라고 했다. 겨울을 앓고 난 산은 무척 훌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기에 가지만 남은 나무의 종류는 알 수가 없었고 한 폭의 동양화처럼 한꺼번에 확 다가왔다. 조금 가까운 산은 초록색이었지만 멀어질수록 잿빛으로 차츰차츰 농담을 달리하였다.
너무 멀어서 나무들을 하나하나 동정(同定)할 수가 없었지만 개략적인 사실은 알 수가 있었다. 어느 산은 활엽수가 아주 많았다. 늘푸른잎사귀들이 무성한 반면 어느 산은 떨기나무들이 우세했다. 그 무성했던 작년의 잎을 다 떨쳐버리고 앙상한 가지들만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 어떤 산에는 하얀 꽃들이 피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머리가 희끗희끗 반백으로 변해가는 모습과 비슷했다. 짐작컨대 그 나무들은 아까시나무, 팥배나무, 이팝나무 등등일 것이다.
▲ 팥배나무. ⓒ이굴기 |
▲ 아까시나무. ⓒ이굴기 |
산이 하늘과 맞닿은 능선에는 얼룩말의 갈기처럼 나무들이 나란히 그리고 촘촘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아득한 허공을 배경으로 깔고 있기에 아주 잘 보였다. 많은 산을 다녀본 경험으로 미루어 그 능선에는 작은 오솔길이 발달해 있고 좌우로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너도밤나무 등이 있고 그 아래로 진달래나 산철쭉이 가득 피어 있을 것이었다. 혹 각시붓꽃이 호젓한 길가에 수줍게 서 있기도 하겠다.
▲ 신갈나무. ⓒ이굴기 |
▲ 각시붓꽃. ⓒ이굴기 |
나의 시선이 회문산의 산등성이를 짚고 바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곳에 하얀 달이 떠 있었다. 아직 환한 대낮에 너무나도 하얀 보름달을 맞닥뜨리니 무슨 종교처럼 소슬한 기분이 들었다. 보름달에 박힌 희끄무레한 얼룩은 경전의 글씨처럼 보여서 따라 읽고 싶어졌다. 어디에선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해는 보이지 않았다. 공중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드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왜 고운 달은 흰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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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했다. 숙소인 휴양림 근처에도 많은 나무와 풀들이 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나무로는 신갈나무, 오동나무, 산벚나무, 굴참나무가 있었다. 또 옆 개울가를 중심으로 내 앉은키보다 훨씬 작은 흰젖제비꽃, 현호색, 복수초, 큰개별꽃 등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야생화는 생활사(生活史)에 따라 한해살이풀, 두해살이풀 그리고 여러해살이풀로 나눌 수 있다. 위에 적은 식물은 모두 여러 해를 산다. 그렇지만 가늘고 길고 게으르게 사는 나보다도 수명은 훨씬 짧다. 따라서 이 식물들은 일생을 아주 집중적으로, 굵고 짧게 사는 것 같았다. 흐트러지는 법 없이 야무진 차림의 꽃들 앞에서 나의 고개는 저절로 숙여졌다.
▲ 오동나무. ⓒ이굴기 |
▲ 흰젖제비꽃. ⓒ이굴기 |
▲ 현호색. ⓒ이굴기 |
저녁을 먹고 회문산 자연 휴양림 숙소 발코니에 둥글게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현진오 박사의 살아 있는 식물 강의도 곁들여졌다. 순창이 고향인 분의 친구가 전달해준 복분자술도 동이 나고 내일을 위해 모두들 흩어져야 할 때가 왔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이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어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드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왜 어둠은 검정색일까.
5
깜깜했다. 사물들은 모두 어둠의 옷을 공동으로 껴입고 있었다. 좀 전에 눈을 맞추었던 각종 나무와 풀들이 모두 검은색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빛이 사라지자 사물들도 모두 내 눈에서 없어졌다.
모습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지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 그것은 강력한 어둠의 힘이었다. 어둠은 끈적끈적한 풀처럼 이 세상을 검게 칠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들이 하나로 뭉치자 그것은 아주 강력한 검정색으로 변했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그저 칠흙 같은 어둠일 뿐이었다.
왜 뭉칠수록 색은 검어지고 빛은 하얗게 될까. 희미하게나마 짚이는 바가 있었다. 산에는 각종 울긋불긋한 꽃들이 피어 있다. 온 산을 물들이는 꽃과 나무들의 울긋불긋함. 그것은 빨강, 노랑, 파랑의 3원색이 각자의 비율대로 섞이어 만들어진 결과이다.
문득 옥정호를 지날 때 만났던 흰 달이 생각났다. 세상의 모든 꽃과 나뭇잎의 색깔을 건드리고 튕겨나간 빛들이 모두 하늘의 달로 수렴되는 것! 그러니 달은 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빛이 사라지면 모든 사물들은 하나로 뭉친다. 그 사물들의 형형색색이 하나의 어둠으로 수렴되는 것! 그러니 그 어둠은 검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식물 공부하러 왔다가 오래토록 신기하게 생각해왔던 세상의 비밀 하나가 신통하게 풀린 밤이었다. 모두들 흩어지고 텅 빈 발코니에서 별빛이 빽빽하게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도 어지간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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