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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그대여, 언제나 학살자가 될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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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그대여, 언제나 학살자가 될 수 있다네!"

[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쁜 역사의 반복

지나간 과거 속에서 현재를 발견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하다. 과거에서 발견되는 좋은 측면이 이 시대에 반복된다면, 삶이 희망적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쁜 측면이 반복된다면, 미래가 걱정스럽고 어떤 경우에는 두려움과 공포까지 야기된다.

나쁜 역사의 반복 때문에 혹시라도 두려움과 공포가 야기된다면, 나쁜 조짐이 나타날 때 얼른 과거로 되돌아가서 그때 그 사건이, 그때 그 사람이 어떤 양상과 행동을 보여줬는지, 그 원인과 대안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 진단이 우리 시대를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앞으로 펼쳐질지 모르는 엄청난 악행을 막아준다면, 과거의 나쁜 역사를 마주할 때 안도의 한숨을 쉴 만한 일말의 여지가 생긴다. 현재 우리의 삶과 관련된 나쁜 역사로 거슬러간다면, 그 역사는 도대체 언제의 역사인가?

나쁜 인간의 반복, 아이히만

나쁜 역사로 거슬러 가면, 거기에는 당연히 나쁜 인간이 있다. 나쁜 인간의 하나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소장을 지낸 아이히만이 발견된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악행이었기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명한 아우슈비츠 문제를 왜 다시 상기하는가? 왜 아이히만인가? 차라리 유대인 학살을 야기한 히틀러를 언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히틀러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분명 그도 시작은 평범했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에 반해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함을 벗어나기를 꿈꾸면서 산 사람이다. 아이히만의 행동과 그 결과는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내면과 행동 양태를 들여다보면 초라한 한 시민이 위대해지기를 꿈꾸지만, 위대해지지 못한 데서 발견되는 평범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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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여기에서 평범함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가? 아이히만을 평범하다고 규정해도 되는가? 아이히만은 과거의 그 시절, 과거의 그 사람, 즉 지나간 악인, 지나간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히만이 저지른 범행에 관한 논쟁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그리고 아이히만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철저히 분석한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을 살펴본다면, 그는 분명 지나간 인간이 아니다. 그의 성격과 사고방식은 한국 정치인에게서도, 무한경쟁에 맞추어 춤을 추는 우리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우리들의 자화상'. 평범한 우리의 자화상이 과거로 거슬러갈 때 만나는 자가 있다면, 그 자 또한 평범한 인간의 자화상이다.

아렌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소장을 지낸 사람 정도라면 엄청난 악인이고 특이한 폭력성을 지닌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종전 후에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다가 1960년 5월 11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붙잡혀서 1961년 12월 15일에 사형당하는 아이히만, 그의 예루살렘 법정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동안 아렌트는 충격에 휩싸인다. 아이히만은 흉악무도한 사람이 아니라, 사적으로는 가정에 충실하고 공적으로는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평범한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아이히만이 보여주는 준법 의식과 관료적 성실성은 그를 무조건 나쁜 인간으로 일컫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성실하고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아이히만의 악행은 성실한 인간에게서 재생, 반복될 수 있는 요소를 지닌다. 아렌트는 이런 깨달음을 표현하기 위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서, 선악 구분의 어려움을 표출한다.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악인이 될 여지와 공범 가능성을 지니거나 정당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민족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책은 암묵적으로 금서로 처리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평범성 논의는 유행처럼 번져 나간다.

그렇다면 성실하고 평범한 누구나 악인이 된다는 것인가?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즉, 평범한 성실성을 지닌 아이히만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나쁜 인간, 심지어 우리 시대의 자화상으로까지 비유되는 요인은 무엇인가? 아이히만이 지닌 '근본적인 인격적 결함', 아니, 그의 '사유의 결함'이다. 아이히만은 심문 과정에서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신은 유대인을 직접 죽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유대인을 도와주고 심지어 유대인을 좋아했다고 증언한다.

