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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보다 퇴계가 성공한 '혁신적 정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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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보다 퇴계가 성공한 '혁신적 정치가"다!"

[프레시안 books] 김영두의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다. 1000원 권과 5000원 권 지폐의 초상으로 매양 접하기 때문이다. 허나 막상 두 사람의 정치적 이력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둘 다 성리학자요, 그 가운데 이황은 주리론, 이이는 주기론을 주장한 사상가라는 정도에서 그친다.

본시 퇴계와 율곡은 정치가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책이 상재되었다. 제목이 도발적이어서 눈길을 끈다. "퇴계 vs. 율곡"이다. 이어지는 부제,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라는 문장이 그 대결 구도를 강조한다. 저자는 수년전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펴냄)를 출간했던 역사학자 김영두.

조선은 유교,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성리학은 철학이나 역사이기 전에, 실제 삶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정치적 가치요 이념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정부에 출사한 퇴계와 율곡은 기본적으로 현실 정치가였다. <퇴계 vs. 율곡>(역사의아침 펴냄)은 그동안 철학적 측면에 치우쳤던 성리학 연구의 경향에 정치적 특성을 부각함으로써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신선하다. 또 추상적이고 고답적인 개념들 이를테면 이와 기, 사단칠정 같은 표현들을 억제하고, 평이하고 손쉽게 해설함으로써 퇴계와 율곡의 정치적 비전과 역사적 고민을 현대 독자들에게 잘 소개하고 있는 점도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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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정치가로서 퇴계와 율곡의 대결 구도를 명확히 하려면 소재부터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즉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를 판정할 대상으로서, 퇴계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율곡의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두 상소문을 택했다. 저자는 "이 상소문들을 통해 그들이 시대적 과제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두 사람의 해결책이 어떤 면에서 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다른지 비교해보려고 했다"고 술회한다.

'무진육조소'란 무진년(1568)에 정치 현안에 대해 여섯 조목으로 간추려 새로 등극한 젊은 군주(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퇴계의 나이 이미 69세였으니 무르익은 정치적 사유가 여기 응축되어 있다고 저자는 판단한 듯하다. 한편, 율곡의 '만언봉사'는 한자로 1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임금만 보도록 밀봉한 상태로 올린 비밀 상소문이라는 뜻이다. 때는 선조 7년(1574)으로서, 율곡의 상소문들 가운데 그의 속뜻이 잘 드러나 있고 또 퇴계의 상소문과 시기적으로 가까워서 두 사상가의 정치적 식견을 비교하는데 적당한 텍스트로 보았던 것 같다.

▲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김영두 지음, 역사의아침 펴냄). ⓒ역사의아침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제1부는 퇴계와 율곡에 대한 소개 부분이다. 제2부는 퇴계의 '무진육조소' 전문을 문단을 나눠서 번역하고 또 그 맥락의 의미를 해설한다. 제3부는 율곡의 '만언봉사'에 대해서도 2부와 똑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여 해설한다. 제목에 표현된 강렬한 대결 구도와는 달리, 내용 구성은 두 사상가의 관계에 대한 소개와 각각의 텍스트 해설로 이뤄져 있다. 제목과 내용 간의 괴리가 커 보인다.

특히 책의 끝부분에라도 부제에서 밝힌 바,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에 대한 저자의 판정이 제시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용을 해설하는 가운데 퇴계보다는 율곡을 '진정한 정치가'로 보는 저자의 인식이 간혹 서술되어있기는 하다.

예컨대, "퇴계는 법률과 제도의 개혁은 중요하지 않으며, 임금이 올바른 도를 몸에 익혀 그 덕을 실천한다면 그런 것들은 저절로 바로잡힐 것이라고 판단했다. (…) 율곡 또한 '제도와 법령을 바꿀 수 있으나 왕도와 인정(仁政), 삼강오륜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율곡의 주장에서 강조점이 찍히는 부분은 제도와 법령의 변통, 시대에 따른 변화였다."(158쪽)라는 서술 속에 율곡 쪽에 기운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 두 상소문을 비교하는 가운데 퇴계의 것을 두고서, "노년에 고향에 돌아가 학문을 높이고 제자를 키우는 데 푹 빠져 산 퇴계와 매일 임금을 만나 국정을 논하고 정치를 이끌어간 율곡의 눈높이가 같을 수 있겠는가?"(219쪽)라고 평한 데서도 율곡을 '진정한 정치가'로 판정하는 저자의 시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비전을 정면으로 대조하며 비교하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앞당겨서 독후감을 요약한다면, 이 책은 퇴계와 율곡의 상소문에 대한 소개와 해설이지, 두 사상가의 정치학에 대한 본격적인 저술이 아니다. 또 두 정치가의 비전을 비교함으로써 유교 정치학의 뒷면을 드러내는 책은 아니다. 도발적인 제목에서 기대함직한, 팽팽하고 입체적인 대결은 실제 서술 속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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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상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가져봄직한 매력적인 질문, '퇴계 대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라는 화두를 야심차게 걸어놓고서는, 끝내 입체적인 대결 구도를 펼치지 못하고 평면적인 서술로 그치고 만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동일한 소재(상소문)로써 두 정치가를 비교하려는 기획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듯싶다.

