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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북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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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북행

[해방일기] 1946년 5월 6일

1946년 5월 6일

평안북도 철산군 군민들이 미소공위에 탄원서를 냈다고 한다. 어떤 범위의 사람들인지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철산 출신으로 서울에 와 있던 사람들일 것 같다. 3월에 진행된 북반부의 토지 개혁으로 밀려난 지주들과 해방 이후 안전을 위해 철산을 떠난 친일파들이 역할을 맡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북 철산군민 일동은 8·15 이후 실시되고 있는 행정은 문명인으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학정이라 하여 다음 3항의 탄원서를 군민 일동의 연명으로 미소공동위원회에 보냈다 한다.
1) 신탁 통치 반대 기타 정치 문제로 구금된 사람들을 즉시 석방할 것
1) 법적 근거 없이 인민을 탄압치 말 것
1) 자활 능력 없는 부녀자와 유아들의 축출을 중지할 것

(<조선일보> 1946년 5월 5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방일기>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남북 간 균형'에 강박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에서 전개된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남쪽에만 시야가 치우쳐 있어서 안 될 텐데, 자료와 연구가 남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어쩔 것인가. 북쪽을 향한 시야를 넓히기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남쪽에 고찰이 치우친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남쪽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사태의 진행에 그리 많이 개입하지 않고 조선인들의 건국 노력이 꽤 자연스럽게 펼쳐진 반면 남쪽에서는 미군이 여러 가지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커밍스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한국전쟁의 기원)> 머리말에서 이 차이를 지적했다.

(점령) 초기 얼마 동안의 난폭한 혼란기가 지나자 소련군은 뒷전으로 물러나 조선인들에게 주도권을 맡겼다. 단기적으로 저 비용 고 효과의 정책이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온순한 위성국을 만드는 데 실패해서 지금까지도 몇몇 동유럽 국가들이 보이는 모습과 대조적인 길을 걸었다. 이것은 식민지 시대 동안 항일 운동을 통해 이빨을 단련시키고 소련의 통제에도 저항하는 과격파 민족주의자 집단을 소련군이 지원해 준 결과였다. 이런 이야기는 제2권에서 더 많이 다루게 될 것이다. 새로 입수된 북반부 관계 자료가 1947~50년의 기간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1945년 직후 상황에서 남반부의 중요성이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이 제1권에게는 다행이다. 남반부에는 수도가 있었고, 더 많은 인구가 있었고, 세계 제일의 강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얼마 동안 결정적인 사건의 대부분이 남반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첫 1년 동안 북반부식 정치 형태가 남반부에서도 널리 나타났고, 따라서 남반부의 좌익 정치 형태를 파악하면 북반부의 정치 형태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xxv-xxvi쪽)

소련군은 점령 초기부터 일본 지배 체제를 철폐하고 인민위원회를 통한 주민의 자치 노력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그래서 1946년 2월까지 만들어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비록 정식 보통 선거에 기초를 두지는 못했어도 상당한 실질적 대표성을 가진 지역 '임시 정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토지 개혁 같은 방대한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만한 대표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북반부의 변화를 '정상적' 진행으로 간주하고 남반부에서 일어난 일들이 왜 그런 정상적 진로에서 벗어난 것인지 살펴보는 데 작업의 중점을 두고 있다. 철산군민의 탄원서를 보더라도 철산 다수 주민의 의지와 관계없는 반동적 요소일 것이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누구를 구금했건, 탄압했건, 축출했건, 지금까지의 고찰로 볼 때 남반부에 비해서는 그런 일이 주민들의 자율적 결정에 의해 벌어지고 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북주의자로 몰리는 일은 피해야겠다. 몇 달 전 북한 세습 논란 중에 '세습'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입을 뗐다가 종북주의자로 몰려 보니까 정말 재미없다. 남들이 뭐라는 거 신경 안 쓰는 편이지만, 종북주의자로만은 몰리고 싶지 않다.

잠깐 객쩍은 소리였고, '정상적' 진행에도 문제는 없을 수 없다. 주민 대다수의 공감 속에 진행되는 혁명의 과정 안에서도 '인간 소외'의 병리적 현상은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신형기는 "'신인간' - 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현상"(<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에서 혁명기 북한 문학의 '인간 중심주의'가 보인 허점을 지적한다.

