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국 남자 배구 최초의 월드 스타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국 남자 배구 최초의 월드 스타는?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교체 ②

1992-1993 시즌 배구 리그 챔피언 결정전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습니다. 국가 대표 출신 선수들이 즐비한 현대자동차서비스(현대자동차)와 여섯 명의 선수들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던 고려증권의 경기는 언제나 창과 방패의 대결처럼 손에 땀을 쥐는 경우가 흔했지요.

특히 홍해천이라는 걸출한 수비수를 보유한 고려증권은 현대자동차의 강타를 수시로 걷어 올리며 다섯 번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우승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현대자동차의 감독 이인은 세 번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뒤를 이은 감독이 1년 전에 합류하여 코치로 벤치를 지킨 한국 배구 역사상 최고의 왼쪽 공격수라 할 수 있는 강만수였습니다.

한국 남자 배구 최초의 월드 스타 강만수

2009-2010, 2010-2011 시즌에 KEPCO45의 감독을 지낸 후 지금은 물러난 강만수는 한국 남자 배구 역사상 최고의 왼쪽 공격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진식, 임도헌, 이경수, 하종화, 노진수, 강두태 등 어떤 공격수도 어느 한 시기만을 놓고 본다면 강만수에 필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선수 생활 전체를 통틀어 그에 비교할 만한 선수는 없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실업팀이라고는 금성(KIG의 전신), 한국전력(KEPCO45의 전신), 종합화학 등 3개밖에 없던 시절에 강만수는 한국 남자 배구 선수 중 유일하게, 타 구기 종목까지 합쳐도 차범근과 더불어 유이하게 "세계적인 선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세터 김호철, 지금은 고인이 된 강두태, 장차 한국 배구의 전설로 남게 되는 장윤창 등과 함께 한국 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1978년 세계배구선수권대회 4강, 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대회 우승과 같이 그 이전의 어느 남자 배구 선수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그는 박기원 현 국가 대표 팀 감독, 이인과 김호철 전 국가 대표 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해외로 진출하여 아랍에미리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스파이크를 성공하고 환호하는 강만수. ⓒ연합뉴스
1983년에 현대자동차와 고려증권이 동시에 창단될 때 선수 겸 트레이너로 현대자동차에 들어와 한국에서의 마지막 선수 생활을 보내던 중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 팀 주장을 맡아 남자 배구 올림픽 순위로는 가장 높은 5위(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불참한 가운데서 차지한 5위가 뭐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이 한국을 겁내서 예선에서 브라질에게 져주기 게임만 하지 않았다면 은메달을 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를 기록했습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선수 겸 트레이너 생활을 청산한 후 일본에 유학하면서 선수로도 활약할 때는 일본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아닌 선수 강만수에 대해서는 어느 배구 선수 못지않게 할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감독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93년에 이인이 이끌던 현대자동차에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이인이 물러난 후 현대자동차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최고 선수 강만수의 오르막과 내리막

어느 실업 팀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막대한 투자를 하던 현대자동차는 강만수 취임과 함께 군에 간 노진수가 돌아오고, 국가 대표 공격수 임도헌이 입단하면서 최고의 전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하여 1987-1988 시즌에 이어 1993-1994 시즌에 6년만의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겨울 리그에서 고려증권과 함께 가장 많은 다섯 차례의 우승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감독으로 맞이하는 세 번째 시즌이 다가오고 있을 때 현대자동차에 새로 들어온 선수는 리베로 이호뿐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LG화재와 고려증권이 우승을 노리며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상열, 구본왕, 구준회, 김성채, 오욱환, 최영준 등으로 멤버를 구성한 LG화재도 맞수였지만 고려증권도 이수동, 문병택, 박선출, 이재욱, 이성희가 3년 전에 못지않은 조직력을 보여 주며 우승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예상대로 고려증권을 만난 현대자동차는 3차전까지 2대 1로 뒤진 상태에서 4차전을 맞이했습니다.

