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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병원에서 양·한방 공동 진료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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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병원에서 양·한방 공동 진료를 했다고?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7] 광제원 ⑤

광제원(이 글에서는 개칭 이전까지 포괄해서 사용한다)의 환자 진료 실적은 당시 신문 보도를 통해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황성신문>에 보도된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다른 신문들까지 조사하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도 병원에서 작성했을 진료기록부와 약품대장이 발견되면 병원 진료와 운영의 더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광제원은 1899년 6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7개월 동안 총 8191명, 한 달 평균 117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그 가운데 양약으로 치료받은 환자는 4755명(월 평균 679명), 한약 치료 환자는 3436명(월 평균 491명)으로 양약 치료 환자가 60% 가까이 되었다. 양방 및 한방 진료를 병행한 셈이었는데, 죄수 환자 진료를 보도한 기사들을 보면 한 의사가 양방과 한방을 겸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제6회).

ⓒ황성신문

직제상으로 한약소와 양약소가 구분된 1905년 2월 이후는 부서에 따라 한방과 양방 가운데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했는지, 궁금한 사항이다. 1906년 3월 부당하게 강제 퇴출당한 당시 한약소 소속의 한우(韓宇)는 그 이전에 양방 치료를 많이 했는데, 1905년 2월 이후에는 어땠을까? 또 광제원에서 많이 취급했던 전염병의 경우, 한방과 양방 분리 치료가 가능했을까? 소독과 같은 양방 방법은 한약소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굳이 한약소와 양약소를 분리했던 이유와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광제원에서 진료한 환자는 1900년에는 월평균 1368명, 1901년에는 1533명으로 계속 늘어났다. (진료 환자 실적에는 종두 시술 수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1902년 이후에는 <황성신문>에 진료 실적이 보이지 않는데 광제원이나 위생국에서 발표를 하지 않은 때문인지, 아니면 신문사에서 보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1900년부터 양방과 한방 치료를 받은 환자 수를 분리하여 보도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사립 혜중국은 관립병원 개원 이래 환자가 점차 줄어들어 결국 1899년 말쯤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혜중국을 이용한 환자 가운데 성별이 파악되는 경우는 남자 983명, 여자 526명으로 남자 환자가 3분의 2가량을 차지했다. 광제원의 남녀 환자 비율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관의 운영 상황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예산 액수와 내역을 검토하는 것이다. 당시 <관보>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광제원과 한성종두사의 예산은 다음과 같았다.


1899년 개원 첫해의 광제원 예산은 3000원이었다. 여기에 병원 건물(갑오개혁 때 혁파된 사간원(司諫院) 청사로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구입비와 수리비가 포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병원을 개원한 지 넉 달 남짓 지난 10월 정부는 병원비 1000원을 예비금에서 추가로 지출했다.

▲ 탁지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이 1899년 10월 25일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에게 제출한 <청의서>. 내부 소관 병원이 인민들의 위생에 유시유종한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병원비 1000원을 증액해 달라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그리고 이듬해에는 8424원으로 크게 증액되었으며, 1901년부터 1905년까지는 한성종두사 예산을 포함하여 1만 원을 조금 웃돌았다. 이것은 내부 전체 예산의 1.1~1.5%, 정부 총예산의 약 0.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형편상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정규 예산과는 별도로 1900년 11월 3일에는 광제원 구매·수리비 3200원을 예산 외로 지출했다. 이 비용은 광제원이 건춘문 앞에서 재동으로 이전하는 데 든 것이었다. 광제원이 새로 이전한 건물은 1885년부터 1886년 11월 무렵까지 제중원이 사용했던 곳으로 이 당시는 서상영(徐相永)의 소유였다.

"북서 재동 전 외아문상(上) 왜송(倭松)배이 집"(<황성신문> 1900년 10월 13일자 및 15-18일자, '근대 의료의 풍경' 제23회)은 서상영의 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새 광제원 건물이 서상영 소유 가옥이라는 사실은 이미 10여 년 전에 신동원(KAIST 교수)이 밝혔던 것인데, 필자는 그러한 사실을 그 동안 잊고 있었다.)

▲ 탁지부 대신 서리 김영준(金永準)이 1900년 10월 22일 의정부에 제출한 <청의서>. 이 청의서는 새 병원 건물 구입비 3000원, 물품 운반비 100원, 건물 수리비 100원 등 내부대신이 지출하여 달라는 3200원에 대해 의정부 회의에서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정부는 11월 3일자로 그 비용을 예산 외로 지출할 것을 결정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광제원은 10월 7일 재동 서상영(徐相永)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광제원이 새로 이사한 건물은 1885~1886년 제중원이 사용했던 곳으로 1900년에는 서상영의 소유였다. 1905년부터 법관양성소 교관(교수)을 지낸 서상영이 언제 어떻게 옛 제중원 건물을 구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프레시안
한편, 1906년 5월 31일에는 본 예산의 2배가 넘는 2만7805원이 "광제원 확장비" 조로 정부 예비금에서 지출되었다. 광제원 의장(醫長) 사사키(佐佐木四方志)가 법률적 근거도 없이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를 철폐하고 새로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를 설치하면서(제5회) 든 비용이었다. 이로써 광제원은 7년 동안 견지해 오던 양한방 병용 방식을 포기하고 근대서양식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번에는 광제원 예산을 세목별로 살펴보자. 광제원 예산은 봉급, 약품비, 환자 (식)비, 기타 비용(청사 유지비 및 잡급, 잡비)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봉급이 60%가량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약품비는 대략 10% 남짓, 환자 (식)비는 3~7%, 기타 비용은 20%를 조금 웃돌았다. 이렇게 예산의 대부분은 봉급과 운영비 등 경직성 항목에 지출되었고 환자 진료에 관련된 약품비와 환자 (식)비는 기껏해야 20%에 머물렀다. 액수로 말한다면 환자 1인당 10전(0.1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1907년에는 광제원 예산이 3만3000여 원으로 크게 늘어났는데, 증액분의 대부분은 외국인(일본인) 봉급이었다. 정부가 국가 예산으로 일본인 의사들의 생활을 뒷바라지 한다는 힐난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인 의사 채용에 대해 여론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제원은 대한의원으로 흡수, 폐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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