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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지구 종말? 믿을 건 수많은 '끼익끼익'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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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지구 종말? 믿을 건 수많은 '끼익끼익'뿐!

[이명현의 '사이홀릭'] 배명훈의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

끼익끼익, 빼고닥빼고닥, 아요아요, 스작스작, 쯔이익쯔이익, 트닥트닥, 꾸아읍꾸아읍, 차나나차나나, 사브낙사브낙, 쿠글쿠글, 더름더름, 히나히나.

이게 다 뭐냐고?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끼익끼익'들의 이름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어린이 도서관에 같이 가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같이 누워서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처음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짧게 정리해서 들려주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궁여지책으로 내가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서 해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좀 커서 혼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같이 어린이 도서관에 다녔다.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3학년 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여느 토요일처럼 우리는 사직동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에 갔다. 오전 내내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우리는 언제나처럼 도서관 근처에 있는 (토요일마다 찾아가던 단골) 돈까스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골라온 책들과 내가 골라온 책들을 뒤섞어서 쌓아놓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서 책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늘 만화책 서너 권을 포함해서 열권 정도를 골라오곤 했다. 나는 주로 그림이 많은 책 두세 권을 찾아오곤 했다. 그 때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아이의 엄마가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넌 이걸 책이라고 골라온 거야? 전부 만화책이잖아. 이 녀석을 그냥 확."

그러면서 아이가 골라온 열 권 남짓 되는 책을 휙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언뜻 보니 만화책은 두세 권밖에 없어보였다. 아직 유치원생처럼 보였던 가여운 아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씩씩거리면서 일어나서 가버리더니 잠시 후 열 권 남짓한 책들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물론 만화책은 한권도 없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만났던 많은 엄마들은 (그리고 아빠들은) 아이들에게 자상했지만 이런 무서운 엄마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그때 딸아이가 움찔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두려움과 놀람과 분노가 섞인 그런 눈빛이었다.

"아빠도 만화책 싫어해? 나 혼낼거야?"

그 목소리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날 도서관 뜰로 나가서 커피와 음료수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을 직접 고르는 어려움과 재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이에게 책을 고르는 재미를 누릴 권리를 절대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읽기 싫은 책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위인전이 지겹고 싫다고 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했고 그런 건 읽지 말자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를 몰아붙이는 엄마에 대해서 열심히 성토를 했다. 그러면서 딸아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읽은 책들을 서로에게 권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들의 어린이 도서관 나들이는 차차 없어졌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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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배명훈 지음, 이병량 그림, 킨더주니어 펴냄). ⓒ킨더주니어
오랜만에 딸아이와 함께 배명훈의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이병량 그림, 킨더주니어 펴냄)를 읽었다. 이 책은 물건에 붙어서 이런저런 소리를 대신 내주는 소리의 요정 같은 온갖 '끼익끼익'들에 대해서 아빠가 둘째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재되고 있는 SF 동화다.

끼익끼익, 빼고닥빼고닥, 아요아요, 스작스작, 쯔이익쯔이익, 트닥트닥, 꾸아읍꾸아읍, 차나나차나나, 사브낙사브낙, 쿠글쿠글, 더름더름, 히나히나. 그런데 온갖 소리를 대신 내주던 이런 끼익끼익들이 어느 날 사라져 버렸고 이 책의 화자인 아빠는 갑자기 사라진 끼익끼익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이 관리하는 전파 망원경과 할아버지가 제공해 준 인공위성을 사용해서 온갖 노력을 하게 된다. 아빠는 자신만이 끼익끼익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남달랐다.

하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첫째 딸도 끼익끼익들과는 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빠는 첫째 딸 미성이와 함께 드디어 끼익끼익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온 힘을 모아 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구에 충돌할 기세로 다가오던 혜성이 있었는데, 지구의 끼익끼익들과 태양과 혜성의 끼익끼익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소리를 냈고 혜성은 다행히 쪼개지면서 지구를 스쳐지나가게 되었다. 끼익끼익들은 이 중대한 임무를 마치고 원래 자신들이 있던 사물 옆으로 돌아갔다.

'끼익끼익의 임무는 말이지, 사물들을 대신해서 외쳐 주는 일이래.' 배명훈 작가가 이렇게 적어 놓지 않았어도 책을 펼친 순간부터 나는 누구의 끼익끼익일까, 나의 끼익끼익은 또 누구일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었다.