저자도 지적했듯, 율곡이 평생에 걸쳐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59건에 달하지만, 퇴계의 것은 겨우 5건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 대부분이 임명을 거부하거나 물러나겠다는 '사직소'다. 이것은 곧 율곡의 정치적 사유가 잘 드러나는 소재는 상소문이지만, 퇴계의 정치적 비전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즉, 상소문을 통해 우리는 율곡의 정치학을 잘 살펴볼 수 있지만, 퇴계에게 상소문은 그의 정치학을 드러내는 데 좋은 텍스트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퇴계는 율곡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편지글을 남겨놓고 있다. (저자의 앞선 저술인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에서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퇴계가 고봉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글 속에서 그의 정치학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본다. 그 가운데서 퇴계가 율곡을 언급한 부분을 한번 찾아보자. 명종의 장례식을 앞두고 우연히 서울에 올라와 있던 퇴계는 장례식에 참여하기는커녕 황급히 낙향해 버린다. 이런 퇴계의 처신에 대해 '산새(山禽)'라느니 '이단(異端)'이라느니 조정의 비난이 물 끓듯했다. 퇴계는 이런 비난에 대해, 자기가 도교풍의 은둔자가 아니라 낙향하는 행동 자체가 성리학에서 권하는 '정치적 행위'라고 강력히 반발한다. 그 속내를 고봉 기대승에게 술회하는 가운데 율곡의 이름이 거명된다.

"내가 이번에 고향에 돌아와 버린 것에 대해 온 세상이 비웃고 욕을 합니다. 어떤 이는 저를 산새(山禽)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단(異端)이라 배척하기도 하면서 다시는 그들 사이에서 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뜻을 보였습니다. (나의 낙향의 의미를 이해할 만한) 박화숙, 이중구, 정자중, 이숙헌(곧 율곡) 같은 사람들조차 더욱 소리 높여 비난하고 내가 떠난 사실을 더욱 의심하니, 다른 사람들에게서야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첫째, 퇴계가 보기에 율곡은 자신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물러남(退)이 정계에서 은퇴하여 학문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물러남이라는 행동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항변이다.

한편, 율곡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퇴계에게 편지를 쓴 바 있다. 요지는 시급히 서울로 올라와 조정에서 정사에 임하라는 촉구다. 율곡의 생각으로는 정치의 현장은 서울(조정)이며, 유학자라면 마땅히 이 정치적 현장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퇴계와 같은 중진이 해결할 정치적 난제들이 산적해 있으므로 유학자라면 이 정치적 임무를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반면 퇴계는 정치적 현장을 조정(서울)에만 국한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자기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정치의 공간이라고 본다. 즉, 농민에게는 농촌의 삶이 정치요, 학생에게는 학교가 정치적 마당이다. 요컨대 안동(지방)에서의 사회적 활동도 정치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퇴계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정치 문제는 '물러나는 길을 뚫는 것'(퇴로의 개척)으로 보았다. 이점이 그의 정치적 행동의 한 핵심이다. 그가 물러남을 뜻하는 퇴(退)자로서 이름을 삼은 까닭도 이것이다.

퇴계가 먼젓번 정변(기묘사화)에서 조광조 등 혁신파 정치인들이 몰살당한 근본적 이유는 "물러나고자 하여도 퇴로가 봉쇄된 조선의 정치 구조 때문"이라고 결론내린 편지글을 주목해야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은 신하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날 수 있는 길이 영영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물러나기를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뭇 사람들의 분노와 시기를 사게 되어 갖은 핍박을 받고, 다시는 물러나 피하지 못하고 그들과 한데 휩쓸리고 맙니다. 이렇게 때문에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는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출사의 길 즉 진로(進路)는 존재하면서도 물러나는 길, 퇴로(退路)가 막혀있는 것이 조선의 정쟁을 발화시킨 근본 문제점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이 기묘사화의 구조적 원인이었다. 이어서 퇴계는 기묘사화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조광조가 임금께 올린 글들을 모아 요약한 것을 보내니, 한가한 때에 시험 삼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글을 본 뒤, 마치 취한 것도 같고 깬 것도 같은 상태로 근 한 달을 보냈습니다만 아직도 낫지 못한 형편입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이 사람은 어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잘못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잘못 믿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어서 결국 그렇게 된 것입니다.'(良由求退無路而致之可知)"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여기 마지막 구절에 지적된 '물러나려했지만 길이 없었다'(求退無路)라는 인식이야말로 차후 퇴계 이황의 정치적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다. 요컨대 퇴계는 당시 끊임없이 연속되는 정치적 참화 즉 사화(士禍)의 근본 원인이 나아가는 길만 있고 물러나는 길이 없는 데 있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적 과제를 이 구조를 해소하고 퇴로를 뚫는 데 있다고 자임하였고 또 이것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사실이다. 퇴계, 율곡의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율곡이 자신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퇴계가 개탄한 사실이다.

