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병원장으로 임명된 최훈주가 의사로서 교육을 받거나 활동했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일(昨日)에 내부 위생국장과 주사들이 감옥서에 왕(往)하야 죄수를 검사하난대 (…) 전일 조석구 씨가 감옥서장으로 재(在)할 시에난 매일 옥중을 소쇄(掃灑)하야 거처가 청결하더니 근일은 죄수간(間)에 예물(穢物)이 퇴적하야 악취가 해비(觸鼻)하니 위생에 대단 유해할지라 위생국장 최훈주 씨가 간간(間間)이 검진하고 오예를 소독하얏다더라"(<황성신문> 1899년 4월 29일자)라는 기사를 보면 최훈주가 근대적 위생과 의료에 어느 정도 소양을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훈주는 병원장으로 임명받자마자 감옥서를 방문하여 실태를 점검하고 개선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 <고종실록> 1897년 12월 21일자. 내부 참서관 최훈주가 국왕에게 (국립)병원 설치를 진언했다는 기록이다. 이 상소가 있은 지 1년 4개월 뒤에 병원이 설립되었으며, 최훈주는 초대 병원장으로 임명받았다. 당시 국립병원 설립은 최훈주 개인의 소망이라기보다 민중들의 염원과 열망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의사로 임명받은 13명 가운데 이호형, 한우, 노상일을 제외한 10명이 일본인 의사 후루시로(古城梅溪)가 세운 종두의 양성소 제1기 및 제2기 졸업생이었으며, 서기 조동현 역시 양성소 제2기 출신이었다.
그러면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경력과 배경을 가졌을까? 우선 한우(韓宇)는 사립 혜중국(惠衆局)에서 2년이 넘게 의사로 활동하면서 제법 명성을 날렸지만, 교육 배경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과거(醫科)에 합격한 사실도 없다.
"병원 기사 김각현(김교각의 오기이거나 이명(異名)일 것이다) 씨와 의사 한우 씨가 감옥서에 진(進)하얏 검진한즉 죄수 총계가 239인인대 기중 병수(病囚) 안성화 등 24인은 창종(瘡腫)과 서증(暑症)이 유(有)하야 양약(洋藥)을 제급하고 김덕원 등 8인은 토사증과 제반 잡증이 유하야 본국약(本國藥)을 제급하얏다더라"(<황성신문> 1899년 8월 12일자)라는 기사(한우가 양약을 처방했다는 기록은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를 보면 한우가 일본인이나 서양인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양약 조제법과 근대 서양식 진료를 배웠을 것 같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달리 한의사와 의사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고 또 의료인 면허 제도 자체가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의 시각에 입각해서 한우와 같은 사람이 한의사였는지 (양)의사였는지 판단하려 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우가 근무했던 혜중국은 어떤 곳이었을까? 1896년 12월 무렵 "유지각한 여러 사람들이 가란한 사람이 병든 거슬 불샹히 넉여"(<독립신문> 1896년 12월 12일자) 설립한 혜중국(새문안 대궐, 즉 경희궁 흥화문 앞에 있었다)은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했던 병원이다. <독립신문> 1898년 6월 16일자에 의하면, 혜중국에서는 개원 이래 1년 반 동안 빈민 환자 2만4000여 명, 군인 2000여 명, 죄수 200여 명을 무상으로 진료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셈이었던 혜중국은 정부가 병원을 세우는 데 음으로 양으로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리고 혜중국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내부병원이 설립된 뒤로 환자가 줄어들어 1899년 말에 문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한우는 혜중국에서 2년 반, 내부병원/광제원에서 7년 가까이 간판 의사 격으로 (빈민) 환자 진료에 헌신했으며, 1902년 콜레라(恠症) 유행 시에는 피병준, 이규선(李圭璿) 등과 함께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우는 사사키가 광제원에 의장으로 들어온 직후인 1906년 3월 규정에도 없는 시험에 불합격했다 하여 강제 퇴출되었다.
이호형(李鎬瀅, 1853년 또는 1856년생)은 <관원이력서>에 따르면 "본국(本國) 의학"을 수업했으며, 1895년 4월 잠시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를 지낸 뒤 별다른 관직 경력이 없다가 내부병원 의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그 뒤 광제원 기사(技師)로 승진했고 1904년에는 태의원(太醫院)의 겸전의(兼典醫, 전의 다음 직급)로 임명되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의생(醫生) 면허(588번)를 받아 원산에서 활동했다. 이호형이 수학했다는 "본국 의학"은 한방을 뜻하겠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노상일(盧尙一) 역시 수학 경력을 알 수 없는데, 다음 기사를 보면 노상일은 어디서인가 양방 치료와 조제법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병원 의사 노상일 김교각 양씨가 감옥서에 왕(往)하야 검진한즉 죄수가 총계 237인이라 기중 김덕원 등 7인은 적리증(赤痢症, 이질)이 유하고 이봉선 등 10인은 외감(外感)과 잡증이 유하고 이향백 등 5인은 창질(瘡疾)이 유하고 장기보 등 4인은 습종(濕腫)이 유하기로 기 증(症)을 각수(各隨)하야 양약을 제급하고 최병근 등 6인은 풍화(風火)와 잡증이 유하기로 한약을 제급하얏다더라. (<황성신문> 1899년 6월 13일자)
이 기사에 의하면 죄수 237명 가운데 이질, 감기, 창질(매독의 뜻으로도 쓰였는데 여기서는 확실치 않다), 부종 등으로 양약 치료를 받은 환자가 26명, 한약 치료를 받은 환자가 6명이었다. 또한 <독립신문> 1899년 5월 16일자는 노상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군기시골(軍器寺골, 서울시청 뒷편) 사는 의원 노상일 씨가 일전에 내부병원 의사라 하는 새 벼슬을 하였는대 공동 사는 내부 시찰관 리재성 씨가 00에셔 000 셔로 맛나 말하되 집이 셔로 지척에 잇스니 잠간 자긔의 집에 오라고 쳥하엿더니 노 의샤가 과연 리 시찰의 집으로 가셔 셔로 보고 노 의사가 도라갈 때에 교군 고가(雇價) 12량(5월 19일자 기사에 8냥으로 정정)을 달나 하거늘 리 시찰이 말하야 갈아대 교군 고가가 무엇이뇨 한즉 노 의사의 대답이 의례히 물어내는 것이라 하고 고가를 밧아 갓다더라.