"끼익끼익의 가장 중대한 임무는 곁에 머물러 주는 거니까."

이렇게 이 책이 마무리될 줄 처음부터 느꼈다. 좀 시시했다. 하지만 익살스러운 소리들에 대한 묘사와 차분한 아빠의 속삭임은 재미있었고 거기에 공감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림도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예뻤다.

딸아이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자신이 엄마의 끼익끼익이 되어 곁에 있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엄마 아빠 그리고 오빠가 자기의 끼익끼익이었는데 그 소리를 잘 듣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이젠 자기가 그 끼익끼익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도 아내와 아이들의 끼익끼익이 되어야겠다, 그러면서 책을 읽었다. 영원히 곁에 머물러 줄께, 하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끼익끼익 중에서 '꾸아읍꾸아읍'에 특히 눈길이 갔다. '배고파요!' 하고 외치는 끼익끼익인데 제일 귀엽고 소리도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도 이 녀석이 제일 맘에 든다고 했다. 우리는 같이 꾸아읍꾸아읍, 하면서 소리도 내보았다. 끼익끼익, 빼고닥빼고닥, 아요아요, 스작스작, 쯔이익쯔이익, 트닥트닥, 꾸아읍꾸아읍, 차나나차나나, 사브낙사브낙, 쿠글쿠글, 더름더름, 히나히나. 잊고 지내던 소리를 찾아낸 배명훈의 관찰이 돋보인다.

딸아이는 또 이 책에서 아빠만 끼익끼익과 대회를 하는 줄 알았다가 첫째 딸인 미성이도 끼익끼익과 말을 나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온 세상에 자신만 알고 있고 남들은 무심한 경우가 많고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수많은 끼익끼익들이 곁에 있었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덜 외로운 생각이 든단다.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이 있고 그 연결을 끼익끼익들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자신들만의 끼익끼익을 갖고 있고 자각을 하고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럴 수 없는 한계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큰 벽을 절감하는 세월이라 그런지 이 책의 그 대목에서 오히려 더 외로워졌다.

딸아이의 조잘거림은 이 책의 이야기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주제로 확대되면서 계속 이어졌다. 전파 망원경이 등장하니 아빠 하는 일 생각이 난다고도 했고 느닷없이 자신의 진로 문제로 고민이 많다고도 했다. 졸음이 그 아이의 눈꺼풀과 입을 함께 닫아버릴 때까지 딸아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한 아이의 수다를 이끌어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는 멋진 책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이야기와 이병량의 예쁜 그림까지 있고.

딸아이는 이 책의 가장 멋진 장면으로 달이 높이 떠 있는 들판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이 책의 맨 끝부분을 꼽았다. '끼익끼익의 가장 중대한 임무는 곁에 머물러 주는 거니까.'라는 멘트가 돋보이는.

나는 지구상의 모든 끼익끼익들이 모여서 태양과 혜성의 끼익끼익들과 함께 큰 노래를 만들어내는 장면이 제일 인상 깊었다.

"그래, 그건 기적이었어. 아슬아슬한 순간에 일어난 기적. 사흘 동안 계속되던 우주의 노래가 마침내 정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지."

"마침내 노래가 절정에 이르고 그 모든 소리들이 완전한 화음으로 어우러지는 순간이 되자 히나히나가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높였어.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높은 음들이 전파망원경을 통해 오는 게 보였어."

"일단 혜성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히나히나는 계속해서 그 틈새를 파고들었어. 그러자 히나히나가 이끄는 대로 모두의 노래가 그 좁은 틈을 향해 모여들더니, 곧 단 하나의 소리만 남기고 모두 사라지더라고. 없어진 게 아니라 하나로 모인 거지. 모두가 똑같은 음을 내고 있었거든. 그렇게 모인 소리 하나가 마침내 얼음덩어리 혜성을 뚫고 지나갔어. 가늘고 끝이 뽀쪽한 얼음송곳처럼. 가까이에서 들었으면 분명 뭔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을걸. 그게 바로 혜성이 지구 대기권에 닿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어."

그렇게 혜성은 지구를 비껴갔고 그들은 살아남았고 끼익끼익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문득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 음악을 통해서 외계인과 지구인이 소통하던 장면과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내 가슴 속의 감흥이 다시금 떠올랐다. 김경주 시인의 시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중 한 구절이 입안에 맴돈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모두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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