게다가 그는 성실하기까지 하다. 이런 발언을 듣고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모순적 발언은 사유 능력의 결핍에 기인하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반성 능력의 결핍으로 보편화된다. 아이히만은 사유 능력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모순적 행동에 대한 반성 능력도, 사회 전반에 대한 성찰 능력도 부족하게 된다. 사유 능력의 결핍은 궁극적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106쪽)으로까지 확장된다.

무조건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이히만, 성실할 뿐이지 자기모순은 자각하지 못하는 아이히만의 문제점을 지적하라면,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소장이다. 그러나 그는 시온주의자이다. 2. 좋은 사회의 기준은 히틀러처럼 높은 지위에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사회이며, 그런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유대인 지도층에게도 경의를 표해야 한다. 3. 히틀러가 만든 법은 국가의 실정법이다. 히틀러의 법은 나의 법이기도 하다. 나의 법은 양심에서 나온 칸트의 도덕법과 일치한다. 나는 국가법에 따라서 대학살을 수행했으니, 정당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자기모순을 순서대로 얘기해보도록 하자.

시온주의자,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1932년에 나치당원이 된 뒤로, 유대인 이송과 관련하여 전문 역량을 인정받는다. 최후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소장으로 임무를 마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는 과정에서 그는 시온주의자가 되며, 끝까지 시온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1934년에 아이히만은 하인리히 힘러가 창단(1932년)한 친위대 제국지휘관소속 보안대(SD)로 소속을 옮긴다. "그의 첫 임무는 프리메이슨(초기의 나치스 이데올로기 사상에는 프리메이슨 사상이 유대교와 가톨릭과 공산주의와 함께 섞여 있었다)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정리하고 프리메이슨 박물관 건립을 돕는 것"(92쪽)이었다.

그 뒤로 아이히만은 유대인 관련 부서로 발령을 받는다. 그의 상관은 그에게 "시온주의의 고전인 테오도어 헤르츨의 <유대인의 국가>를 읽게 했는데, 이 책으로 인해 아이히만은 곧바로 그리고 영원히 시온주의자로 개종했다."(96쪽) 히틀러가 1938년 11월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Kristallnacht)을 할 때, 아이히만은 유대인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히틀러와 달리 참된 시온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헤르츨의 무덤을 모독한 자들에 대해서 항의(1939년)하기도 하고, 헤르츨 사망 35주년 기념행사에 사복을 입고 개인 자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또 한 권의 시온주의 저서인 아돌프 뵘의 <시온주의의 역사>를 자발적으로 찾아서 읽는다. 시온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는 유대인 지도층을 만나는 것을 기뻐했고, 심지어 그들을 존경하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히만은 시온주의를 하나의 이상주의로 견지한다. 그는 이상주의가 유대인 대학살과 모순된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반성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좋은 사회의 시민, 성공과 출세를 꿈꾸는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독일이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독일이 좋은 사회인 근거로 히틀러를 염두에 둔다. 히틀러는 평범하고 초라한 한 시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 하사에서 총통으로까지 올라간다.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히틀러처럼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다. 이렇듯 평범한 시민에서 총통으로까지 성공할 가능성을 지닌 사회는 좋은 사회이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좋은 사회, 그런 조건을 갖춘 독일에서 아이히만은 성공과 출세를 꿈꾸면서 차근차근 발판을 밟아나간다. 일단 성공한 사람이 만든 질서를 충직하게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고, 존경도 해야 한다. 아직 성공하지 못한 아이히만은 사회 지도층에게 경의를 표한다. 자기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경의를 지닌다면 그들을 공손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기본이다.

좋은 사회의 시민이라면, 그 기준에 따라서 유대인 지도층에게도 당연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히틀러는 평범한 한 시민에서 최고 지위로 올랐기 때문에, 아이히만의 역할 모델이면서 존경받는 모델이다. 그렇듯이 유대인 지도층도 성공한 사람들로서 존경받는 모델이다. 좋은 사회라면, 좋은 사회의 시민이라면 유대인 지도층도 역할 모델이 되며 존경과 공손한 대우를 받아야 할 모델이 된다.

