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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없이 얼굴을 쪼개는 작업, 가장 인간적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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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없이 얼굴을 쪼개는 작업, 가장 인간적인 예술!

[철학자의 서재] 자크 오몽의 <영화 속의 얼굴>

영화, 그 가장 인간적인 예술에 대해서

불면증에 잠 못 이루는 한 사내가 택시를 몰고 뉴욕 시내를 누빈다. 카메라가 피곤에 찌든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밤마다 뉴욕의 밤거리를 헤매는 택시 운전기사 트래비스의 눈빛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트래비스의 공허한 눈빛을 따라 관객도 뉴욕 뒷골목의 어두운 인간 군상들과 마주한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1976년)는 택시 운전기사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가 어두운 뉴욕 거리에서 마주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을 직접 처벌하는 심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래비스가 섬뜩한 눈빛으로 백미러를 통해 손님을 쳐다보는 순간, 관객은 마치 트래비스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이 되는 것만 같다.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도 여전히 트래비스의 광기 어린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왜 관객은 트래비스의 눈빛을 두려워하는가? 관객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사람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인가? 아니면 택시 기사 트래비스인가? 도대체 영화가 무엇이기에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뒤흔들어놓는가? 더 본질적으로 영화란 무엇인가?

마셜 매클루언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현실 세계를 필름에 감았다가 다시 풀어내는 환상의 요술 양탄자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또 하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끔 우리는 이 기계적 세계 속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영화 속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속 주인공이 울면, 우리도 울고, 그가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차가운 기계 속에서 재탄생되는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영화학에 국한될 수 없다. 영화는 인문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본질이 규명되어야만 한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지각적 현상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심리학으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또 질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사유 즉,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사유의 결정체이다. 그래서 훌륭한 영화감독은 위대한 예술가이자 사상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학자 자크 오몽은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영화 미학>에서 영화를 하나의 예술적 메시지로 간주한다.

▲ <영화 속의 얼굴>(자크 오몽 지음, 김호영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물론 영화는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측면 또는 기술적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화의 본질은 미를 표현하고 생산해내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자크 오몽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영화가 예술 장르에 속한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예술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또한 영화의 미학적 가치는 적어도 회화나 사진과는 다른 것이어야만 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저서 <영화 속의 얼굴>(김호영 옮김, 마음산책 펴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형상, 그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형상인 얼굴을 예찬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은 회화나 연극에 있어서도 중요한 예술적 요소로 작용하지만, 특히 영화에서 얼굴은 보다 효과적으로 인간을 재현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크 오몽이 말했듯이, 이 책은 단순히 얼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영화가 어떻게 인간의 얼굴을 재현해냈으며, 이러한 영화 속 얼굴의 재현과 파괴가 어떻게 영화를 인본주의 예술로서 자리매김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얼굴의 역사 : 얼굴의 재현과 파괴

영화에서 얼굴은 곧 인간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표현은 인간의 얼굴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재현된 얼굴을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자크 오몽은 이러한 영화 속 얼굴의 역사가 근대와 탈근대를 경계 짓는 사상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가 얼굴의 구성 시대였다면, 탈근대는 다양한 기법을 통한 얼굴의 해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얼굴의 해체는 인간성에 대한 파괴가 아니다. 오히려 근대에 정형화된 모든 얼굴의 표준과 정형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얼굴의 해체는 곧 "더 이상 하나의 얼굴로 재현하기를 원치 않는 얼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얼굴은 곧 새로운 얼굴이자 또 다른 얼굴의 창조이기도 하다.

얼굴에 대한 본격적인 형상화는 그리스 시대에 '재현'이라는 개념과 함께 시작된다. 즉, 그리스 시대에 얼굴은 곧 죽은 자의 인격을 대신하는 것이자, 죽은 자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때 얼굴의 이미지는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신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얼굴의 재현은 곧 인간 개인의 재현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의 모든 회화나 연극에 있어서 얼굴은 바로 인격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표현한다. 이처럼 근대의 가장 인간적인 얼굴은 곧 영혼의 감정과 몸짓의 이미지이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얼굴 이미지는 이제 종말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얼굴에 대한 거부나 파괴가 아니다. 오히려 얼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잠시 내 얼굴을 거울에 가만히 비춰보자. 거울에 반사된 빛의 방향에 따라, 또는 내 시선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보이는 내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크 오몽이 인용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은 20세기 얼굴의 위상을 잘 표현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얼굴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의 이미지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에 따라 더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19세기 사진기의 등장은 회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얼굴을 재현한다. 회화에서 인간의 얼굴이 화가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면, 사진술에 의해 포착된 얼굴은 사진기라는 아주 객관적이고 차가운 매체에 의해서 재현된다. 이때부터 얼굴은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현을 복제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물론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사진의 기술적 복제가 전통적 예술 작품이 가졌던 일회적 현존성 즉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기의 등장은 적어도 초상화가 가졌던 목적 즉, 얼굴을 통한 인간의 심오한 가치를 재현하는 작업을 충실히 이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진보다 더 현실감 있고, 생생하게 얼굴을 재현할 수 있었던 영화는 그렇지가 못했다.