'혁명'을 주제로 삼는 이 인간론은 식민지 시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거쳐 북한 문학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북한 문학에서도 긍정 인물은 다가올 미래를 선취한 신인간이어야 했고, 긍정적 단초를 가진 인물이 신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는 일은 북한 문학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신인간을 통해 새로운 창조와 건설의 방향을 뚜렷이 제시하려던 이 기획은 기본적으로 대중 동원을 위한 기획이었다. 낡은 인간을 신인간으로 바꾸는 것이 새 시대를 여는 조건이라며 북한 문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내세웠다. 사실 이것은 '국민 문학'과 같은 국가주의적 프로파간다의 핵심이기도 했던 것이다. 과연 인간 중심주의로 포장된 혁명적 신인간은 식민지 시기 후반 총력전 체제가 요구한 '혁신된 국민'과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700쪽)

얼마나 달랐던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나는 따져볼 필요만 확인해 놓고, 윤곽을 파악하는 일로 일단 돌아가겠다. 지금은 남반부의 사태 진행이 얼마나 엉망으로 꼬여가고 있었는지 파악하기 바쁘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북반부 상황이 내포한 섬세한 문제점의 검토는 작업의 뒤쪽으로 미뤄둔다.

1946년 여름 평양에서 출발한 소련 방문단에 끼었던 이태준(1904~?)의 <소련 기행> 한 대목이 신형기의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데, 그 일부를 옮겨놓는다.

처음 사귀되 적년구우(積年舊友)와 같이 신뢰와 의리의 배드로흐 중좌와 미하애포흐 소위, 만나면 그저 즐겁기부터 한 쏘또우 중좌와 박 장교, 묵묵진실의 사보이 호텔 사람들, 스딸린그라드 꼴호즈에서 만난 당원과 농촌 청년들, 대신급이나 말단 하관들이나 관료 기분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평민적 태도들, 모두 다 '요순 때 사람'들인 것이다. 저렇게 솔직하고 남을 신뢰 잘하는 사람들을 만일 생존경쟁이 악랄한 자본주의 사회에 갖다 놓는다면 어떻게 살아 나갈까 싶다. 누가 누구에게 눈치 보거나 아첨할 이해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해의 필요 없는 데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러워질 것인가? (…) 이해의 필요관계를 그저 두어두고 말로만 인류 전체에게 유령 같은 금욕자들만 되라는 것은 꿈이요,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 공염불은 한 마디 없이 인간이 위선과 비굴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될 불순한 이해관계부터를 제거해 놓은 소비에트는 비단 경제나 문화뿐이 아니라 인류 자체에 거대한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마치 중세기의 르네상스가 봉건체제 속에 말살되었던 인류의 '자아'를 위한 각성이었듯이, 소비에트는 인류가 다시 자본의 노예로부터 풀려나와 노예의 근성을 뽑아버리고 절대평등에 의한 진정한 평화향, 계급 없는 전체적 사회의 성원으로서 '새 타입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영원히 축복받을 인류의 재탄생인 것이다! (705~706쪽)

아내가 좋으면 처갓집 말뚝도 고와 보인다더니, 소련 사람들 얼굴만 봐도 행복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태준은 원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거리를 두고 순수 문학을 지향한 작가였다. 2009년 4월 21일자 <위클리경향> 821호의 그를 다룬 기사 제목도 "카프작가 아니면서 월북한 이태준"이었다. "월북=좌익"의 공식에 잘 맞지 않는 점을 짚은 제목이다.

1946년 3월에 탈고한 것으로 보이는 "해방 전후"에는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세기 한국 소설 6 이태준-박태원>(창비 펴냄) 작중 인물 '현'에게 자신을 투영한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좌익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우익에 대한 환멸감을 토로했다. 문학가동맹으로 합류하기 전의 문학건설본부에서 좌익 편향을 막기 위해 애쓰는 자세를 표방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중도'의 자세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몇 달 후 "소련 기행"의 소비에트 찬양은 확실한 '좌익'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해(利害)관계의 제거라는 소비에트의 제도적 조건이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까지 바꿔놓았다고 하는 찬탄이 순진함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일까? 심진경은 위 책 294쪽에서 월북 후 이태준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은 이태준 문학은 물론 이태준을 포함한 대부분의 월북 작가의 문학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태준은 1946년 7월 하순 무렵에 월북한 뒤 소련 방문기를 일기 형식으로 엮은 "소련 기행"을 비롯해서 '북조선 토지 개혁에 관한 법령'을 제재로 쓴 "농토", 그 이후에 인민의 투쟁 의지를 고취하고 반미 감정을 자극하는 등 투쟁적이고 선동적인 주제가 생경하게 제시된 단편집 <첫 전투>와 <고향길> 등을 씁니다. 이러한 소설들에는 이태준의 이전 작품들에서 볼 수 있던 인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서정적 분위기 묘사 등의 장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월북한 뒤까지 이태준은 문학과 정치를 동일한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이 곧 정치라는 그의 문학관은 해방 이후 사회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지나치게 열광한 한 작가의 과장된 현실 인식이 낳은 것일 뿐입니다. 그 결과 이태준의 소박한 현실적 문학관은 투철한 이념과 계급적 투쟁을 강요하는 북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게 됩니다. 이태준이 종전 후 미국의 앞잡이로 몰려 북한에서 숙청당했다는 사실은, 이태준의 월북이 이태준 자신을 배반한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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