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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MB에 의한, MB를 위한 '슬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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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MB에 의한, MB를 위한 '슬픈 책'!

[프레시안 books] 송기역·이상엽의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레디앙 펴냄)은 시인(송기역)과 사진작가(이상엽)가 지난해(2010년) 4월부터 반년여에 걸쳐 사람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4대강 파괴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담은 처절하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기록물이다.

시인은 가슴속에 죽임의 처절함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애끓는 슬픔을 담았고, 사진작가는 "단 2년 만에 처참하게 변화해버린" 이 나라의 강과 숲을 냉정한 자세로 카메라에 담았다. 시인은 강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방울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강물'로 여기며 동병상련했다. 사진작가는 기록을 자임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파괴로 인해 고통을 얻고 있는 이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고, 비밀스레 공사를 강행하는 이들로부터는 모욕을 당했고, 때로는 어이없는 주먹질까지 당했다.

나는 두 예술가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을 담겠다는 정직한 태도로 일관해 세상에 내놓은 이 뜨겁지만 슬픈 책으로 인해 너무나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최소한 이 기록에서만큼은 누구도 감행하지 못한 치열한 현장주의자들이었다. 비범한 이들은 책상 위에서 세계를 조망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제 발로 가서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와 강과 숲이, 모래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생명 가진 것들의 목소리를 듣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생체험의 나눔은 현장주의자이기를 포기한 이들로부터는 얻을 수 없다. 나는 해석하고 분석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보다는 언제나 현장주의자들을 믿는다. 붓다나 예수도 기실은 탁상공론의 사람들이 아니라 치열한 현장주의자들이었다는 의미에서 나는 현장주의를 신봉하고 현장에 몸을 던진 이들의 말에 가장 큰 신뢰의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 <흐르는 강물처럼>(송기역 지음, 이상엽 사진, 레디앙 펴냄). ⓒ레디앙
그래서 이 책은 실감의 책이고, 그 실감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울린다는 의미에서 공명의 책이다. 무엇이 공명되는가. 슬픔이다. 그래서 이 책은 부득불 슬픔의 책이라는 정의를 하나 더 보태야 한다.

시인과 사진작가는 이 험하고 고된 기록 작업을 자신을 위해 수행하지 않았다. 생업에 붙잡힌 세상 사람들 모두 어떻게 이 처참한 국토 파괴의 범죄 현장을 다 보고 샅샅이 살필 수 있을까? 모두 가 보고 느끼면 좋으련만, 환경운동가 감병만 씨 말대로 그 파괴와 상처의 현장에서 회복과 치유와 구원의 힘을 얻을 텐데, 하는 소망에서 그 소망을 쉬이 썩지 않을 책에 담아 간직하고자 예술가들이 대신 간 것이다.

예술가들은 본시 사람들 누구에게나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대신 끄집어내 실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본분인 이들이 아니었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만든 시인과 사진작가는 그 본래적 본분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했다. 급하게 파괴되고 있는 산천의 목격자로서 헌신했고, 증언자로서 성실했고, 기록자로서 치열했으며, 인간으로서 정직했다. 파괴는 가치 없는 짓이며 그 과정이나 결과가 매우 흉악하지만, 파괴를 담은 기록은 이 책처럼 그것이 제대로 담긴 기록이었을 때 너무나 슬프고 아름답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아이러니이고, 서글픈 소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권세를 지닌 이들과 토목 장사꾼들이 4대강에 손을 대면서 뭐라고 말장난을 하든, 이 대규모 산천 파괴를 범죄 행위라고 단언한다. 본문 어느 대목에도 지금 이 사태는 한 나라가 외세에 강점되고 유린되는 것에 비견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대목이 나온다. 나라가 외세에 강점당할 때 오로지 저항이 의무이듯이 4대강 파괴에 저항하고 중지를 촉구하고, 파괴의 현장을 철저하게 기록하는 것은 허락된 유일한 의무일 수밖에 없다. 저항의 당위성이라 해도 좋겠다.

속도전을 벌여 숲을 무너뜨리고, 강물을 막고, 모래와 골재를 퍼내는 이들조차도 왜 이런 공사를 하고 있고,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민족 중흥을 위해서도 아니고, 국토의 재건을 위해서도 아니고, 가뭄과 홍수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그것도 단지 새빨간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공사장 인부들도 잘 알고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산천 파괴의 역사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공업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그 순간부터 자연은 단지 자원 가치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숲이 베어지면서 산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폐수를 내뿜는 공장이 빠르게 건설되기 시작했고,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는 곧 성장을 상징하는 은총의 연기로 축복받기 시작했다. 건설과 증산, 개발과 성장 가치는 사람살이의 토대를 무너뜨리면서도 한 치의 의심없이 강화되고 부추겨져야 하는 유일한 시대 가치였다.