내부병원이 사간원(경복궁 건춘문 맞은 편) 자리에서 개원한 것은 6월 1일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보면 그 이전에도 왕진 진료는 하고 있었다. 또한 가마값(轎軍雇價)이 거리와 시간에 따라 달랐지만 가까운 거리도 8냥이었다. (당시 <황성신문>의 구독료가 한 달에 1냥. 1년에 11냥인 것에 비하면 결코 싸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일종의 왕진료(의사 수입은 아니었지만)라 할 가마값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병원 의사로 발령받은 종두의 양성소 출신 10명 가운데 선두 주자는 김교각(金敎珏)이었다. 4월 26일자 인사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했던 김교각은 6월 23일 병원의 2인자격인 기사(技師)로 승진했다. 원장과 기사를 겸했던 최훈주는 이때부터 원장직만 수행했다.
하지만 김교각은 8개월 남짓 뒤인 1900년 3월 3일 익명으로 투서했다 하여 내부병원 기사직에서 해임(免本官)되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사건에 앞서 1월 15일 태의원 겸전의 이준규(李峻奎)가 최훈주에 이어 제2대 병원장으로 임명받았다. 이준규는 의과에 합격한 적은 없지만 태의원에 근무했는데, 이런 근무 경력은 피병준(태의원의 전신인 내의원에서 침의로 10년가량 근무했다)을 제외하고는 내부병원 의사들과 다른 점이었다.
<황성신문> 보도에 의하면, 병원 의사들이 원장 이준규에게 능멸과 위협(凌脅)을 당했다고 내부대신, 협판, 위생국장에게 익명으로 투서한 문제로 내부는 3월 3일 관련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내부대신이 직접 대질 등을 통해 자초지종을 파악한 결과 기사 김교각과 의사 최광섭(崔光燮)이 투서자로 판명되어 두 사람을 해임했고, 이준규도 잘못이 있다 하여 15일 감봉(罰俸)에 처했다.
▲ <황성신문> 1900년 3월 5일자. 내부병원 기사 김교각과 의사 최광섭이 내부대신에게 익명으로 (병원장을 비방하는) 투서를 했다 하여 해임(면관)되었다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
그 뒤 5월 24일자로 김교각의 징계가 해제되었지만 다시 내부병원에서 근무하지 못했던 반면, 최광섭은 6월 23일 의사로 재차 발령을 받았다. (최광섭은 내부병원 의사로 임명되기 전, 회계원 주사 등으로 일했을 뿐 의료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이 사건의 전말과 의미를 알기는 어렵다. 이 사건은 단순히 김교각과 이준규 사이의 개인적 알력일 수 있다. 아니면 종두의 양성소 출신과 기존 한의사(典醫)들 사이의 세력 싸움과 갈등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례적으로, "병원 관제 개정" 및 <한성종두사 관제> 청의서가 제출된 지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그에 대해 결정이 난 것도(제5회)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광제원에서 종두 시술 기능을 떼어내어 별도로 한성종두사를 설치하고 며칠 지난 7월 9일 그에 따른 인사가 이루어졌다. 광제원의 의사로는 피병준, 한우, 이호영, 임준상, 이규선, 김병관(金炳觀, 사립 혜중국 의사), 이희복(李喜復) 등 7명, 제약사로는 이재봉(李在琫), 서기에는 조동현이 임명되었다. 이 가운데 종두의 양성소 출신은 피병준, 임준상, 조동현 등 3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한성종두사의 의사로는 이수일(李秀一), 김성배, 이호경, 유관희(劉觀熙), 성낙춘(成樂春) 등 5명, 서기에 이세용(李世容)이 임명되었다. 이수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었다.
이에 앞선 4월 12일 위생국장 최훈주가 고원 군수로 전임하였고, 그 대신 이준규의 상관이었던 전의 박준승(朴準承)이 위생국장에 임명되었다. 요컨대 전의 출신 이준규가 광제원의 실권을 장악하고,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들은 대부분 한성종두사로 전출되어 광제원에서는 힘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교각이 해임된 것은 광제원의 역학 관계에 변화가 나타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일련의 과정이 단순한 세력 싸움인지, 아니면 광제원의 성격, 나아가 전반적인 의료 정책을 둘러싼 노선 투쟁인지는 앞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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