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80년대 렙토스피라증도 처음에는 농촌 괴질로 불렸다. 1981년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에이즈(AIDS)도 처음에는 괴질 또는 '게이 병'으로 통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SARS)도 처음에는 괴질과 비정형 폐렴으로 불렸다. 이들 전염병들은 전파 경로가 알려지고 병원체가 밝혀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제 이름을 찾았다.
공중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의 정도는 질병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괴질로 불릴 때, 그리고 그 질병이 치명적이어서 사망률이 높을 때, 적절한 치료법이 없을 때,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감염되는지를 모를 때 인간의 두려움은 최고조에 이른다.
대한민국에 다시 괴질 공포가 불어 닥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5월 10일 35살의 임산부가 의사들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신종 폐질환으로 숨졌다는 소식, 그동안 이와 유사한 환자들이 임산부와 어린이들에게서 여럿 발생했다는 뉴스는 공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이고 공포를 느낄 요소를 가득 안고 있다.
▲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SARS)을 일으키는 사스 바이러스를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한 모습. 사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특히 그 정확한 원인을 몰라 괴질 또는 비정형 폐렴으로 불렸을 때 공중의 두려움이 가장 컸다. ⓒ프레시안 |
우리가 전염병의 역사에서 배워 잘 알고 있듯이, 괴질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그 질병이 많은 사람에게서 유행하고 있다. 특히 사망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상당수의 감염자 또는 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한다.
20세기 후반 지구촌을 강타했고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에이즈의 경우도 괴질로 불리며 수면 위로 떠오른 때는 1981년 미국에서였다. 하지만 역학자와 전염병 학자들이 그 기원을 추적한 결과 이미 1960년대부터 환자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물밑에서 그 수를 불려나가던 환자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비로소 전염병, 그것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전염병은 괴질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공중의 공포는 오래 간다. 에이즈는 그 정확한 병원체를 찾아내는데 3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이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확산될 대로 확산됐다. 이 때문에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공중은 게이들과 이 질병에 걸린 환자들에 대해 차별하고 낙인을 찍는 등 비이성적인 행동과 행태를 보였다. 흑사병 환자와 한센병(나병) 환자에 대해 사람들이 학대하고 차별한 과거의 역사는 첨단 과학, 첨단 의학이 자리 잡은 현대 들어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재현되고 있다.
우리 언론은 이 괴질에 대해 공중이 공포를 느끼게끔 하는 보도 경쟁에 이미 들어갔다.
"이 병에 걸린 환자 6명이 집중 치료를 받고 있는 서울의 한 대형 병원에서는 지난 4~5년 동안 서른 명 가량의 어린이 환자가 같은 증상으로 숨졌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서울의 또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올해 들어서만 11명이 같은 증상으로 치료를 받았고, 현재 4명이 입원 치료 중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는 15개월 안팎의 영아 여러 명이 입원 치료를 받고 있고, 이 가운데 2건은 질병관리본부에 정식으로 신고가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이 신종 폐 질환이 지금까지 8명의 환자만 발견됐다는 보건 당국의 발표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와 관련해 보건 당국은 전국 40개 대학병원에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있는지를 파악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질병은 처음에는 감기같이 시작되지만 손 쓸 새도 없이 한두 달 만에 급격히 악화되는 무서운 질병으로 알려졌다. 감기는 계절에 관계없이, 그리고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워낙 흔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괴질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그리고 공중이 만약 공포를 느낄 경우 감기 증세만 나타나도 너나 할 것 없이 대학병원과 같은 대형 병원을 찾아다닐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공중의 두려움을 부채질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방송은 "불과 한 달 만에 중증 폐렴처럼 발전했고 기존 폐 질환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섬유화가 진행되면서 폐 세포까지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결국 폐 이식을 받지 않으면 한두 달 사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질환인 겁니다" 하고 다루었다. 또 한 신문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대형 병원에서 4~5년 전부터 비슷한 증상으로 소아 환자 30여 명이 숨졌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정체불명 괴질의 파장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질병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요소에는 과학이 잘 모른다는 것(괴질) 외에도 치명률, 환자들의 외관 상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들이 과거 한센병이나 매독, 에이즈에 대해 공포를 느꼈던 이유는 환자의 살이 뜯겨져 나가고 얼굴이 일그러지며 온 몸에 시커먼 반점 또는 종양이 생기거나 몸이 말라 미라처럼 되는 모습 때문이었다.
▲ 말기 에이즈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카포시 육종의 모습. 환자의 온몸에 흉측스런 모습의 증상이 나타나는 전염병은 특히 공중의 공포심을 높인다. ⓒ프레시안 |
대한감염학회 이사장인 서울대 오명돈 감염내과 교수는 신종 폐 질환 환자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전염병이 공기로 전파되는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공기 전파 질환이 아니라면 아직 적절한 치료법이 없다고 해도 그 전파 속도가 빠르지 않아 환자 발생수가 적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건 당국은 현재 환자들에게서 검체를 채취해 벌이고 있는 조직 검사와 DNA 검사 결과가 8주쯤 뒤에나 나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사이 환자 수나 사망자 수가 늘어날 경우 사스 초기와 신종플루 초기 때 겪었던 언론의 과잉 보도와 공포 키우기가 국민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필요 이상으로 키울 위험성이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 자제와 전염병 전문가와 역학 전문가, 그리고 괴질 정체에 대한 보건 당국의 신속한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 정부 당국, 특히 질병관리본부는 이 질환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라도 하루빨리 괴질이 아닌 질병의 적절한 이름을 임시로 붙여주는 것이 좋다.
또 정체모를 병이 유행할 때, 그 와중에 공중이 막연한 공포를 느낄 때 언론과는 어떻게 위험 소통을 해야 하고 공중과는 어떤 내용으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을 갖추어 실행해야 할 것이다.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전문가 회의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한 대국민 소통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정부 당국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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