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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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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책 vs 책] '유럽식 복지 국가'를 넘어서

이 글은 '프레시안 books' 30호(2011년 3월 11일), 31호(2011년 3월 18일)에 실린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과 안성열 플래닛 대표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놓고 한 차례씩 주고받은 논쟁에 대한 논평입니다.

(☞관련 기사 : 엄기호(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 안성열(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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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엄기호는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의 '건국 신화'를 거론하면서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질서가 서서히 퇴조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성장의 결과를 공정하게 배분하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의 재구성이다.

마치 코난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듯이,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엄기호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그는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과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26쪽)는 결론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은 전폭적이고 강렬한 비판에 대해 반론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플레닛 대표 안성열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등재되어 있는 책을 직접 옹호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엄기호의 서평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더 따져 묻기로 결정했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을 꺼내든 것이다. 우리는 그 옹호와 반박의 내용을 "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니 주트의 책, 그리고 20대 비명문대 학생들의 목소리를 엄기호가 담아낸 책을 전장(戰場)으로 삼아,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엄기호는 본인의 서평의 목적은 사회주의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화살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러한 엄기호의 입장에 대해 안성열은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대응 방식이기도 하다.

어떤 정형화된 대립 구도를 가진 논쟁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논쟁에 참여하는 양자 모두 이미 충분히 검증된 '정답'과 '오답'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처럼, 둘 다 옳고 동시에 둘 다 틀린 추상적인 원리가 충돌할 때, 우리의 지성은 갈 곳을 잃고 표류하고 만다. 이렇게 굳어버린 논쟁들의 역사는 비극으로, 희극으로,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부조리극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한 권, 혹은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서평의 대상이 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있고, 또 안성열이 끄집어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도 함께 논의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전장에서 펼쳐지는 같은 싸움이다. 하지만 그 지리적 특수성과 보편성에 힘입어 우리는 이 싸움의 갈피를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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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를 '오독'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테지만, 그가 특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 가능하다. 엄기호의 사회민주주의 비판이 이미 거의 완전한 형태로 토니 주트의 논의 속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토니 주트가 무분별하게 68 세대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토니 주트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엄기호의 비판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책을 펼치자마자 우선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19쪽, 즉 서문의 페이지가 고작 세 장 넘어간 지점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 때문이다.

"요컨대, 강력한 국가와 개입주의적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 (19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는 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최종적인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선택지' 중 하나로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뉘앙스와 함께) 긍정한다. 하지만 그 역시 엄기호가 말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현재의 언어적/정치적 질서를 뛰어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답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기라도 해야 해답을 찾을 것 아닌가? 우리는 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방법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하는 방법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바람직한 목표와 용납할 수 없는 수단을 우리 선배들보다는 더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156쪽)

토니 주트에 대한 엄기호의 비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안성열이 지적한 바와 같이 토니 주트는 68 세대의 일원으로 성장하였고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적이 자유주의적 정책 내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급진적 선택을 지지하려는 투표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146쪽)고 비판하는 것은, "실제로 독일의 젊은 급진주의자 세대를 숨 막히게 만들고 그들을 "제도권 정치 바깥"으로 몰려가게 만든 것은 교육 정책부터 시작해서 외교, 공중 여가 정책 그리고 불미스런 과거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두 정당의 정책적 유사성"(58쪽) 때문이었다는 문제의식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책의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해답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즉 보수주의 정당과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아닌 저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토니 주트의 이 책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가 공정하다고, 혹은 편향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토니 주트 역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해야 한다면서,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는 이유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적극적인 독해, 능동적인 해석, 창조적인 서평이 요구된다. 왜 이 죽어가는 역사학자는 자신이 비판한 체제를 그 체제의 쌍생아의 해법으로 인정하고 권유할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엄기호는 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가 그 자체와 씨름하는 대신,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으로 그것을 끌고 들어가 버렸다. 안성열의 반론은 바로 그러한 선택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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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뿐 아니라, 어떤 것이건 이미 만들어진 이율배반적 논쟁의 구도가 도입되면 그 순간 실제 논의 자체는 급격하게 소외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고 비판하고, 논쟁의 핵심이 되는 텍스트에 대해서도 꼼꼼한 독해를 하지 않고 내지른다.

