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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구 영웅들…세월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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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구 영웅들…세월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교체 ①

우리나라에서 프로 배구가 시작된 지 7년이 지났습니다. 2010~2011 시즌을 제외하면 여섯 번에 걸친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 팀은 삼성화재 블루팡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뿐이었습니다. 삼성화재 블루팡스가 네 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두 번 우승을 차지했지요.

어느 시즌이나 여러 팀이 우승을 목표로 할 텐데 매년 이 두 팀이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다 보니 팬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선수가 들어오고, 새로운 지도자가 팀을 맡는다 해도 또 그 두 팀이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곤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시즌 개막과 더불어 대한항공 점보스가 선두로 나서더니 2위와의 게임차를 크게 벌리며 25승 5패로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문성민과 헥터 소토를 영입하며 4년 만에 우승을 노리던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는 정규 리그에서 22승 8패를 기록하며 2위에 머물렀고, 만년 우승 후보인 삼성화재 블루팡스도 16승 14패라는 평범한 성적으로 3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삼성화재 블루팡스였습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에 한 경기를 내 주며 2대 1로 승리를 거두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에 3대 0,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대한항공 점보스에 4대 0으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가빈이 혼자 경기를 이끌다시피 하는 바람에 삼성화재가 아닌 가빈화재가 우승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으며, 아주 우수한 선수 한 명이 프로 배구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이 바람직한가를 놓고 토론도 있었지만 삼성화재 블루팡스는 이로써 프로 배구 일곱 시즌 중 다섯 번째로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지 못한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는 시즌이 끝난 후 감독 교체를 단행했습니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초대 감독 김호철

▲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총감독 김호철. ⓒ뉴시스
프로 배구 일곱 시즌을 보내는 동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를 이끈 감독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세터라 할 수 있는 김호철입니다. 요즈음으로는 보기 드문 작은 키를 한 배구 선수였지만 세터로서의 김호철의 능력은 은퇴 후 강산이 두 번도 더 지난 지금까지 아직 그 뒤를 따를 만한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할 당시 남자 배구팀도 구기 종목 대표 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선에서 뛴 김호철은 본선에서 뛸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 사정이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이라 본선에서 어느 정도의 입상 가능성이 없다면 지역 예선을 통과했다 해도 외화 낭비를 막기 위해 본선에 보내지 않는 것이 그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1970년대 중반에 경제 사정이 전보다 나아져 말이 많던 남자 배구팀의 본선 출전이 확정되었을 때 키 작고 나이어린 김호철은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2년 후, 한국 남자 배구에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능성 있는 젊은 선수들이 출현하면서 세대교체를 단행한 것이 빛을 본 것입니다. 이미 국가 대표 선수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이인과 강만수, 차세대 거포로 이름을 날리던 강두태, 고등학생으로 대표 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장윤창, 문용관, 유중탁 등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1978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아무도 생각 못한 성과를 이룬 것입니다.

그 때 이룬 세계 4위는 대한민국 배구 역사에 전설로 남은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감히 12명의 대표 팀 엔트리에 들어가는 걸 꿈꾸기 힘들지만 이 때 참가한 3명중 장윤창은 고등학생이 주전 공격수로 뛰었고, 문용관과 유중탁도 대학 시절에 대표 팀 주전 자리를 꿰 찼으며, 이들의 활약은 그 후로 유병종, 신대영, 노진수, 하종화 등 여러 고등학생들이 대표 팀에서 선배들과 함께 태극기를 달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계 4위를 달성한 대표 팀은 그 해 아시안게임 우승, 이듬해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대회 우승 등 짧은 시기에 굵직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록 센터가 약한 것이 흠이긴 했지만 강만수, 강두태, 장윤창 등의 공격수들에게 볼을 배급하는 세터로 활약한 김호철은 1978년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 때부터 이탈리아 프로팀의 입단 제의를 받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이탈리아 프로팀 파르마에 입단하여 이탈리아 리그 우승은 물론 유럽 리그 우승을 달성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1985년부터 현대 아마추어 배구팀에서 약 3년간 선수로 활약하며 대학과 실업이 함께 참여하던 대통령배 배구 대회(프로 리그가 생기기 전 대학과 실업이 함께 참여하여 겨울에 개최되던 가장 큰 대회는 대통령배, 배구 대제전 등 여러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본 글에서는 대통령배 배구 대회로 통일합니다)에서 3년 연속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우승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후 자신이 선수로 활약한 이탈리아 파르마를 비롯하여 1부와 2부 리그 4개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2003년 겨울 시즌부터 현대의 감독을 맡았고, 프로 배구가 시작된 후 일곱 시즌 동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으로 2회의 우승, 4회의 준우승을 이루었습니다. 그동안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우승을 차지하는 등 선수와 감독으로 성공적인 길을 걸은 김호철 감독이지만 올해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3위에 그치고 만 것이 감독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마추어 현대 배구팀의 탄생과 창단 감독 송만기