지면 고려증권의 우승으로 끝나는 경기에서 양 팀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고려증권이 15대 11로 1세트를 가져가자 현대자동차는 17대 16으로 2세트를 이겼습니다. 고려증권이 3세트에서 15대 9로 승리를 거두자 현대자동차는 16대 14로 4세트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된 5세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마낙길과 임도헌은 무지막지한 강타를 휘둘러댔고, 고려증권의 박삼룡, 이수동, 문병택은 이에 맞서 계속해서 반격을 했습니다. 코트에 닿을 듯한 공을 몸을 날리며 걷어 올리기를 수차례, 관중석에서는 한 차례의 공격과 수비가 이루어질 때마다 응원하는 팀에 따라서 환호와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KBS의 오관영 해설 위원은 "배구 경기가 항상 이렇다면 매일 관중석에 빈틈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경기 내용을 칭찬했고, 그 칭찬이 결코 아깝지 않게 세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5세트 18대 16, 고려증권의 승리로 끝난 그 경기는 국내 배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였으며, 3연패를 노리던 현대자동차의 강만수에게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보다 수개월 전에 창단된 삼성화재는 이미 대학을 졸업한 김세진과 김상우, 두 국가 대표를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일단 팀에 합류하기로 했던 신진식이 현대자동차 대신 삼성화재로 발길을 돌려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다섯 시즌을 보내는 동안 삼성화재는 다섯 차례의 겨울 리그에서 우승을 독식했고, 현대자동차는 1998-1999 시즌에 LG화재에 2위를 내 주고 3위로 내려앉은 것 외에 4회의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우승의 한을 풀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타 선수 출신으로 현대자동차 감독을 맡아 여덟 번의 겨울 리그를 치른 강만수는 1회 우승, 5회 준우승, 1회 3위를 기록한 채 2001년에 사임하였습니다.

짧은 임기를 보낸 대학 배구의 제왕

강만수의 뒤를 이어 현대자동차의 사령탑에 오른 이는 한양대학교 감독 출신의 송만덕이었습니다.

1982년부터 약 20년간 한양대학교 배구팀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국가 대표 선수를 길러내며 대학 배구의 제왕으로 군림하다시피 한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팀 감독을 지내기도 했고, 1991-1992년 겨울 리그에서는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대학 팀이 우승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때 주전으로 활약한 바 있는 하종화, 윤종일, 장재원, 문양훈 등 당시의 주축 멤버는 모두 팀을 떠났지만 강성형이 트레이너로 합류했고, 코치는 유중탁이 맡았습니다.

삼성화재가 창단되기 전에는 고려증권과 함께 우승을 나누어 가지던 현대자동차였지만 삼성화재 창단 후 우승권에서 멀어지자 대학 배구 64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송만덕을 영입한 것입니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겨울 리그 준비에 들어갔으나 현대자동차는 삼성화재에 우승을 내 준 것은 물론, LG화재에 준우승마저 내주면서 3위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대캐피탈로 이름을 바꾼 2002-2003 시즌에서는 준우승에 오르기는 했으나 삼성화재의 독주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에 현대자동차와 고려증권이 벌이던 혈전을 기대하던 배구 팬들에게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박진감 떨어지는 경기 내용으로 2위에 오른 것입니다.

1996-1997 시즌부터 일곱 번이나 삼성화재가 우승을 독차지하는 동안 구경꾼으로만 머물렀던 현대캐피탈이 다시 한 번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뭔가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변화를 추구하던 와중에 아직도 팔팔하던 방신봉을 은퇴시키고 한양대학교에 재학 중인 윤봉우를 데려오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윤봉우 스카우트야 필요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수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은퇴를 종용받은 방신봉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일이 매끄럽지 않게 진행된 탓에 코칭스태프 등은 모두 매스컴의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블로커였던 방신봉은 그 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LIG손해보험, LIG그레이터스를 거쳐 지난 시즌에 KEPCO45에서도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노병은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년간 3위와 2위를 차지했다는 사실보다 팀 운영이 매끄럽지 않게 돌아가자 송만덕은 대학 감독 시절의 명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팀을 김호철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