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병원에 각양 약료와 의사를 치(置)하야 인민의 질병을 구추(救瘳)할 사
제2조 진찰하는 시간은 오전 8시로 12시까지 내원하는 병인을 진찰하고 오후 2시로 4시에는 청요(請要)하는 병가(病家)에 허거(許去)호되 단 병이 급하면 시한(時限)을 물구(勿拘)할 사
이 병원에서는 외래(外來) 진료와 왕진(往診)의 두 가지 방법으로 환자들을 진료했다. (전염병 환자를 진료하는 피병원 외에 입원 환자에 대한 조항은 없다.) 즉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는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왕진을 요청하는 환자들을 그 집으로 찾아가 진료하는 방식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그리고 병이 위급한 경우에는 어느 때이든 왕진을 가도록 했다.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던 당시에 거동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적절한 조치였던 왕진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활용되다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의사들이 자신이 담당한 구역의 환자들을 찾아가서 진료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의사 담당 구역제 또는 호 담당제).
제3조 병원문 내에 대의소(待醫所)를 설하야 진찰할 시한을 대(待)하야 병인을 종편(從便)케 호되 내원 차제(次第)로 패(牌)를 급(給)하야 진찰하는 제(際)에 선후를 분쟁하미 무(無)케 할 사
외래 진료를 받으러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순서표를 받아 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관제>에 규정된 정규 직원 이외의 사람들이 이러한 안내를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4조 환과고독(鰥寡孤獨)의 무실무의(無室無依)한 자와 감옥서 죄수 외에는 약을 매(賣)호되 시상(市上) 약가를 의하야 극히 염가로 수(受)할 사
이 병원은 무상 진료와 유상 진료를 병행했다.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등 곤궁하고 불쌍한 처지의 환자들과 감옥에 수감된 죄수 환자들은 무상으로 진료하고, 그밖의 환자들은 염가로 진료했다. 진료의 수준과 내용을 떠나 국립병원의 좋은 본보기였다.
제5조 병인이 증세가 우중(尤重)하야 기거 운동을 못하면 내소(來訴) 병원하야 의사를 청거(請去)호되 교력비(轎力費)는 원근과 시간을 분등하야 종략(從略) 선납할 사
제6조 빈한한 인민의 병이 중하야 운동치 못하고 병원에 내소하면 의사가 궁행(躬行)호되 교력비도 수치 물(勿)할 사
왕진을 청하는 경우 의사의 교통비(가마값)는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여 환자측에서 미리 지불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난한 환자는 이 비용도 면제받았다.
제7조 의사가 5일간으로 감옥서에 궁행하야 죄수의 질병을 검사하며 약(若) 병이 유(有)하면 약료를 감옥서장에게로 통첩부송(通牒付送)한 후 수도건기(收到件記)를 토래빙준(討來憑準)할 사
▲ 내부령 제16호 <병원 세칙>(<관보> 1899년 5월 12일자). ⓒ프레시안 |
의사는 1주일에 5일씩 감옥으로 가서 죄수들을 진료했다. 죄수 환자가 늘어나서였는지 1900년 4월부터는 매일 진료로 바뀌었다. 그리고 환자가 병이 있는 경우 치료에 필요한 약을 감옥서장에게 보내도록 하였고, 그 사실을 기록한 문서를 받아와 확인하도록 했다.
제8조 내원(來院)과 청거한 병인의 거주 성명과 연령 병명 약명을 성책(成册)하고 감옥서 죄수 병인은 죄명과 성명 연령 병명 약명을 병성책(幷成册)하야 매월 종(終)에 내부에 보고할 사
외래 환자, 왕진 환자, 죄수 환자들의 주소(죄수는 죄명), 이름, 나이, 진단명(병명), 약 이름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어 매달 말일에 내부(위생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진료기록부"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진료기록부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만약 이것이 발견된다면 대한제국기 환자들의 실상과 병원의 운영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제9조 내원한 병인이 증세 위중하야 난치에 지(至)하면 타 병원의 연유를 통첩하야 의사를 청래(請來)할 사
제10조 타원 의사를 청래할 시에 병원장이 위생국에 해(該) 사유를 통첩하고 교력비는 공용으로 지출할 사
이 병원에서 충분히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가 있는 경우 다른 병원의 의사를 불러 도움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럴 경우 그 의사의 교통비는 환자 대신 병원이 지불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다른 병원이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한성병원, 찬화의원과 구리개 제중원 등으로 생각된다.
제11조 기원절과 탄신절과 명절일과 일요일에는 진찰하는 업을 휴할 사
병원은 기원절(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開國紀元節과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繼天紀元節), 탄신절(황제와 황태자의 생일), 그리고 설과 추석 등 전통 명절과 일요일에는 진료를 하지 않았다.
