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27일
지금 지구상의 한민족 인구는 약 8000만 명, 그중 10분의 1 가까이가 재외 동포로 파악된다. 150년 전에 비해 다섯 배로 늘어난 인구 증가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것이지만, 재외 동포의 증가는 그야말로 천양지판이다. 1860년까지 1000여 년 역사를 통해 한민족의 재외 동포가 인구의 0.1퍼센트(%)를 넘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1860년 시점에서는 아마 0.01 퍼센트 수준이었을 것이다.
전통적 국가 체제의 이완이 인구 해외 진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인구가 조밀한 조선 농업 사회에서 인접한 만주로 확산해 나가려는 자연스러운 추세를 조선과 청나라의 국가 체제가 가로막고 있다가 1860년대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이후 50년간 약 20만 명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해 정착했다. 일본의 병탄 때까지 한민족 재외 동포가 1퍼센트 선을 넘긴 것이다.
합방 후 근대화에 따른 사회 유동성 증가가 인구 해외 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인구 분산의 더 큰 원인은 폭력적 식민 지배에 있었다. 쌀 반출 극대화를 위한 제반 농업 정책으로 농촌이 파괴되면서 농업 인구의 상당 부분이 유휴 노동력이 되었다. 조선 내의 산업화는 이 유휴 노동력의 아주 작은 일부분밖에 흡수하지 못했다. 많은 인구가 만주 개척에 동원되었고, 1937년 이후 전쟁기에는 일본의 산업 노동력으로 징용을 당했다.
해방 당시에는 약 500만 명, 전체 조선인의 20퍼센트 가량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 그중 절반이 해방 직후에 귀국했고, 나머지 절반이 현지에 교민 사회로 남았다. 지금의 700만 재외 동포 가운데 3분의 2는 이때 잔류한 교민의 후손이고, 60여 년 동안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그 절반이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폭력적 신민 정책의 작용 없이 근대화에 따른 사회 유동성 증가의 자연스러운 작용만으로는 한민족의 해외 거주 비율이 지금의 9퍼센트보다 훨씬 낮은 3~4퍼센트 선에 머물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 재외 동포의 대다수는 그 조상들이 강압적 조건에 내몰린 까닭으로 한반도 밖에서 살고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민족 분단'이라 하면 흔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분단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한민족은 일본 식민 통치에 의해 상당한 규모의 분단을 이미 겪었고, 그 분단을 지금까지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의 '분단'을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남북 간의 분단만을 의식한다. 하나여야 할 것이 둘로 쪼개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하는 교민 사회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교민 사회에도 분단의 주체로 생각할 측민이 있다.
한민족의 교민 사회가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것은 현상적으로 볼 때 '분산'이다. 그런데 그 사회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구성원들이 어떤 이유로 한반도를 떠나게 되었는지 따져보면 그 분산 현상에서 폭력적인 분단의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 살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이민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분단의 의미가 없는 단순한 분산일 뿐이다. 그러나 이남이 할머니처럼 상황에 몰려 고향과 조국을 억지로 떠나 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겪은 것은 분단이다. (☞관련 기사 : "漢族이 되려는 조선족 배신자라 욕할 텐가?" : 민족의 '분단'과 민족의 '분산')
이남이 할머니란, 정신대로 끌려가 크메르에서 살다가 50여 년 만에 조국을 찾은 '훈' 할머니가 되찾은 이름이다. 해방 당시 한반도 밖에 나가 있던 500만 조선인 중에는 그분처럼 참혹한 상황은 아니라도 강압에 몰려 고국과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강압이 사라지자 강압 때문에 떠나 있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애초에 강압 때문에 간 곳이지만, 그런 대로 닦아 놓은 기반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곳을 새로운 고향으로 여기고 주저앉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떠나 온 곳의 강압이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 지역에 자리 잡은 농민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또는 그들의 부모들)이 만주로 떠난 것은 농사지을 땅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이 농지 소유를 집중시키고 소작권을 약화시켜서 농촌 사회를 파괴한 결과였다.
강압이 정말 사라졌다면 그들은 경작 능력을 쏟아 부을 땅을 얻을 수 있어야 했다. 농지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떠날 때의 상황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일본인 대신 미국인이 상전 노릇 하는 것, 동척 대신 신한공사가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 돌아올 조건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만주의 조선인 대다수는 해방 후 바로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주시했다. 조선인을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핍박함으로써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중국인 토호들에게 쫓겨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대에 따라 사정이 달라졌다. 토호들은 대개 중국국민당과 결탁했고 공산당은 조선인 농민들을 피압박 계층으로 포용했다. 만주의 조선인 농민들은 해방군 지원 등으로 공산당에 호응했고 공산당 정권 아래 생존권을 보장받았다.