먼저 안성열의 비판을 펼쳐보자. 그는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대의를 오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안성열에 따르면 엄기호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토니 주트의 책에 따르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엄기호가 '나라'라는 단어로 작은따옴표를 이용해 지시한 것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권력 집단인 정부 혹은 국가가 아니다.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책에서 읽어내는 '나라'는 곧 사회이면서 공동체이며 삶의 형식 혹은 양태를 뜻하는 것이다.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


엄기호의 서평에서, 안성열이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아래에 "이때의 나라란 (…)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직접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안성열은 엄기호가 '개인 대 국가'의 대립쌍 중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단정 짓고 그것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독해는 독자뿐 아니라 토니 주트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토니 주트 본인이 "근대적 삶을 진정으로 구별 짓게 하는 것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다. 더 정확히 말해 19세기에 기원을 둔 부르주아 사회 혹은 시민 사회"(216쪽)라면서 그 시민 사회의 상징물인 철도를 논하고, "마거릿 대처가 절대로 열차를 타지 않으려 하지 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217쪽)라고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길 때, 우리는 엄기호에 대한 안성열의 비판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조정 기구인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개인들은 공공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토니 주트의 논점이며 그 지점까지는 엄기호 역시 동의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그 참여의 형태가 무엇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토니 주트는 문제도 많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검증된 바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한다. 반면 엄기호는 '좋은 옛 것'보다는 '위험한 새 것'을 선택한다. 양자 모두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안성열이 엄기호의 서평을 불성실하게 읽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그것 역시 불성실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대체 왜 이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오독이 강한 확신과 함께 등장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그 이유를 이 글의 도입에서 제시했다. 엄기호와 안성열 모두 다시 한 번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필자의 지적 능력이나 성실성이 아니라, 애초에 그 구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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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한국의 담론 지형에서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인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제도권 내에서 수행되는 것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던 요소들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고전적인 주제들, 가령 지역 갈등이나 노동 문제 등보다도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젠더, 정체성 문제, 문화적인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주제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68 혁명 이후 이른바 '신좌파'의 도래와는 무관하게, 사실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일차적으로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배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안성열의 표현을 빌자면 "생존"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해로울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러므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도구인 국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으며, 그것을 위한 실천 과정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정치'의 일부로 거론되는 현상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환영하지 않는다.

이것은 간략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개별적인 사람, 집단,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움직임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어찌되었건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도가 실제의 논의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종의 '가족 유사성'을 지니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서로 합의되지 않은 채 개별적인 화자의 사고방식을 지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 참여자들은 비슷한 듯하지만 서로 소통될 수 없는 각자의 방언을 이야기하며 평행선을 긋게 된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엄기호가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내놓은 서술을 살펴보자. 그는 젊은이들이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가?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91쪽)

엄기호에게 청년들이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같은 책, 93쪽)하는 것은 결코 탈정치화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정치를 도덕화한 기존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같은 구절을 읽은 후 안성열은 엄기호가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에 오락적인 요소들을 '정치'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을 놓고 엄기호는 젊은이들이 오락을 통해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안성열은 기존의 '정치'가 오락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당연히 논의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상대방을 '무책임한 사회주의자', '고리타분한 사회민주주의자'로 간주하며 흐지부지되어가는 논쟁을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두 사람이 시쳇말로 '병림픽'을 벌이고 있다는 식의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라는 형이상학적 구도가 정치적인 판단과 논쟁에 도입되면서 야기하는 막대한 혼돈에 대해 기술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무서운 이유는,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특정한 형태로 추출되어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의 머릿속에 있는 구도는 각자의 방식으로 전부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질적인 논의를 방해하고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처럼 해결될 수 없는 논쟁으로 정치적 논의가 빨려 들어가고 실종되어버리는 현상들을 '정치의 철학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의 철학화'로 우리는 지난 시대에 만연했던 빨갱이 사냥을 떠올릴 수 있다. 냉전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또 고속 성장에 걸 맞는 공정한 분배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들을, '빨갱이냐 아니냐' 혹은 '공산주의자냐 민주주의자냐' 같은 유사 철학적 구도가 권력의 총칼을 빌어 휩쓸어버린 그것들 말이다.