아마추어 배구팀인 현대자동차서비스(현대)는 1983년에 창단되었습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이 1988년에 개최될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자 한국 스포츠계에는 엄청나게 활동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순탄치 못하게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 정부는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에 집중시키려는 듯이 여러 정책을 마련했고, 이 와중에 프로 야구 시작(1982년), 프로 축구 시작(1983년) 등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계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올림픽 유치라는 아무도 예상 못한 성과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 현대 정주영 회장은 그로부터 수년간 각종 스포츠 팀을 창단하면서 스포츠 분위기를 띄우는데 일조를 했고, 대한체육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유지되어 온 실업팀이라고는 금성(LIG손해보험의 전신), 한국전력(KEPCO45의 전신)이 전부(종합화학은 후에 해체됨)였고, 군 팀인 상무를 합쳐 3개 팀밖에 없던 상태였으므로 오늘날 핸드볼 선수들이 그런 것처럼 몇몇 우수 선수들은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배구계에 서울시청 창단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자 배구계에 1983년 시작과 더불어 현대와 고려증권, 두 팀이 동시에 창단되는 경사가 일어났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선수들의 진로가 3팀에서 6팀으로 두 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1978년에 고등학교 배구를 주름잡은 인창고등학교의 장윤창과 인하사대부속고등학교의 문용관, 유중탁은 각각 경기대학교와 인하대학교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동시에 창단 작업에 들어간 현대와 고려증권은 우수 선수를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렸고, 고려증권은 장윤창, 유중탁, 김인옥 등 대학 출신의 국가 대표 선수를, 현대는 이탈리아에서 활약 중인 이인, 아랍에미리트에서 뛰고 있던 강만수를 각각 코치와 트레이너로 스카우트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활약 중인 차주현과 현대 9인제 배구팀의 주공격수이던 박형용(현 대표 선수인 KEPCO 45 박준범의 부친), 인하대학교를 졸업하는 국가 대표 문용관 등의 현역 선수를 모아 팀을 구성했습니다. 창단 첫 해에 5개 대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이룬 현대의 창단 감독은 30대 초반의 송만기였습니다.

요즈음이라면 한창 선수로 뛸 나이에 감독에 오른 그는 자신과 또래라고도 할 수 있는 이인, 강만수 등과 팀을 만들어 첫 해부터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1983년 겨울부터 대통령배 배구 대회가 시작되면서 현대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으며, 두 조로 나뉘어져 개최된 대회에서 양강 체제를 이룬 고려증권과 함께 8전 전승으로 예선을 마쳤습니다.

현대는 반대 조 2위인 경기대학교를, 고려증권은 반대 조 2위인 금성을 물리치고 결승에서 대격돌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준결승에서 뜻하지 않게 경기대학교에 일격을 당했습니다. 첫 대통령배의 우승을 고려증권에 넘긴 것이 현대로서는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예상을 깨고 현대를 물리치는 사고를 친 경기대학교에는 이세호, 이종경, 이채언 등의 유망주들이 있었고, 이들이 합류한 후 3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이 대회 베스트 6에 선정된 세터는 경기대학교의 신영철이었으며, 후에 한국전력에 입단합니다). 현대에 창단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2년에 그만두기까지 약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감독을 역임한 그는 그 후 대한배구협회에서 여러 직책을 맡기도 하고, 여자 프로 배구 팀의 감독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2007년 58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송만기 감독이 팀을 떠난 이유는?

1983년에 창단된 현대는 첫 해 5관왕을 차지하는 등 매 시즌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면 가장 중요한 대회라 할 수 있는 대통령배 대회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입니다.

1983-1984년에 개최된 첫 대통령배에서 준결승 탈락의 한을 품은 현대는 이듬해 우승을 노렸으나 최천식이 이끄는 인하대학교에 일격을 당하며 또 한 번 고려증권에 우승을 내 주고 말았습니다. 1985년 대통령배를 앞두고 선수이자 트레이너 강만수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1년 앞서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세터 김호철과 2년 전 현대의 우승을 가로막은 경기대 트리오가 모두 합류함으로써 그로부터 3년간 최강의 위치를 구가했습니다.

1980년대 최고의 맞수라 할 수 있는 고려증권은 창단 멤버 외에 정의탁, 이경석, 이재필 등이 가세하면서 1988-1989, 1989-1990 시즌에 현대를 물리치고 다시 정상에 오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1980년대 초부터 고려증권이 해체되기까지 약 15년간 이 둘이 벌인 라이벌전은 배구 열기를 달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대통령배 대회에서 보여 준 현대의 성적이었습니다. 시즌 내내 타 팀들을 압도할 만한 성적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1985-1986 시즌부터 3연패를 한 후 1988-1989, 1989-1990 시즌에서 연속해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자 1990-1991 대통령배를 앞두고 감독 교체라는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감독 교체가 성적 향상에 만능은 아니겠지만 그동안 현대가 배구팀에 쏟은 투자를 생각한다면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도 때가 된 듯한 느낌을 주기는 했습니다.

세 번의 기회를 놓친 이인 감독

1990-1991 시즌을 앞두고 송만기의 뒤를 이어 현대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사람은 이인이었습니다. 1983년에 창단된 현대에서 약 6년간 코치를 지낸 후 약 2년간 팀을 떠났다가 잠시 코치 생활을 한 그는 송만기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에 올랐습니다.

