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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의 데자뷔, 정판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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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의 데자뷔,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5월 23일

1946년 5월 23일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 중 1946년 발행된 것은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둘이다. 정판사 사건 관계 기사를 훑어보기 위해 "정판사"를 검색했더니 <자유신문> 기사는 80개가량 나오는데, <동아일보> 기사는 넷뿐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번에는 "위폐"를 검색하니, <동아일보>에서도 <자유신문> 못지않게 많은 관계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문제는, <동아일보>에서 "정판사 사건"이란 말을 쓰지 않은 데 있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에 수록된 다른 신문도 모두 "정판사 사건"이란 말을 썼고 그 말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데, 유독 <동아일보>만은 이 말을 쓰지 않았다. "공당원(共黨員) 위폐 사건"이란 이름으로 이 사건을 지칭했다. 사건 초기부터 단 한 번도 "정판사 사건"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1945년 말 속간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성격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이다. 둘 다 '우익 신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심한 극단에 빠지지 않은 반면 <동아일보>는 한국민주당(한민당) 기관지 성격을 극성스럽게 보여줬다. 한민당이 뚜렷한 입장을 가진 사안에 대해서는 논설은 물론이고 기사에서도 <동아일보>가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 시기 <동아일보>를 자료로 활용하는 데는 극도의 조심이 필요하다.

<해방일기> 작업을 위해 '자료 대한민국사'를 주로 활용하고 있는데, 특정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려면 주요 기사만을 뽑아 입력한 '자료 대한민국사'로는 안 된다. 모든 기사가 PDF 형태로 제공되는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를 이용해야 한다. 정판사 사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의 편향성이 심하므로 <자유신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자유신문>은 5월 12일 우익 시위대의 습격으로 제일 심한 피해를 입었고 지금까지 통상 '좌익 신문'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 작업에 활용해 온 결과 나는 '중도 신문'으로 인정한다.

5월 15일 군정청 공보국의 발표로부터 11월 말 1차 판결 때까지 반년 동안 <자유신문>에서 70건 가까운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지난주에 나는 정판사 사건의 사실관계를 알지 못한다고 썼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신문> 관계 기사를 모두 훑어본 지금은 확신한다. 정판사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 한 마디를 위해 이번에 수고 좀 많이 했다. 이 점을 생각해서 지난 주 한 차례 연재 펑크를 독자들께서 용서해 주기 바란다.)

정판사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내가 판단하는 것은 천안함의 북한 책임설을 거짓으로 보는 것과 같은 기준이다. 북한 공격이 절대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설령 북한 측 공격이라 하더라도 한국 정부 조사단이 그 사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정판사에서 공산당이 조직적으로 위조지폐를 인쇄한 일이 절대 없었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경찰과 검찰은 그 사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판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공산당 탄압도, 천안함 침몰을 빌미로 한 북한 비난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행해진 것이며, 따라서 그 주장이 사실과 어긋난 것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고 상식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유신문> 기사들만 편집해 놓아도 볼 만한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재판 분위기와 쟁점을 잘 보여주는 기사 하나를 예시한다.

위폐 공판 제8일은 5일 오전에 이어 오후 1시 반 다시 속개되었는데, 심리 전 박낙종으로부터 언권 요구와 송언필의 언권 요구에 대하여 재판장으로부터 허락되지 않아 정내는 일시 소란하였다. 홍계훈에 대하여 공판정에서 진술한 조서 낭독이 있은 후 전번 심리에 묵묵부답한 정명환에 대한 심리로 들어갔는데 피고 정명환 역시 고문으로 허위 진술하였다고 대답하고 그 증거로 좌우편 발에 아직껏 남아있는 상처를 내보인 후 재판장으로 반증을 제시하라 한 데 대하여,