무상 급식 논쟁, 복지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공짜 밥을 주는 것은 공산주의, 빨갱이다'라는 선언이 등장하는 순간 교육과 복지와 우리의 다음 세대를 둘러싼 정치적 결단은 모두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철학화'된다. 올바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힘의 논리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의 논쟁 구도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중권은 합당론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을 한껏 조롱하지만,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조기숙이 트위터로 "당신의 주장은 국민의 명령과 같다"고 말하자 히스테리컬하게 반발한다. 그는 진보신당 잔류파들 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의 아우라를 가지고 싶지만, 그것을 국민의 명령과 같은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정치 운동에 빼앗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뺀 모든 정당들이 합쳐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표는 진중권과 조기숙 혹은 문성근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각자의 속내와 셈법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을 규정한 채 몰아세우며, 자신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민주주의자'의 스탠스를 점유한 채,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화' 되어버린 정치 속에서는 더 이상의 이성적, 상식적 논의가 불가능하다. 토니 주트의 책을 둘러싼 두 서평자의 논쟁 역시 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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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정치의 철학화'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막연한 질문에 대한 해답 혹은 그 실마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토니 주트의 책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토니 주트에 따르면 68 혁명과 신보수주의 운동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98쪽)이라는 서술을 곱씹어보자.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토니 주트는 신좌파 운동이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문장은 '신좌파=네오콘'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는 두 집단이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차라리 그 시대의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1960년대의 집산주의적 복지국가에 대해 반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중산층 시민단체들은 공격적이고 무차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철거 사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90쪽)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스웨덴에서도 공영 주택, 사회 복지, 그리고 공공 의료 정책에 수반되는 무지막지한 획일성"(90쪽)이 젊은이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신좌파 운동이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허물어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망명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이 시카고 대학과 관련된 영미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뒤바꿔버린다. 신보수주의 운동, 이른바 네오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니 주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말하자면 70년대 중반부터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04쪽)

보수주의자들은 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장을 정치와 경제가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 돌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토니 주트는 설명한다. 그러나 신보수주의는 단지 철학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향후 30여 년을 지배하는 정치 담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토니 주트 혹은 그의 대변인으로서의 안성열은 68 혁명이 이루어낸 '철학의 정치화'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점유 등과는 무관하게,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를 당해도 경찰이 묵인하지 않는 세상이 온 이유는 신좌파적인 철학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치화하였기 때문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동성애자들이 언젠가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인류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라는 사회적 압박을 뿌리치고 여성이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수녀 혹은 여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모습은 '가족'의 가치를 부르짖던 신보수주의자들이 원하던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는 1960년대부터 일어난 지적 움직임이 정치의 영역에 반영된 결과물이다.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그 변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민영화가 공적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는 무심결에 내뱉는 새로운 정책 언어에서 빈번히 확인된다. 오늘날 영국의 고등 교육계에서 시장을 메타포로 사용하지 않는 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의 학장과 학과장들은 누군가가 이룬 과업의 질을 판단할 때 '산출량(output)'과 '영향(impact)'을 평가하라고 강요받는다. 영국의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독점 산업들을 포기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애쓰면서 '공급자가 다양화되었다'고 둘러댄다. 2008년 6월 영국 노동연금부 장관은 사회 복지 사업의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복지 전달의 최적화'라는 말로 묘사했다. (122~123쪽)