1978년 세계 4강의 위업을 달성한 한국 남자 배구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한 후 이탈리아에서의 선수 생활을 거쳐 현대의 창단 코치이자 선수로 활약한 그는 1980년대 초에 국가 대표 팀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선수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작은 것이 강만수, 강두태, 장윤창과 같은 좌우 공격수들에 비해 큰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이인이 감독에 취임한 시기는 한국 남자 배구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던 때였습니다. 1970년대의 최강자 금성은 1983년 이후 정상에 서지 못했지만 당시 최고의 거포라 할 수 있는 이상열을 영입하면서 호시탐탐 현대와 고려증권을 위협하고 있었고, 초창기를 장식한 이인, 강만수, 김호철, 차주현 등을 내보낸 현대는 이종경, 이채언이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으면서 전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고려증권도 장윤창, 유중탁, 김상권 등의 창단 멤버가 노쇠기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90-1991년 대통령배 배구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이인, 강만수, 김호철, 차주현을 모두 외국으로 떠나보낸 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금성은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한국 배구를 짊어질 것으로 기대된 이상열과 서남원, 최영준, 강호인 등을 영입하면서 우승을 노리고 있었고, 이종경, 이채언 등의 부상이 우려되기는 하지만 노진수, 마낙길, 김동천, 이명학, 신대영, 남상선 등의 젊은 선수로 물갈이를 끝낸 현대도 유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게다가 지난 2년간 우승을 차지한 고려증권도 유력한 우승 후보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비록 대학 배구 64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기는 했지만 국가 대표 선수들이 즐비한 실업배구와 마주했을 때 얼마나 실력을 발휘할지 예상하기 쉽지 않던 한양대학교는 시즌 시작과 더불어 파죽지세로 실업 선배들을 압도해 나갔습니다. 1986년에 고등학교 1학년으로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아시아 청소년 배구 대회에서 우승할 때와 1987년 바레인에서 개최된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 당시 후배이면서 보조 공격수로 마낙길, 서남원, 박삼룡, 김은석 등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 주었음은 물론 체격 조건에서 이들 선배들보다 장점이 있어서 일치감치 제2의 강만수라는 이름을 들으며, 이미 국가 대표로도 선발된 바 있는 하종화는 3년 전 대통령배 대회에서 신인상을 차지한 후 어느 새 국가 대표의 주전 자리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진주 동명고등학교 시절부터 항상 하종화와 이름을 함께 달고 다닌 윤종일도 이미 국가 대표 선수로 성장했고, 역시 1987년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 멤버인 장재원 세터에 왼쪽 공격수 문양훈과 2년 전 대통령배 신인왕 출신의 강성형까지 실업팀에 결코 뒤지지 않는 멤버를 구성하기는 했지만 한양대학교의 돌풍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결과적으로 한양대학교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금성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한양대의 졸업반 4인방 하종화, 윤종일, 문양훈, 장재원은 그 해 실업팀 스카우트의 첫 표적이 되었습니다. 주전 선수들의 줄 부상으로 신음하던 현대는 1년 전에 한양대를 졸업한 강호인을 금성에 빼앗기기는 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한양대학교 선수들을 독식한 연고를 내세워 금성과의 스카우트 전쟁 끝에 이들 4명 모두를 스카우트하면서 1991-1992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1년 전 대통령배를 주름잡은 4명의 신인에 마낙길, 양진웅, 이명학, 제희경 등의 국가 대표 출신들이 포진한 현대는 입대한 노진수와 신대영의 맹활약 속에 오욱환, 이재필 등이 신영철의 토스를 받아 마구 터뜨리는 불꽃 강타를 막지 못하고 또 우승을 내 주고 말았습니다.

친정팀을 궁지에 몰아넣은 노진수는 아직 제대를 하지 않았지만 국가 대표 출신 강성형과 박종찬이 입단한 현대는 1992-1993년 시즌에도 유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고려증권이었습니다. 장윤창, 유중탁, 이경석, 박삼룡, 이재필로 이어지는 고려증권의 주전 멤버는 틈새 없는 톱니바퀴 그 자체였습니다. 타 팀을 압도할 만한 강력한 무기는 없었지만 삼성화재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잘 짜인 수비를 보여 준 팀이 바로 고려증권이었으며, 이 전통은 3년 후 고려증권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금성, 고려증권과 비교할 때 엄청난 물량공세를 쏟아 부었지만 세 번에 걸친 기회를 살리지 못하자 2대 감독 이인도 팀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스카우트전에서는 다른 팀을 압도할 만한 승리를 했지만 노진수가 잠시 팀을 떠난 사이 수비력에서만큼은 그를 따를 수 없었던 공격진들은 더 수비가 강한 팀을 만날 때마다 고비를 넘지 못한 것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원인이었습니다. 스카우트전에서의 승리가 곧 성적 향상으로 이어주지 못한 상태에서 현대는 이제 새로운 감독을 찾아야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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