초창기 영화는 인간의 얼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연의 풍경들이나 아니면 허구적 세계가 영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영화에서 얼굴이 어떤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영화에 있어서 얼굴은 본질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화에 배우가 등장하는 한, 배우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그 배우의 얼굴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영화에 있어서도 얼굴은 언제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인간의 얼굴이 곧 영혼의 현현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이때, 우리는 영화 속에서 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얼굴 뒤에 은밀하게 숨겨진 영혼을 본다. 예컨대, 영화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1962년)에서의 나나(안나 카리나)의 눈물 가득한 눈망울과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1928년)의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눈물 사이에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강렬한 만남이 있었다.

이 두 영화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여배우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그녀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영혼의 슬픔이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감정 속에서 나나의 영혼과 잔 다르크의 영혼이 교차한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바로 베르그송이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크 오몽에 의하면, 이 두 여인의 얼굴은 마치 한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말을 건네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영혼이 교차한다.

그리고 몇몇 영화감독들은 이 감정이 넘쳐흐르는 영혼에의 찬가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적어도 배우의 얼굴은 "영혼의 진정한 창문"과도 같았다. 그런데 정말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면, 과연 영화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영화 속 얼굴이 언제나 영혼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은 영혼의 숨결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주 차가운 그저 하나의 덧씌워진 가면과도 같았다. 영화는 이 가면과도 같은 얼굴을 구현해내기 위해서 배우의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거나, 형체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니면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에서 얼굴은 단지 화면을 메우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다.

이 잔혹하리만치 비-인간적인 얼굴의 상실과 파괴에서 영혼은 이제 사라지고, 그 텅 빈 자리를 은폐하려고 하는 가면만이 남았다. 이처럼 영화 속 얼굴 이미지는 가장 숭고한 가치를 현현해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속물적이고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기꺼이 얼굴을 희생하기도 했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얼굴을 표현하든지 간에, 영화 속 얼굴은 '이중적'이다. 배우는 자기 자신을 재현함과 동시에 타인을 재현한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광기어린 트래비스나 <미션(The Mission)>(1986년)의 신부 멘도자는 모두 배우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을 통해서 탄생된 인물들이다.

이처럼 얼굴은 '배우'와 '인물'을 동시에 재현하는 하나의 외양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배우는 끊임없이 자기 분열을 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영화 속에서 때로는 잔혹한 킬러로, 때로는 순박한 시골 청년으로 재탄생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얼굴 속에 내재된 다양한 존재들을 일깨워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우의 역할이다. 그래서 자크 오몽이 인용한 르네 베르자벨의 말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배우에게) 주문하는 것은 연기하지 말고, 살아내라는 것이다. 카메라는 일종의 냉혹한 굴착기다. 그것은 찡그린 얼굴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가면들을 깨트리며, 인간을 찾아 좀 더 깊숙이 파내려간다. (…) 배우의 재능이란 바로 그의 인간적 실체가 지니는 자질이다." (르네 베르자벨)

배우는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인물로 창조되고, 그에 따라 카메라는 그 배우의 얼굴 속 또 다른 얼굴을 찾아내기 위해 사정없이 얼굴을 파헤치고, 쪼개고, 다시 조립한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영화 속 얼굴이 배우의 얼굴인지, 아니면 등장인물의 얼굴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배우는 사라지고, 그 배우 속 얼굴로부터 또 다른 얼굴이 관객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보는 얼굴은 트래비스의 얼굴이지, 더 이상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이 아니다.

배우와 관객을 연결하는 제3의 눈 : 카메라

영화 <싸이코(Psycho)>(1960년)의 유명한 샤워 장면은 카메라가 배우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교감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샤워실 안에서 씻고 있는 마리온(자넷 리)에게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누군가가 커튼을 젖히고 칼을 번쩍 든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은 마리온의 시선도 아니고, 살인자의 시선도 아닌 제3의 눈 즉, 관객의 시선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비명을 지르면서 마리온이 난도질당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살인자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카메라는 죽어가는 마리온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마치 살인자가 그녀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듯이 말이다. 이처럼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고, 관객의 시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도 한다.

배우는 언제나 카메라의 비-인간적인 시선에 노출되어야만 한다. 배우는 관객을 대상으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앞에 두고 연기를 한다. 이것이 바로 연극배우와 영화배우의 차이이다. 연극배우가 관객과의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 영화배우는 언제나 카메라 앞에서 혼자 연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러한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벤야민에 따르면, 관객은 그들이 카메라와 일치감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배우와도 일치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칭하는 영화를 비-인간적인 기계를 통해서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예술이며, 그 중에서도 '얼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영화가 급기야 얼굴을 상실, 포기, 해체의 효과로 표현할 때조차도 놓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얼굴 뒤에 놓여있는 영혼의 아우라였다.

영화는 그것이 구성의 방식이든 해체의 방식이든 간에 언제나 인간의 얼굴 속에 영혼을 담아내고, 얼굴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매체였다. 영화 <작은 병정(Le Petit Soldat)>(1960년)에서 브뤼노 포레스티에(미셸 쉬보르)가 말했듯이, 영화 속 얼굴을 촬영하는 것은 곧 얼굴 뒤에 있는 영혼을 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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