수용소에 유대인을 감금하고 관리하고 이송시키고 최후에는 대학살을 자행하는 아이히만은 이 모든 과정을 좋은 사회의 시민으로서 충직하게 수행한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유대인 수용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나치당원들은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 지도층을 관리자로 활용하는데, 어느 날 상황 변화를 거부하는 유대인 지도층 인사가 저항하자, 아이히만은 어쩔 수 없이 따귀를 때린다. 그는 이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가 무엇인가 양심에 걸렸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나중에 그가 좋아하게 된 유대인 가운데 한 명인 빈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장 요제프 뢰벤헤르츠 박사의 따귀를 때린 점이다. (당시 그는 그의 요원들 앞에서 사과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계속 그를 근심하게 했다.)" (103쪽)

그는 대학살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층의 따귀를 때린 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근심하는 모순적 태도를 지닌다.

양심과 국가법의 일치, 칸트의 도덕법을 따르는 아이히만

아이히만이 예루살렘 법정에 서게 된 이유는 히틀러의 명령과 국가법을 거부하지 않고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일종의 국가 관료로서 총통의 명령과 실정법을 따르는 것은 시민의 의무이다. 성실한 시민이면서 충직한 관료인 사람은 국가가 요구하는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성공과 출세를 위한 기본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법이 지닌 정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총통의 명령과 국가법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도덕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법을 따르는 것은 도덕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자기 행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 근거로 자신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공부했다고 하면서, 국가법 준수는 칸트의 도덕법 준수와 일치하며 의무론적 윤리설에 따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인간의 실천 이성적 도덕법은 개개인이 지닌 양심에서 나온다. 그리고 누구나 양심을 지니기 때문에 누구나 동일한 보편적 도덕법을 만들 수 있다. 그렇듯이 히틀러가 만든 법은 히틀러 양심에서 나온 것이면서, 아이히만의 법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양심에서 법이 나오듯이, 아이히만의 양심에서도 법이 나오며, 히틀러와 아이히만의 법은 일치한다. 히틀러가 만든 국가법은 아이히만의 양심법이기도 하므로, 국가법을 지키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과 당위성을 지닌다. 그런 맥락에서 국가법과 명령에 따라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은 정당하며, 자신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여기에서 아이히만이 자각하지 못하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칸트의 도덕법은 국가법이나 실정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는 도덕과 정치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당위' 내지 '요청'을 강조하며, 정치인도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를 구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자기 입맛대로 칸트를 변형하여 악용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 무엇이 될 것인가?

아이히만처럼 이성법과 국가법을 혼동하고, 도덕법과 실정법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나간다면, 칸트 철학은 의무론적 윤리설로서 강점을 발휘하기보다는, 엄청난 악을 합리화하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 도덕을 무서운 무기로 만드는 것은 엄청난 악인이라기보다는 아이히만처럼 자기모순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즉, 반성 능력의 결핍이다.

아이히만은 사유 능력이 결핍되어서 반성 능력이 부족하고, 도덕 이론도 자기 방식대로 왜곡하여 사용한다. 자기모순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능력도 철저하게 상실하는 데로 나아간다. 반성 능력이 부족하여 모순적 행동을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순식간에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나쁜 역사의 반복, 나쁜 인간의 반복은 반성 능력 결핍의 반복에서 찾을 수 있다. 반성 능력의 결핍은 평범한 우리들에게서 끝도 없이 나타난다. 게다가 더 무서운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이 반성 능력을 더욱더 상실하게 만드는 시공간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 인간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무한경쟁의 시공간 속에 던져져 있는 우리는 사유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고, 타인을 배려하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다.

평범한 인간, 즉, 사유 능력이 없고 반성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 그러나 끊임없이 성공과 출세를 꿈꾸는 평범한 인간은 좋은 사회의 시민으로서 성실하고 충직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성실하고 충직해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평범함이 어느 날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는 평범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 생각 없이 산다면, 반성 없이 산다면, 자기만 알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산다면, 평범한 그대, 얼마든지 악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그러나 반전도 가능하다. 평범한 그대, 칸트처럼 양심에 따르는 도덕법 창출자로서 사회의 엄청난 개선과 도덕적 실현을 야기하는 선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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