3

이렇게 볼 때, 퇴계는 단순히 정치적 현장에서 물러나 학문을 닦은 학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퇴계 스스로는 자신이 정치사상가요, 정치적 판단을 실천으로 옮긴 행동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데 대해 율곡과 생각을 달리 했던 것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상소문'을 통해서는 퇴계의 정치적 고민과 결단, 그리고 실천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퇴계에게 상소문이란 고작 '정책적 대안'(개혁안)의 제시에 불과하다. 퇴계는 상소문을 통한 의견의 개진은 효과적인 정치적 실천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처방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도리어 그에게 문제는 정치적 구조를 재편할 실제적 행동이었던 것.

그러므로 상소문을 통해 '퇴계와 율곡 가운데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를 찾으려는 <퇴계 대 율곡>의 야심찬 기획이 평범하고 기계적인 서술로 끝나버린 이유도 다른데 있지 않다. 퇴계에게 상소문은 그의 정치적 사유를 펼치는 좋은 재료가 아니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막상 상소문을 가지고 두 사상가를 비교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소상하게 글을 쓴 율곡 쪽으로 편향하게 되어 있다.

(여태 한국 인문학계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정치관을 비교해왔기 때문에, 율곡은 실학적이고 실무적이며 실천적인데 반해, 퇴계는 퇴영적이고, 관념적이며, 고작 서원을 통해 후진을 기르려고 한 교육자 정도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문장의 길이에서도 '무진육조소'는 '만언봉사'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상소문을 해설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퇴계 대 율곡>의 내용 구성 역시 분량 면에서나, 해설의 소상함에 있어서나 퇴계의 것은 율곡의 것에 비해 소략하게 마련이다. ('무진육조소'를 다루는 분량은 59쪽, '만언봉사'는 126쪽이다.)

어디 한번 눈길을 오늘날로 가져와서 두 정치가를 살펴보자.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누가 더 '정치적 성공'을 거둔 사람일까? 저자도 해설 속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 율곡의 상소문 속에 든 제안들은 거의 현실화되지 못했다. '만언봉사' 속에 그의 정치사상은 유감없이 담겨있지만, 또 그의 개혁에 대한 절실함이 후세의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지만, 그러나 그의 조언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병조판서를 맡아 분주하다가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즉 율곡은 조정(서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을 끝까지 견지했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반면 퇴계는 퇴로의 개척을 통해 당대 가장 큰 정치적 문제였던 연속된 사화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논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그의 정치적 성공은 1000원 권 지폐에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아니, 앞면 말고 뒷면이 특별히 그러하다. 1000원 권 뒷면에는 명종의 명령으로 그려진 도산서원의 풍경이 모사되어있다. 이것은 궁정에 걸려서 군주가 '퇴계를 사모한다'는 뜻을 천명한 정치적 그림이다. 즉 이 풍경화는 퇴계가 당대 정치의 핵심(군주)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성공한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물러나려는 데도 오히려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커지는 사태, 이 '역설적 힘'이야말로 유교가 꿈꾼 덕치(德治)의 동력이다(졸고, "덕이란 무엇인가", <녹색평론> 2010년 11-12월(제115호) 참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퇴계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 더욱 깊숙이는 '유교의 정치적 이상'을 성취한 사람이다. 퇴계가 개척한 '퇴로'는 정치적 현장으로부터 은퇴하는 길이 아니라, 정치영역을 확장하는 건설의 길이었으며, 이 길을 뚫음으로서 그의 정치적 비전을 당대 조선에 실현했던 것이다.

끝으로 평자 나름대로 퇴계와 율곡을 비교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율곡은 상소문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데서 상징되듯, '개혁적 정치가'로 칭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 개혁이란 기존의 체제를 인정한 상태에서 다만 그 체제 내부의 개량을 도모하는 일련의 정치적 행동을 뜻한다.

퇴계는 성리학 연구로부터 획득된 정치적 판단을 몸소 실천으로 옮겨 성공한 '혁신적 정치가'로 평가하고 싶다. 여기서 혁신이란 기존의 정치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사유와 실천을 의미한다. 오늘날 식으로 끌어와 비교한다면, 나는 율곡보다 퇴계가 더욱 래디컬하고, 진보적이었으며 결과적으로도 더 성공적인 정치가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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