(피) 현재 재판소에서 가지고 있는 증거물은 우리가 위폐 인쇄하였다는 데 대한 무슨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잉크나 종이 같은 것은 어느 인쇄소에나 있는 것입니다. 자로서 반증할 것은,
1. 김창선, 홍계훈을 위시로 몇몇 피고는 금년 2월에 비로소 당원이 되었으니, 경찰에서 허위 진술한 위폐 인쇄 때는 일개 직공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중대한 일을 당에서 맡길 리가 없으며,
1. 2월에는 경비대가 주야겸행하여 경비하였으니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위폐 인쇄는 불능하며,
1. 위폐 인쇄에는 일류 기술자라야만 되는데 김창선이나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재) 현재 피고의 심경은?
(피) 억울한 생각이 북받치며 해방이 되면 3000만이 다 잘 살 줄 알았더니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철창에 갇혀 있으니 우리들의 희생으로 건국이 하루빨리 된다면 그야 희생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무고한 누명은 건국을 촉진한다는 것보다 도리어 지장이 될까 두렵습니다.
(…) 6일 오전 계속하여 개정된 공판은 오전 10시부터 피고 신광범의 심리를 개시하였는데 신광범 역시 재판장에게 팔다리의 도토리 밤만큼씩 한 경찰이 고문한 흔적을 내어 보이며 경찰에서 자백하였다는 조서는 전부가 나를 이 지경에 빠지게 하여 놓고 만든 허위 진술이라는 것을 말한 후,
1. 본건 기소 사실과 같이 200만 원을 하루저녁 8시간에 인쇄하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 압수한 지폐와 김창선에게서 빼앗은 원판은 대조하여 보아 같아야 할 것이며,
1. 내가 본 바 압수한 모조지와 위조지폐의 지질이 확실히 다릅니다.

("팔다리의 상처를 제시-고문당한 증거와 억울함을 진술", <자유신문> 1946년 9월 7일자)


검찰 측의 확실한 증거는 자백뿐이었다. 그런데 모든 피고가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고 공판정에서 주장했다. 10월 31일 공판에서 백석봉 변호사는 공판정에서 번복된 자백에 증거 능력이 없다는 요지의 변론을 폈다.

이번 위폐 사건은 관련된 인원이 많고, 시간이 6, 7개월에 걸치고, 위조 액수도 막대하다는 사건이니, 응당 수많은 증거가 있어야만 할 사건이 아무런 확고한 증거도 없이 유죄라 함은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사건에 있어 가장 유력한 증거로 삼는 것은 소위 피고들의 자백인데, 이 자백이란 것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1. 양심을 전제로 과거 범행을 후회할 때의 자백,
2. 피고가 아무리 부인하여도 유력한 증거가 있을 때,
3. 고문을 하여 없는 사실을 강제로 자백시켰을 때
로 구분될 줄 생각하는바, 대체 본 사건에 있어서는 제3항에 해당할 줄 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를 싸고도는 세론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며, 안순규의 위증죄에 대한 공판도 중대 문제라 생각한다.

피고 박낙종이 10월 24일부터 말일까지 남선 여행함을 검사 자신이 용인하는 바에야 10월 하순의 위폐 인쇄 사실은 허구로 돌아가며, 검사 기소 내용에 의하여 보면 10월에 인쇄한 것이 무사통과하였기로 12월과 2월에 연거푸 인쇄하였다 하니, 10월 인쇄가 허구로 돌아간 이상 12월과 2월 인쇄 역시 성립되지 않을 것이고, 안순규 증언 역시 당 공판정에서 목격 사실을 부인하였으니 문제도 안 되나 목격담이라는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결론을 말하면 본 사건은 법령의 제한된 기일을 초과하여 불법 감금을 하고 고문으로 자백시킨 것을 기소한 것은 완전히 위법이라 생각하므로 재판소로서는 공소 기각을 하여 주든지 무죄 판결을 나려주기 바란다.

("자백은 증거 될 수 없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1일자)


그러나 재판부는 고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근거는 두 명 의사의 감정 결과였다.

공판 중에 있는 공당원 위폐 사건 관계자와 피고들은 공판정에서 이구동성으로 경찰에서 고문을 했다는 사실을 진술한 바 있어, 양원일 재판장은 앞서 백인제 공병우 두 의사로 하여금 고문 사실 여부를 감정케 하였는데, 작3일 제출된 전기 양씨의 감정서에 의하면 아무런 고문을 하지 안하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되었다.

("'拷問'은 빨간 거짓말-의사의 감정 결과로 판명", <동아일보> 1946년 10월 5일자)


피고 전원이 공판정에서 고문을 호소하며 증언을 번복했지만 번복한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중 한 사람은 위증죄로 별도의 재판까지 받았다. 과연 의사의 감정이 '고문이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당대 최고의 의료인이던 두 사람이 "고문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감정서를 작성했으리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다. "고문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라면 몰라도. 아무튼 그런 감정서를 갖고 "고문은 빨간 거짓말" 제목을 뽑는 <동아일보>의 본색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27일자 "위폐 사건 피고 최후 진술" 기사 중 이관술의 진술 한 대목이 이 사건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공산당 고위 간부였던 이관술(1902~1950년)은 이 최후 진술 후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나로서는 현명한 검사가 이 비논리성을 모를 리 없을 줄 알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론에 도달한 검사의 심중을 알아주어야 하며, 그러한 논고를 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된 검사에게 도리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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