1946년 3월 이북 지역의 토지 개혁이 만주의 조선인 농민을 얼마나 끌어들였는지 정확한 통계는 살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귀환과 잔류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많은 사람들에게 늘려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운형이 김일성에게 이북 지역만의 토지 개혁에 남북 간의 이질화를 늘릴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늦출 것을 권한 데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토지 개혁의 근본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마냥 늦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해방다운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그런 사람들이 인구의 5분의 1이었으니, 돌아올 사람 기다리지 않는 집안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재외 동포의 귀환은 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도 관계 기사가 있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동포들은 23일 현재로 약 278만 명이나 되는데 아직도 200만 명은 더 있을 것을 예상하고 외무처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우선 3주일 이내로 상해 방면의 동포 5500여 명을 계획 수송하기로 되었다. 방금 3000명을 싣고 미국 수송선 크레멘트 크리이 호가 상해를 떠나오는 중에 있어 머지않아 인천에 닿으리라 한다. 이밖에 버마 말레이반도 방면 지역에서도 근근 귀환 동포선이 들어올 예정이다.
21일 미국 배로 우리 동포 123명이 부산에 입항하고 동일 일인 1240명이 철거하였다고 한다. 이날 현재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우리 동포는 16만3367명이고 일본인 철거는 72만344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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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군정청의 발표는 이와 전혀 다른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20일 군정청 외무처 발표에 의하면 15일 일본으로부터 1502명이 부산에 상륙하였고 인천에는 4585명의 귀환 동포가 상륙하였고 인천에는 4585명의 귀환동포가 상륙하였으며, 일본인은 5123명이 철퇴하였다. 그런데 15일 현재로 총계를 보면 일본으로부터 귀환 동포가 106만549명, 중국으로 귀환 동포가 3만3344명이며, 철퇴한 일인 총수는 71만5789명이다.
(<조선일보> 1946년 5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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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6일자 기사에서 일본으로부터의 귀환 동포를 16만여 명이라 한 것은 106만여 명의 단순 착오 같다. 한편, 군정청 발표에서 중국으로부터의 귀환을 3만여 명이라 한 것은 믿기 어려운 숫자인데, 배를 타고 이남의 항구로 귀국하는 사람의 숫자만이 파악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정청 외무처는 5월 6일에도 중국에서 돌아온 동포 수를 2만1621명으로 발표한 바 있었다.
1945년 9월 초 미군이 일본과 한반도 남반부에 진주하자마자 조선에 있던 일본인을 송환하고 일본에 있던 조선인을 귀환시키는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10월 24일까지 17만여 명의 일본인과 15만여 명의 조선인이 수송되었다는 발표가 있었고, 이 숫자는 11월 12일까지 32만여 명과 34만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12월 20일에는 일본인 송환자 46만여 명, 조선인 귀환자 71만여 명으로 발표되었다.
일본 이외 지역으로부터의 귀환 사업에는 군정청이 연말까지 착수하지 않았다. 필리핀으로부터 조선인 징병자 200명이 도착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 12월 24일자에 나왔는데, 이것은 군정청 사업이 아니라 해외 주둔 일본군 처리 과정에서 이뤄진 일로 보인다. 중국에 있던 동포의 귀환 사업에 군정청이 착수한 것은 1946년 1월의 일이었다.
해방 이후 일본을 주로 한 해외 각 방면으로부터는 우리 동포들이 군 정부 혹은 민간 제 단체의 따뜻한 구호 활동으로 뒤를 이어 환국을 하고 있으나 중국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동포들은 교통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부분이 아직 귀국을 못하고 있는 현상이므로 군정청에서는 이들을 하루바삐 데려다가 건국 사업에 참가케 하고자 머지않아 중국에 있는 조선 동포 구호 특파대를 파견하기로 되었다. 일행은 전부 여섯 명으로서 파견될 곳은 上海, 靑島, 天津 등 각지이며 이들이 파견되어 그곳에 뿔뿔이 헤어져 있는 동포들의 실정과 교통 관계를 조사하여 오면 군정청에서는 곧 구체적 대책을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중국에 있는 동포들을 귀국시키는 일에 진력할 터이다. 특파 대원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上海 朴治均 朴先奉, 靑島 姜則模 崔永杰, 天津 吳希元 金漢基
(<조선일보> 1946년 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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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 조선인 귀환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어 2월 20일 제1진 2200명의 인천 입항을 비롯해 5월까지 3만여 명의 수송 실적이 군정청에서 집계된 것이다. 물론 만주를 비롯한 중국 지역에서의 귀환은 군정청 사업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이뤄진 것이 훨씬 많아서 총 100여 만 명으로 추산된다. 5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총 귀환자 수를 278만이라 한 데는 이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데, 집계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은 개인적 귀환도 어느 정도 가능한 곳이었다. 개인적 귀환이 불가능한 그 밖의 지역에서도 1946년 들어 귀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월 6일 부산에 입항한 귀환자 집단에 관한 기사에서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의 일단을 알아볼 수 있다.