그렇다면 신좌파 운동은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다. "Ill Fares The Land"라는 제목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번역되는 것만 보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가 없이는 새로운 정치를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제목은 18세기 아일랜드의 시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질병이 퍼지고 죽어가는 대지 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과 쌓여가는 시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굳이 한국어로 옮기자면 '죽어가는 대지에서' 정도가 될 수 있겠지만, 출판사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저 시구는 한국어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로 제목을 붙인, 하지만 본문에서는 신좌파를 비판하는 책을 읽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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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끝없는 논쟁'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하거나 유용한 행동일까? 그러한 논쟁의 구도를 도입하거나 끼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나는 이미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논의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 그 자체가 있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토니 주트의 '결론'은 사회민주주의이지만, 그의 논의 구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긴 서평의 결론을 대신하여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토니 주트의 논리 구조가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쪽에 더욱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앞서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그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정치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에 선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결론으로 내세우지만,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는 그의 열정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둘째, 신좌파 혹은 네오콘들과 마찬가지로 토니 주트 역시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사유 체계를 바꾸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언어란 프로파간다 정도의 중요성만을 지닌다는 것, 혹은 언어를 통한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을 논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어법이 '공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토니 주트의 무게 추는 (한국의 논의 구도 속에서) 사회주의 쪽으로 쏠린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 전례들이 있다. 구체제가 비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던 정치 무대는 저항 운동의 현장도, 그 저항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던 국가 기구도 아니었다. 중요한 변화는 언어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인들과 팸플릿 작가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행정가나 성직자들과 함께 정의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구체제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어휘들은 민중 행동의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절대주의 군주정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인 권위의 원천들을 상정함으로써 절대 군주정의 정당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은 근대 정치학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언어적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는 이미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그 언어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표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174~175쪽)


셋째,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논의되는 맥락은, 토니 주트의 논의를 빌려온 후 적용하자면, 일종의 신식민지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될 여지가 크다. 이것은 그동안 엄기호와 안성열의 논의에서 등장하지 않은 것이므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소개되어야 한다.

68 혁명은 당시까지의 사회주의적 요구와는 달리 '집산주의'(collectivism)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접근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95쪽)였던 것이다. 그 결과 60년대의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로 탈바꿈하였고, 공동의 이해관계가 아닌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같은 곳)이 정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좌파 스스로가 속해 있던 국가, 즉 이른바 '선진국' 내에서의 사정일 뿐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타자'들을 향해서는 여전히 집산주의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토니 주트는 그 점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신좌파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집단적 속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곳에서 신좌파들은 '빈농', '탈식민', '소외 계층(subaltern)' 등과 같은 불명료한 사회적 범주 아래 모여들었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96쪽)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한국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이중적 시각과 얼마나 다른가? 과연 2011년의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일까? 정체성의 정치, 언어적 갈등, 대변되지 못해왔고 대변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혹은 그러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철모르는 공상적인 사회주의 동호회 놀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상공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시각, 혹은 저 유럽의 어느 먼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변방의 민주적 발전 단계를 내다보는 그런 시각의 산물이 아닐까?

환경주의, 여성주의, 젠더의 정치학, 투표율 50%가 말해주는 대의민주주의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소외, 이른바 '다문화 가정' 및 그 자녀들의 정체성 갈등이 불러올 예견되는 파국, 즉 도농 갈등이 인종 갈등으로, 지방민에 대한 수도권 거주자들의 차별 의식이 가장 지저분한 형태의 인종 차별로 드러날 가능성에 대한 경계 등 그 모든 것을,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명제 하나로 덮어버리려는 시각은, 토니 주트가 비판한 '68 혁명' 만큼이나 무책임할 뿐더러 오만하며, 일종의 자기 소외 혹은 자기 멸시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이다. '우리 주제에' 무슨 정체성 타령이야, 사회민주주의만 해도 감지덕지지. 이렇게 볼 때, 토니 주트의 사유를 통해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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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나나 다른 엄기호 혹은 안성열이 내릴 수 있는 것도, 또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한 권의 책이 제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들을 더욱 더 세심하게 읽고 대담하게 해석하여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책을 놓고 논쟁을 벌인 엄기호, 안성열의 논의를, 나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언어뿐이라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윤리적인 행위는 오직 경청하는 것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나올 가능성도 비로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모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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