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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월급이 판사 월급의 5분의 1! 그 때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5] 광제원 ③

1899년 4월 내부 소속으로 설립된 "병원"은 그 뒤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쳤다. 우선 병원의 명칭이 1년 2개월 뒤 "광제원(廣濟院)"으로 바뀌었다. 1900년 6월 30일에 반포된 칙령 제24호 <병원 관제 중 개정>에서는 보시원(普施院)으로 개칭하였다가 7월 9일 광제원으로 개부표(改付標, 원래의 결정을 원천 무효시키는 수정 방식)되었다. ((<병원 관제 중 개정>이 반포된 것은 청의서가 제출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6월 30일이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된 연유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병원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청의서>(1900년 5월 8일자)에 따르면, "병원"보다 "광제원"이 "질병을 치료하여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醫疾濟生)"는 기관 설립의 취지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당시 용법으로 "은혜를 널리 베푸는 곳"이라는 보시원은 광혜원(廣惠院)과 좀 더 가깝고, 광제원은 제중원(濟衆院)과 더욱 비슷한 의미를 갖는 표현일 것이다.

▲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가 의정부 의정 윤유선(尹容善)에게 제출한 <병원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청의서>(1900년 5월 8일자). 병원에서 함께 취급하던 종두에 관한 인원과 사무를, 신설하는 종두사(種痘司)로 이속(移屬)하게 되어 <병원 관제> 중에 개정할 어구가 많고, 병원이라는 칭호는 의질제생(醫疾濟生)한다는 본뜻에 미치지 못하므로 광제원으로 개정함이 타당하여 칙령안을 제출한다는 내용이다. "광제(廣濟)"라는 글자를 쓴 종이(개부표)를 덧붙였고, 그 종이 아래에는 "보시(普施)"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프레시안
1900년 6월 30일의 관제 개정으로 광제원은 종두 시술 기능과 관련 인원(종두 의사)을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로 넘긴 대신, 대방의 1명과 외과의 1명이 증원되어 일반 진료 기능은 약간 확충되었다.

1905년 2월 26일 <광제원 관제>가 다시 개정되어, 광제원은 종두 시술 기능을 회복하였으며 의사 5명, 제약사 1명, 서기 1명, 기수(技手) 2명 등 인원도 많이 늘어났다. 또한 한약소(韓藥所), 양약소(洋藥所), 종두소 등 역할에 따라 부서가 설치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체로 "한약"을 한자로 "韓藥"이라고 썼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韓藥"이라는 표현은 거의 사라지고 "漢藥"이 재등장했다. 이처럼 일제는 철두철미하게 민족적인 것을 말살하려 했다.)

그 뒤로 관제 개정은 없었지만 광제원에는 더욱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06년 초 직제에도 없는 의장(醫長)으로 광제원에 발을 들여놓은 사사키 시호지(佐佐木四方志)는 역시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이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를 철폐하고 새로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를 설치한 뒤 일본인 의사들을 각과의 책임자로 선임하는 한편 한국인 의사들을 축출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는 과정의 축소판이었다.

의학교는 1907년 3월 <대한의원 관제> 제정으로 소멸될 때까지 자주성을 잘 지켰던 데에 반해서 광제원은 그보다 1년가량 앞서 이미 사실상의 식민지 의료 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 종묘와 창덕궁 등 동쪽 궁궐을 야간에 순찰하는 임무를 담당했던 옛 좌순청(左巡廳) 청사를 개조하여 사용했다. 지금 지하철 종로3가역 11번 출구 근처에 있었다. 1908년 4월경부터는 한성위생회 청결 사무소로 쓰였다. (경복궁 등 서쪽 궁궐을 담당한 우순청은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전(紀念碑殿) 자리에 있었으며, 1898년부터 1902년까지 황성신문사 사옥으로 쓰였다.) ⓒ프레시안


조금 화제를 바꾸어, 대한제국 시기에 국립병원 의사들의 경제적, 사회적 처지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1899년 8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35호로 <관립병원 관등 봉급령>을 제정, 공포했다. <병원 관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장과 기사의 관등은 주임(奏任), 의사 약제사 서기는 판임(判任)이었으며 관등과 급봉(給俸)에 따른 봉급 액수는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관립 각종 학교 교관, 교원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즉 병원장과 기사는 의학교의 주임교관과 같은 대우를 했으며, 의사 약제사 서기는 의학교의 판임교관 또는 보통학교 등의 교원과 같은 대우를 했다.

▲ <관립병원 관등 봉급령>(<관보> 1899년 8월 28일자). ⓒ프레시안

이렇듯 의사에 대한 대우는 교관(교수), 교원에 대한 것과 거의 같았다. 그러면 의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전문직인 판사, 검사와 비교하면 어땠을까? 한마디로 관등에서도 큰 차이가 났거니와 봉급액도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병원장의 봉급은 재판장의 5분의 1가량이었으며, 기껏 판사시보(試補)나 검사시보와 비슷한 정도였다. 이로 보아 당시 의사 직은 입신출세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의사의 봉급이 법관에 비해서는 훨씬 적었지만 다른 직업과 비교하면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농부(農部) 소속 인쇄소의 사무원과 공장(工匠)의 월급은 12원, 고용인은 5원, 견습공은 8원이었으며, 우체부는 7원이었다. 군인의 월급은 대령(正領) 106원, 대위(正尉) 46원, 소위(參尉) 28원으로 장교는 의사와 엇비슷했지만 하사관(正校)은 9원, 사병(兵卒)은 3원에 불과했다. (당시는 개병제(皆兵制)가 아니었으므로 병졸도 "직업 군인"이었다.)

또한 1899년 4월 15일에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 전문 일간지인 <상무총보(商務總報)>의 주필 월급은 20원이 안 되었다. (서재필이 주한 일본 변리공사 가토(加藤增雄)에게 넘겨 준 자료에 의하면, 독립신문은 재정 상황이 좋았는지 주필 서재필은 월 150원(중추원 고문 월급 300원은 별도), 언문(한글) 담당 조필(助筆, 주시경이었을 것이다)은 월 50원을 받았다.) 당시 <관보> 1년 구독료는 6원이었으며 쌀 한말 값은 1원~1.6원이었다.

오늘날은 어떨까? "2011년도 공무원 봉급표"를 보면 월봉(본봉)으로 국립대학 교원은 33호봉이 447만3400원, 1호봉이 159만8400원이고, 초·중등학교 교원의 경우는 40호봉이 408만5600원, 1호봉이 124만3700원이며, 대법원장은 894만900원, 대법관 633만2700원, 일반법관 17호봉 632만3400원, 1호봉 240만9900원이다. 국·공립병원 직원들의 봉급에 관해서는 별도로 발표된 자료가 없지만 국립대학 교원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을 것이다.

100년 전에 비하면 법관과 국·공립병원 의사의 봉급 차이는 많이 줄어든 셈이다. 100년 전과 지금, 어느 쪽이 나은 세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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