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또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시선일 것이다. 우리는 펭귄의 행복을 재단할 수 없고, 닭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구병모의 신작 소설 <아가미>(자음과모음 펴냄)는 이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치명적인 허점을 통쾌하게 파헤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소설이다.
▲ <아가미>(구병모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이 소설은 <인어공주>의 흥미로운 짝패다. 바다에서 태어난 인어공주가 뭍으로 나오기 위해 다리가 필요했다면, 뭍에서 태어난 인어왕자가 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가미가 필요했다. 소년 '곤'은 자살한 아버지의 시체 곁에서 죽기 직전의 상태로 발견되지만 마음씨 착한 노인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노인의 손자 강하는 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매력의 실체가 귀 뒤의 흉터, 그러니까 '아가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퇴화된 숨구멍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년 곤의 아가미는 퇴화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는 뭔가 다른, 알 수 없는 신비'의 흔적임이 밝혀진다.
어떤 잠수 기구도 없이 마치 동화 속의 인어처럼 물속에서 자유로이 질주하고 새처럼 비상하는 곤. 물속에만 가면 정말 '물 만난 고기'가 되어버리는 곤의 수상한 야행(夜行)을, 강하는 눈감아주는 척하면서 이용한다. 곤의 기이한 외모 때문에 강하와 노인은 곤의 주민 등록조차 할 수 없고, 학교에도 보낼 수 없다.
그러나 '학교'라는 시스템에 물들지 않고, 법과 규범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곤은 자기만의 또 다른 세계를 피워 올리게 된다. 평생 인간을 피해 다녀야 한다고 믿었던 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만나고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걱정하면서 점점 자신의 운명을 자기만의 빛깔로 직조해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인어공주>의 아름다운 데칼코마니다. <아가미>는 치밀한 신화적 패턴과 동화적 짜임새를 지니면서도 현실과의 치열한 갈등을 버텨내는 소설의 역학(dynamics)을 함유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우리가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우리 내면에 아직 살아남은 동화의 흔적 기관이 만져진다.
<아가미>는 우리가 읽었던 모든 동화를 마음속에서 다시 쓰기 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작가 구병모는 투명한 소설의 프리즘으로 동화의 단순한 내러티브를 천변만화한 상상력의 무지개로 확산시킨다. 그렇게 <아가미>는 신화와 동화와 소설의 유쾌한 하모니를 연주해낸다.
곤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굴레에 진정 속박되지 않는다. 그 어떤 타인의 욕망, 타인의 명령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곤. 시간이 갈수록 아가미뿐 아니라 아름다운 비늘까지 가지게 된 곤은 사회화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기에 오히려 사회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를 '인간'이라고도, '물고기'라고도 규정할 수 없지만,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이며, 인간을 넘어선 인간, 물과 뭍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학교나 또래 친구는 물론 주민 등록조차 없는 곤. 그렇기 때문에 곤은 그 어떤 편견도 없이, 그를 위협하는 타인의 광기와 분노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실 사회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흉터, 불가해한 돌연변이로 보이는 아가미. 그 이질적인 존재는 바다를 닮은 소년 곤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부활을 위한 희망의 날개가 된다. 아가미라는 거대한 흉터를 지닌 소년 곤은 물과 뭍의 경계를 뛰어넘는 존재,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은 존재, 사랑과 증오의 경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아가미>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동화의 상상력을, 인류가 잃어버린 자연과의 교감을, 소설이 잃어버린 신화적 꿈을 되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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