남양의 한복판 트락크 섬에는 우리 동포가 8000여 명이나 가서 가혹한 압제 밑에 혹사를 당하다가 싸이판이 함락되자 식량 공급이 안되기 시작하여 일본인은 조선 사람들에게 식량을 안 주기 시작하여 전부가 영양 부족으로 쓰러짐에도 불구하고 진지 구축이 하루가 바쁜 일인은 일만 시키어 굶어 죽는 동포가 매일 생기는 참혹한 생활을 하다 급기야 이 트락크 섬에도 미군의 공습이 시작하자 일군에게도 식량 공급이 두절되고 말아 조선 동포는 처음에는 나무뿌리, 풀잎으로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산과 들의 풀이란 풀을 전부 뜯어 먹고 쥐 한 마리에 백 원씩 매매가 되고 뱀, 벌레 등 닥치는 대로 먹다 못하여 5000여 명 동포는 무참히도 굶어 죽었다는 가장 슬픈 소식을 싣고 나머지 3254명은 지난 1월 15일 트락크를 떠나 2월 2일에 일본 吳港에서 大隅丸에 바꾸어 타고 지난 6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동 3254명 중에는 지원병 300명을 제하고는 전부 강제 징용을 당해 갔던 사람으로 지원병 중에 강원도 출신 이위상 군은 감개무량한 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다시 못 올 줄 알았던 조국, 더욱이 해방된 조국에 상륙하니 같이 가 있다가 희생된 5000여 동포의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해방될 때까지 우리들은 뼈만 남은 산송장이 되어 기동을 못하였는데 미군이 상륙하여 식사를 공급해서 살았습니다. 일본놈 압박은 언어도단이어서 전북 출신의 우리 조선 사람 반장 高原은 참다못하여 장교 한 명을 찔러 죽이고 자살한 예도 있고 마지막에는 식량이 떨어지니까 굶어서 기동을 못하는 조선 사람에게 土民의 농작물을 도적해 오라고 총칼로 위협까지 했습니다."
(<조선일보> 1946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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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에서의 귀환이 뜨문뜨문 이어지다가 말레이 반도에서 돌아온 2000여 명이 부산에 입항했다. 이 일행 중의 정원국 싱가폴 고려인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2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니 그 감회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더욱이 우리들 상륙에 힘써준 부산의 소년동맹원 제씨들의 활동에는 무어라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해방 후 영국군의 보호 아래 '푸론'이란 곳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는데 현재도 '쟈바', '샴' 등 부근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동포들이 '싱가폴'로 집중하고 있어 우리들이 떠나던 4월 22일에는 군인·군속 1300명 일반 거류 시민이 약 1000여 명이 고국에 돌아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떠났습니다.
해방된 조선 사람으로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패전한 일본인들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배를 보내어 거의 다 돌아갔는데, 아직도 남방의 우리들에게는 한 번도 이런 계획 수송이 없어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근 40년 일본의 학정 아래 억눌려 살던 우리들은 현지에서 일본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으니, 이런 점에 대하여 연합제국의 새로운 인식과 고려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1946년 5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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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조선인 귀환 사업에서 전체적으로 받는 인상은 적극성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방 지역에서 내보내면 받아들일 뿐이지, 귀환 촉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남양 지역에서 조선인보다 일본인의 귀환이 더 빨리 이뤄졌다는 정원국의 증언을 보면, 맥아더 사령부의 감독 하에라도 일본인의 정부가 유지된 일본에 비해 미국-소련군이 직접 통치한 한국 쪽의 귀환 사업이 더 부진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일본의 항복 후에도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위치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분단 이전에 한민족은 일본에 의해 그 5분의 1이 분단되어 있었다. 그 분단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위에 남북의 분단이 덮친 것이었다. 2중의 분단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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