제12조 제약사가 약료를 매매하고 문부(文簿)는 간(間) 5일하야 위생국장과 도장를 날(捺)하야 상교(相交)할 사
제약사는 약을 매매한 기록부를 작성하여 5일치를 묶어 위생국장에게 보고하고 날인한 것을 서로 바꾸도록 했다. 이 조항대로라면 "매약(처방)기록부"는 병원과 위생국에 각각 1부씩 2부가 있었을 것이다. 이 기록부도 앞에서 언급한 진료기록부와 마찬가지로 발견된 바가 없다.
제13조 제약소의 각항 용비는 위생국에셔 지출하고 약가 수입금은 위생국으로 납할 사
병원의 주 수입원인 약값은 위생국에 납부하도록 했고, 필요한 경비는 위생국에서 받아쓰도록 했다. 철저한 중앙 관리 방식이었다.
제14조 피병원(避病院)을 설호되 인가(人家) 50보(步) 외에 산수를 택하야 악질을 전염치 물(勿)케 할 사
병원에는 별도로 전염병 환자를 수용, 치료하는 피병원을 설치하도록 했는데,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인가에서 50보(50 미터가량?) 이상 떨어지도록 했다.
제15조 피병원의 상중하 삼등간을 설하고 병인의 소청을 의호되 상등간은 1인이오 중등간은 2~3인이오 하등간은 무실무의한 병인을 치(置)하고 치추(治瘳)할 사
제16조 피병원에 유(留)하는 소비(所費)는 상등 중등 하등을 분(分)호되 무실무의한 자에게는 수치 물할 사
피병원에는 1인실(상등간), 2~3인실(중등간), 빈민환자용 병실(하등간)을 두었다. 그리고 피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는 병실의 종류에 따라 진료비를 받되, 빈민 환자는 무상으로 진료하도록 했다.
제17조 병인의 음식은 의사의 지휘를 거(據)하야 피병원에셔 궤(饋)하고 외타 음식은 금지할 사
제18조 병인의 친족간의 내원하야 구호하는 자의 음식은 혹 운전내왕(運轉來往)하야도 의사가 검사할 사
피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음식은 의사의 지휘를 받아 주도록 하고(병원 급식), 외부에서 환자의 음식물을 반입하는 것은 금지했다. 그리고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 친척의 음식을 외부에서 반입하는 경우 의사가 검사하도록 했다.
제19조 피병원에 의사가 매일 1차식(式) 궁왕(躬往) 진찰하고 내왕인(來往人)의 의복 거여(車輿)를 소독할 사
의사는 매일 한 차례 피병원에 가서 환자를 진료하고 피병원에 내왕한 사람들의 의복과 자리(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 이 "거여"가 "자리"로 기재되어 있다)를 소독하도록 했다.
제20조 무실무의한 자가 병원에셔 사(死)하면 사시(死屍)는 지방매장비 예를 의하야 위생국에셔 공관(公款)으로 지판할 사
병원에서 연고가 없는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 매장 비용은 위생국에서 지불하도록 했다. 시신을 함부로 내다버리지 않도록 하는 조치였다.
제21조 피병원에셔는 염병(染病) 호열자병(虎列刺病) 폐창(癈瘡) 등으로 타인에게 전염되는 병인을 치추할 사
피병원의 역할은 장티푸스(염병), 콜레라(호열자병) 등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었다. 이 조항은 제13조 다음에 두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여기에서 폐창(癈瘡, 고질병?)이 어떤 병을 뜻하는지 확실치 않다. 폐(癈)는 발(發)의 오식(誤植)으로 발진티푸스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1899년 8월 16일 제정된 <전염병 예방 규칙>에는 콜레라, 장티푸스, 적리(이질), 디프테리아(實布垤利亞), 발진티푸스, 두창 등 6가지가 법정 전염병으로 규정되어 있다.
제22조 피병원에셔 병인이 30명이 유(逾)하면 병원장이 내부로 보고할 사
피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30명이 넘으면 병원장은 내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제23조 호열자와 전염병이 유(有)하면 진찰하는 시간을 물구하고 제 의사가 합동시무할 사
전염병 환자가 있는 경우 여러 의사가 협력하여 진료하도록 했다. 그만큼 전염병을 매우 중대한 보건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제24조 감옥서에도 피병간을 치하야 악질이 유하면 해간에 이수(移囚)하야 타 죄인에게 전염치 물케 할 사
광무 3년 5월 8일 의정부 찬정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
감옥에 전염병 환자가 생기는 경우 따로 피병실을 만들어 환자를 그곳에 격리하여 다른 죄수에게 전염이 되지 않도록 했다. 이 정도의 조치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을지 모르지만 죄수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진일보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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