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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설가' 오웰의 <1984>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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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설가' 오웰의 <1984>는 틀렸다!

[프레시안 books]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

처음 한국에 조지 오웰은 '반공 작가'의 얼굴로 알려졌다. 냉전 체제의 반공주의를 국가적 사명으로 내걸었던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오웰의 작품은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도 반공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읽혔다.

이런 오웰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진 계기는 백남준이 1984년을 맞이하면서 준비한 <굿모닝 Mr. 오웰>이라는 퍼포먼스였다고 할 수 있다. 반공주의 일변도로 받아들여졌던 오웰에게 다른 면모가 있다는 사실이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통해 실낱같이 드러난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오웰의 비판이 제국주의를 포함한 국가-권력 일반에 대한 거부였다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한국 사회는 10여 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반공주의 작가로 선택적으로 수용되었던 그가 실상은 사회 정의에 민감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한 인물이라는 실상은 극적인 반전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웰의 전모가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이념 지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들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의 펭귄출판사에서 거의 잊혀져가던 이 작가의 에세이집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서 재출간하고, 2002년에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편집한 <오웰이 왜 문제인가>라는 학술서가 세상에 나오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다시 점화되었다.

오웰은 에릭 아서 블레어라는 이름으로 1903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교구 목사였지만, 자손들에게 재산을 거의 남겨주지 않았다. 19세기 교구 목사의 수입 규모를 생각한다면, 이례적인 일이다. 오웰은 이런 자신의 집안 배경을 "상중하층 계급"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줄곧 영국에서 교육 받고 자란 블레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오웰로 다시 태어난 곳은 이제 미얀마로 불리고 있는 버마였다. 버마는 프랑스계인 오웰의 어머니가 자란 나라이다. 외갓집이 있는 버마로 건너가서 한동안 하급 경찰관으로 일하는데, 이 경험이 그를 작가로 만든 자양분이었다.

버마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식민주의의 실상이었다. 버마에서 식민 지배의 국가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 겪은 생생한 경험을 녹여낸 에세이가 바로 '코끼리를 쏘다'이다. 이 글에서 오웰은 식민주의와 식민지 주체의 관계에 대한 선구적 고찰을 선보인다. 그의 정치화는 이런 식민지 경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남다른 사회적 경험을 통해 그는 당시로 본다면 파격적인 주장들을 쏟아낸다. 사회적 자유의 복리를 침해하는 전체주의적 상황을 지칭하는 '오웰리언'이라는 말에 담긴 메시지도 그 중 하나다. 그에게 개인은 군중과 국가라는 두 갈래 사이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거미줄 같은 존재였는데, 이와 같은 오웰 특유의 사고방식은 버마에서 관찰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 <숨 쉬러 나가다>(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오웰은 사르트르처럼 철학적인 에세이스트이자 동시에 작가이기도 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냉소적인 표현들을 내뱉던 이 지식인의 소설은 그러므로 에세이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숨 쉬러 나가다>(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도 마찬가지로 이런 작품 중 하나이다.

<동물농장>이나 <1984>와 같은 '장르' 소설의 작가로 오웰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이 소설은 위트 넘치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리얼리스트의 모습을 선사할 것이다. 오웰은 폐결핵 때문에 모로코에서 요양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서 오웰은 '현대성'이라고 불리는 위기의 세계와 일전을 벌인다. "머리 위로 폭격기 한 대가 저공비행"을 하고, 곳곳에서 전쟁을 몰고 오는 파시즘의 전조가 보이는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 소설을 짓누르고 있는 대공황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묘사들.

새빨간 카운터 뒤로 높고 하얀 주방 모자를 쓴 아가씨가 아이스박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 뒤 어디선가는 라디오가 투당탕탕 깡통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델 가는 거지?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생각했다. 내 기분을 처지게 만드는 분위기 같은 게 있는 곳인 것이다. 모든 게 매끈매끈하고 반짝반짝하고 유선형이다. 어딜 보나 거울이나 에나멜이나 크롬으로 마감되어 있으니 그렇다. 음식이 아니라 장식에만 공을 들인 것 같다. 음식은 물론 진짜배기가 아니다. 미국식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음미를 할 수도 없고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건지 믿기도 어려운 허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든 게 무슨 상자나 깡통에서 꺼내거나, 냉장고에서 내오거나, 꼭지에서 따르거나, 튜브에서 짜낸 것들이다. (39쪽)

완벽한 '인공'의 세계가 여기에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웰의 문장들은 대공황기에 횡행했던 아르데코 미학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 에나멜이나 크롬으로 재료를 마감한 장식은 이 시대를 풍미했던 미학을 대표한다. 오웰의 세계관은 이처럼 '진짜'를 가리는 장식성의 위선에 대한 혐오를 동반한다. 이와 같은 진술에서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루얼 톨킨과 유사한 '영국적인 것'의 소박성과 유사한 느낌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군중이 개인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우려도 노골적으로 소설에서 드러난다. 반파시즘 강연회에 참석한 주인공이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 냉담한 관찰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 모습에서 이런 오웰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반파시즘이라는 것도 괴이한 생업"이라는 말은 곧 이은 "히틀러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을 할까"라는 반문을 통해, 공허한 정치적 이분법에 대한 회의를 표현한다.

이런 오웰의 정치관은 유명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할 수가 있는데, 결코 자유의 실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잠깐의 일탈을 꿈꾸지만 여지없이 현실의 중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오웰은 '바른 소리'를 굽힘없이 낸 작가로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만큼 지금 현재가 '세계 없음'이라는 탈이념의 시대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그를 올곧은 이미지로 남겨 놓은 것은 '순수한 정치'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혐오한 것은 독재에 대한 두려움과 타협이었다.

이렇게 권력에 대해 비타협적이었던 오웰이 군사 독재 시절을 통과하던 한국에서 반공주의 작가로 수용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이와 같은 '한국적 수용'은 우연의 산물일까?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오웰이 주창했던 '정치적 글쓰기'의 한계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스피노자가 옳다면, 오웰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떤 국가나 체제도 개인을 완전하게 흡수하거나 포섭할 수 없다. 말하자면, 빅브라더는 불가능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웰이 <1984>를 쓸 때 명백하게 염두에 두었을 그 스탈린 체제의 붕괴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여러 모로 <숨 쉬러 나가다>는 오웰의 초기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과거를 향한 회귀를 꿈꾸지만, 결국 현실의 페넬로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웰에게 문학은 불가능한 일탈을 보여주는 것에 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종적으로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작업"으로 선회했을 테다.

이 소설은 그 중간 지점에 놓여서 방황하던 한 지식인의 영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한계는 명백하지만, 그의 시도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 여전히 절실한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를 되풀이 읽어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순수한 정치에 대한 그의 열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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