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누구이든 한 정치인의 철학과 통치 방식에 대해 무조건 지지하는 이들의 발언을 들으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옹호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번은 그나마 객관성을 띤 '~빠'라고 여긴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청소년들이 연예인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하라 했다. 부아가 나 성질을 부렸다. 정치가 연예계냐, 라고.
자신들이 지지하던 정치인이 유언처럼 자기를 극복하라 했건만 통치 시절의 실정마저 옹호하는 데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주목 대상이 된 정치인이 어떤 비전을 품고 정치를 하고 있는지, 그가 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부리는 묘수라는 것이 얼마나 속 들여다보이는 것인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옹호하는 것을 보면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우리에게는 왜 이토록 한 정치인에 대한 신념의 옹호자들이 많은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당혹스럽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빠'들과 나눈 대화가 늘 불쾌한 것은 그래서다. 특정 정치인을 옹호할 수는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정치 현실에서 실현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좌절하고 타협할 때 안타깝지만 그래도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대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면 비판해야 한다. 왜 그러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나라에 살면서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타협과 좌절이 없을 정치인이 있으리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정치인은 시대정신의 제도적 실현을 위한 매개일 뿐이다. '~빠'가 뜻밖에도 많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식이 근대화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북한의 개인 숭배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빠'들만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바는 아니다. 대화가 가끔 감정싸움으로 비화하면 스스로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에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고, 저들이 신념의 옹호자라면, 나는 베버가 말한 신념 윤리에 충실한 정치인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 반성한다.
▲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
"친애하는 청중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그때는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을, 나는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때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도-바라고 희망했던 것들 가운데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전혀 아무것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겠지만, 누가 봐도 거의 성취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될 개연성은 매우 크고, 그렇다고 그것이 나를 좌절시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를 안다는 것은 심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그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자신을 진정한 '신념 정치가'로 여기며 지금 이 혁명이 발산하는 열광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이 되어-내적 의미에서 무엇이 '되어'-있을지를 보고 싶다."
이 땅에서 1980년대라는 혁명과 열정의 시대를 지내본 사람으로서 베버의 말이 가슴을 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함부로 말하면, 신념에 차서 대중을 선동했던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변호사가 되거나 도인이 되거나 했을 따름이다. 국회의원 되면 뭐하나. 거수기로 전락하거나 비리에 연루되고 마니 말이다.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가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빠'를 비판하는 만큼이나, 나 자신은 지나치게 신념 윤리형이 아닌가 되짚고 싶어서다.
최장집이 해설 편에서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것도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다. 베버는 신념 윤리를 신념 원칙에 따라 하는 행동,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 그 책임을 행위자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자 타인들의 어리석음 또는 인간을 어리석도록 창조한 신의 뜻으로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최장집은 이를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도덕"이라 풀이하다. 도덕적 근본주의자를 떠올리면 된다. 이에 비해 책임 윤리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베버는 왜 정치인이 윤리를 구분했을까. 그 답은 아래에서 찾을 수 있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윤리적으로 위험한 수단과 부정적 결과를, 언제 그리고 어느 정도 정당화해줄 수 있는지를 지시할 수 있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나는 베버의 주장에 동의한다. "권력과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에 관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악마적 힘과 거래를 하게 되며, 그의 행위와 관련해 보면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법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동안 정치를 이념적 순결성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나 같은 이들에게 베버의 책은 정치를 냉정하게 직면하게 하고, 기대할 바가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하게 확정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내가 지지하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게도 강력한지지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정치는 타협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안타까워할 수는 있으나 전면 부정은 옳지 않다. 베버의 강연록을 읽으며 이리저리 정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다. 우리 정치의식은 어쩌면 베버가 말한 20세기 초 미국 노동자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 라고.
"15년 전에 미국 노동자들에게 왜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공공연히 경멸한다고 말하는 그런 정치가들이 당신들을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느냐? 라고 질문했다면 우리는 이런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 나라에서처럼 우리에게 침을 뱉는 관료 계급보다는 차라리 침을 뱉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관료로 갖기를 원한다."
우리 사회가 정치나 정치인 혐오증에 깊이 빠져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베버를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정치적 동물인 시민을 위한 정치교양서다. 분명히 정치를 위한 변명이긴 하지만, 당당히 변호하는 바도 있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베버를 넘어서야 할 대목은 있다. 투표 같은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때 우리는 모두 임시직 정치가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치와의 관계는 이 정도가 전부"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경험으로 보건대, 정치가 여기에 머물 때, 진보 가치의 제도화는 물 건너가고, 이것이 반복되면 시민의 정치 무관심은 더 깊어질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야 각성한 시민이 정치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최장집이 비판받는 것도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서 인 듯싶다.
이제는 내가 바라는 정치인상이 되어버린 베버의 말이 있다, 이런 정신으로 무장되지 않은 이들은 정치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치 말고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할 일은 널려 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11년 4월 29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7호에 하승우 한양대학교 연구교수의 같은 책(<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서평이 실렸습니다. (☞관련 기사 : 좋은 정치인? 민주주의가 뭔지부터 따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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