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임포스터>, <페이첵> 등 여러 편이 영화화되었다. 그 덕분에 딕의 대표적인 단편은 번역되어 나왔으나 곧 절판되곤 했다. 다작가인 딕의 장편 중 구할 수 있는 번역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으로 유명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유빅(UBIK)'뿐이었다.
일찍 작품 활동을 시작해 소실되거나 미국에서도 절판된 원고를 제외하더라도 수십 권의 장편 소설을 남긴 딕의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기획은 지금껏 없었기에, 딕 걸작선이 나온다는 소식은 SF 독자를 들뜨게 했다. 게다가 새로 나온 책의 만듦새는 양 손에 들고 저잣거리로 뛰어나가 춤을 추고 싶어질 만큼 훌륭하다.
▲ 필립 킨드레드 딕. ⓒfantasymundo.com |
'과학소설(SF)' 작가였던 딕은 평생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는 여러 번의 결혼 생활을 포함한 많은 관계를 파탄 냈으며 마약, 비과학적인 구원, 비논리적인 음모론에 심취했다. 그는 살기 위해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팔기 위해 글을 바꾸기도 했다. 일례로, 1977년 작 '어둠 속의 스캐너'는 원래 동시대 약과 하위문화에 심취했던 그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일반 소설이었으나, SF로 내야 더 팔 수 있을 것이라는 편집자의 조언에 따라 배경을 미래로 바꾸어 개작했다. 그 결과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기는 하나, 어휘나 상황은 동시대의 속어와 히피 문화를 충실히 반영하는 기괴한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괴상한 불일치마저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되는 것이 바로 딕이다. 딕의 삶과 글을 압도하는 광기. 읽는 사람마저 마약을 한 기분으로 만드는 뒤틀린 고양감. 딕의 작품은 때때로 난해하지만, 사실 독자는 그 난해함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딕의 작품에는 때때로 줄거리가 없지만, 사실 독자는 줄거리를 따라가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 <화성의 타임슬립>(필립 K.딕 지음, 김성훈 옮김, 폴라북스 펴냄). ⓒ폴라북스 |
딕이 갓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 펜팔이었던 어슐러 르 귄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요새 작가들 중 역시 딕이 대단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정규 교육 과정을 버텨내지 못할 만큼 약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언제나 옆에 있고 싶어 하는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 이혼해도 다음 결혼이 있었고 스쳐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지지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지하는 동료 작가들이 교대하듯 나타나고 사라졌다. 편집자들은 그의 책을 내기 위해 노력했고 (비록 평범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되어 버린 경우도 있었지만) 영화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딕은 미국 문학의 고전들을 엄선해 출간하고 있는 비영리 출판사인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 총서의 유일한 SF 작가이이기도 하다.
이런 매력은 대체 어디에서 올까? SF의 본질이 경이감이라고 한다면, 딕이 보여주는 경이는 광기에 언어를 부여하는 과정에 있다. 딕은 '나'의 부재, '확신'의 부재, '이성'의 부재에 소설가가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딕 걸작선의 출간을 환영하면서 '늦었지만 이제야'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딕은 미친 세상을 위한 작가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의 소설이 어울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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