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마다 도판을 박고 단평이 딸린 2000년대 초·중반 그가 발표한 목수 일지와 비교할 수 없는 단행본 같았다. 목공을 매개로 현대 사회를 성찰한 산문집. 그런 책을 이전에 그가 낸 적이 없진 않다. 목공에 한정을 두지 않은 <인간과 사물의 기원>(열린책들 펴냄)은 장 그노스란 예명으로 냈다(책 소개에는 장 그노스와 김진송의 공동 저술인양 표기되어 있는데, 그 둘은 동일인이다).
"어깨에 박혀 있는 축 끝에는 손톱보다 작은 원반을 심어놓았다. 원반은 가운데 홈이 패어 있고 거기에 낚싯줄이 걸려있다. 그걸 당기면 술잔을 든 팔이 움직일 것이다. 낚싯줄은 노인의 머리를 움직이는 강선과 함께 몸통을 지나 의자를 거쳐 마룻바닥을 지나 다시 지하로 연결된다."
목물 <술 마시는 노인>의 작동 원리를 이해시키는 이런 해설은 물론 요긴하지만 연신 반복되며 지문을 채우고 있다. 자기 전공에의 몰입이 만든 이런 편중된 표현이 스스로도 신경 쓰였던지, 저자도 다음처럼 고백하고 인정한다. "설명을 들으면 간신히 억눌렀던 짜증이 한꺼번에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 <상상목공소>(김진송 지음, 톨 펴냄). ⓒ톨 |
김진송이 주목받는 이유로, 병행하기 힘든 두 분야에서 각기 일가를 이룬 이력이 지목될 만한데, 전시 기획을 하고 책을 짓던 이가 노동력의 결과물을 수차례 전시하기에 이르렀고 그게 하필 목물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순수 예술계에는 창작과 비평을 병행하는 경우가 드물어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간에서 하대하는 직종인 목공을 인문학자가 겸하는 경우란 매우 희소하다.
소수의 직장인에게 목공은 로망이다. 자신의 삶을 기계처럼 획일화시킨 제도권의 생리를 홀로 야유하듯, 구시대 기술로 퇴행하는 열정 때문이리라. 목공은 손맛이 밴 미련한 미학과 둔한 매력을 동시에 갖췄다. 더구나 고작 실용 가구 몇 점을 들이는 로망의 수준을 넘어, 인문학자가 전업 목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속세의 가치관이 간과하기 쉽지 않았을 게다. (저자가 이 책 뒷부분에 전혀 다른 문맥에서 썼지만) "때로 몸으로 얻은 독점적인 지식과 정보는 다른 사람과 쉽게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막강한 권위를 얻는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
나는 김진송의 목물을 품평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반들반들한 표면과 정교하게 세부를 깎아 세운 그의 대상들을 도판만으로 판독할 수도 없거니와, 목물 보는 안목을 훈련받지 않아서다. 더욱 결정적으로 나는 보통의 남성과는 달리 굉장한 기계치다. 때문에 글 볼 줄 아는 좁은 안목에 의존해, 책 속에 담긴 철학을 살필까 한다.
이런 저런 인터뷰를 따라가 보니 그가 움직이는 나무 인형 (그는 '움직 인형'이라는 조어로 부르더라!) 즉 오토마타에 착수한 시점은 2009년인 걸로 보인다. 때문에 2011년 출간한 이 책은 오토마타 중간 보고 격이 되려나. 어여쁜 가구 제작에서 움직이는 나무 인형에 이르기까지 그의 목공 이력도 진화 중이다.
그 때문인지, 목차를 통해 인문학자 출신 김진송은 최근 수년 사이 학계의 주목을 받은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을 유심히 들여다 본 것처럼 보였다. 비록 <통섭>(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을 구시대적 계몽주의자 혹은 일방적 환원주의자로 단순화시키거나, 꽃잎이 암컷 동물의 생식기 모양을 닮은 걸 두고 진화의 산물로 풀이하는 데서 보듯, 과도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진화의 개념을 잘못 적용한 지문도 간간 보였지만.
단순한 소목에서 출발해 오토마타 제작으로 이어지는 상승 곡선을 진화의 증거로 보고 싶진 않다. 오히려 아직은 완결 단계가 아니지만, 목공을 매개 삼아 자기 철학의 깊이를 주는 과정과, 단순한 목물에조차 스토리텔링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깨달음으로부터 진화를 읽을 수 있었다.
창작의 노정을 통해 혹은 완성되는 대상을 통해 그 재현 대상에 대한 종래 편견을 버렸다는 고백이 자주 나오는 데 진부하게 비유하자면 유형의 목물 완성 과정이란, 그에게 목공의 노정이자 자신의 무형의 가치관을 새로 깎아 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반복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아니면 인간에게 조건 지워진 물질을 구성하는 절대원칙일지도 모른다"는 각성의 영향 탓인지 뜯어보면 결국 같은 주장인 문장들이 너무 자주 지문 속에 반복되고 있으며, 유감스럽지만 그 점이 독서의 몰입을 방해한다. 직접 경험을 통해 독보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 깨달음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하기 마련인데, 그도 같은 일이 겪는 걸까.
이야기 짓는 필자이자, 이미지 짜는 목수인 김진송은 상이한 두 분야에서 고유한 결핍들과 당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 결핍들의 극복 장치를 상상력이라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그 극복 장치는 어떻게 획득될까? 책의 부제로 단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 되는가"에 이 책은 어떻게 답을 내놓고 있을까? 본문의 마지막 단락 '세 갈래 길'에서 수줍게 답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답에 대한 심증은 강한데 요령껏 답을 내놓진 못한다. 그의 답을 요약하면 몸의 경험, 머리의 지식, 자연의 본능. 이 세 요소가 인위적 서열에 얽매이지 않고, 이율배반적 균형을 이룬 채 공존한다면 상상력의 문이 열린다(고 나는 읽었다). 김진송은 이 부분에서 확신(경험과 본능으로)하는 듯했고, 언술로 표현(지식)하는 데엔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추정컨대 그가 당도한 해법은 목공의 조언을 구하러 온 이방인들에게 그가 늘 던지는 짧은 충고, "일단 그냥 해보세요"에 가까운 답일 터. 그 감각적 답변을 항간에서 그에게 씌운 인문학자의 얼굴로 답변하려니 장광설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다(책이 진정 설파하려는 핵심과 그것을 전달하는 장문의 해설 사이엔 괴리가 컸다). 모든 지문에서 그랬지만 유독 '세 갈래 길'에서 머리, 몸, 자연이 상호 교차하는 정중앙에 당도한 자의 수줍은 자부심과 설렘이 읽혔다.
관상학엔 주의조차 주지 않는 나지만, 사진에 투영된 김진송의 이목구비를 통해 완고하고 확신에 찬 캐릭터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가 향후 목공을 다룬 산문집을 몇 차례고 낼 거라 추측한다. 그때는 식자(識者)의 부담을 털고 단순명료하게 목수 철학을 정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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