그것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독재 정권이나 그 후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던 이른바 민주화 정권 시절이나 진배없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들에서 그들은 두 얼굴의 한 뿌리 형제들이었다. 그 끔찍한 형제 결속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동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그들더러 개발과 성장의 선봉이 되어달라고 열렬한 얼굴들로 의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4대강 파괴는 정확하게는 이명박 정부의 수장인 '이명박' 개인의 책임이 가장 심대하지만, 안하무인이고 고집스럽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특별한 인성을 지닌 그의 파멸적 행위에 제때 제동을 걸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동조했던 우리 시대 모두의 책임이라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경중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 범죄의 가담자라는 자책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왜 4대강 파괴를 거대한 범죄 행위라 자주 단언하는가? 이 책에 담겨 있는 치열한 현장의 이야기들과 피 끓는 강안(江岸) 사람들의 절규, 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분노와 싸움으로서 얻게 된 깨달음의 목소리들, 그리고 처참한 상처의 풍경들을 만약 마음속 깊은 곳의 양심의 눈으로 잘 헤아려 살피기만 한다면, 왜 이 폭력적인 토목 공사를 범죄라 단죄해야 하는지 누구나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글로, 때로는 사람들 숲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말해 왔지만, 이 산천은 이명박 정부의 것이 아니다. 토목 업자들의 것도 아니요, 땅 투기꾼들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리의 것도 당연히 아니다. 산천은 본시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산천이 한 번도 우리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우리는 결단코 이 산천의 주요 인물이 아니다. 관리자도 아니고, 통솔자도 아니다. 이 산천에서 이익만 뽑아낼 투기꾼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산천에 속해 있을 뿐이다. 우리 목숨이 바로 이 산천에 의지하고 있고, 산천은 우리를 포함해 모든 생명체들을 무심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단지 짧은 한순간의 기생자일 뿐이다. 이것이 가장 간명한 산천과 사람 간의 관계이고, 이게 결국은 전부 다인 것이다.

누가 무슨 권한으로 이 산천을 이토록 철저하게 분탕질할 폭력을 허락했을까? 지금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무자비하게 없애고 죽인 것들이 본래 대로 회복되는 데 얼마만한 시간이 걸릴까? 이 불필요한 비용을 낭비한 죄악을 과연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무슨 까닭으로 이 가증스러운 산천 파괴 장사에 우리는 이 지경으로 둔감하고, 무기력해졌는가? 강을 죽이고, 강에 붙어 누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을 피눈물 흘리며 서로 헤어지게 만들고, '서 있는 강'인 숲을 베고, '흐르는 숲'인 강에 포클레인을 집어넣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과도한 준설로 모래 장사를 하고,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강과 함께 살아온 생명체들을 일거에 죽이고 사라지게 하는 이 범죄의 시대에 우리는 또한 돈 때문에 산 것들을 산 채로 파묻는 살처분까지 감행하고 있다. 우리가 과연 나무나 햇살을 머금은 여울보다 이 행성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존재일까? 일찍이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無惻隱之心非人也)'라고 단언했다. 그 말을 거울로 지금 우리 시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지금 인간도 아니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인간이라는 항변의 책이기도 하다. 쓸쓸하고 슬프다. 우리도 인간이냐는 질문을 해야 하는 시절은 너무나 비참하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는 이런 슬프고 눈물 나는 책이 묶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곧 지나가겠지만, 이명박 시대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이 시대를 흘려보내면서 우리 삶에 이 책만큼은 우리의 일부인양 같이 흘렀으면 좋겠다.

4대강 파괴의 확신범인 이명박 대통령이 이 책을 탄생시켰기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는 원인 제공자로서 이 책의 공동 저자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충분히 넉넉한 그에게 인세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을 가능하게 한 이는 사실인즉 이명박 대통령이라 우리는 역설의 어조로 분명하게 명토 박아 놓는다. 그가 권력을 잡은 이래 그 잠시 상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은 잘 모르고 있으므로 그보다 몇 천 배 더 긴 시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 책이 한때 그가 한 일을 가감 없이 증거할 것이므로, 그는 결국 이 책에 사로잡힌 셈이다.

4대강파 괴라는 범죄 행각에 직접 가담자는 아니지만, 우리 또한 미필적 고의의 태무심한 방관자로서 이 책에 덜미 잡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진상의 아주 작은 일부나마 감지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우리의 질병 같은 무기력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죄의식은 어느 정도 탕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침착한 문체와 설명이 필요 없는 사진으로 인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책이지만, 무서운 책이라 말해도 된다. 이 부드럽고 무서운 책을 만들어내는 데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 우리를 공감으로 눈시울 적시게 만든 상처받은 강안 사람들, 강을 지키는 것을 본업으로 받아들인 이 나라 구석구석에 질경이처럼 굳세게 버티고 있는 여러 환경운동가들에게 우리는 결국, 빚졌다.

우리 산하가 지금 격심하게 고통 받고 있으므로, 고통의 현장이 잘 담겨 있는 이 책을 서둘러 구입해 살피고 널리 퍼뜨리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의무다.

'프레시안 books'의 서평위원인 최성각 작가가 쓴 이 글은 <흐르는 강물처럼>에 '추천의 글'로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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