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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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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프레시안 books] 정유정의 <7년의 밤>

대단한 소설이다. <프리즌 브레이크>로 대표되는 미드족 폐인처럼, 500쪽 분량의 소설을 밥과 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숨에 읽게 했으니. "거대한 상상력, 역동적 서사" "생생한 리얼리티" "여전사 아마존" "한국 문학을 선도할 대표 주자" 등, 매스컴과 출판사의 상찬을 부인할 수 없었던 하룻밤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7년 전 일어났던 세령호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사건의 전모와 범인은 이미 밝혀졌으므로 읽기를 추동하는 힘은 범인 찾기가 아니라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이미 일단락된 '사실'과 '진실' 사이의 간극 메우기이다.

일단락된 '사실'이란 이렇다. 이야기의 현재 시점에서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2004년 9월 12일 "열두 살짜리 여자 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 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가 체포되었고, 당시 열두 살이던 그의 아들은 살아남는다.

▲ <7년의 밤>(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살아남은 그의 아들, 서원은 아버지의 사형 확정 판결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사건의 목격자이자 보호자인 승환에게 묻는다. "전부 다 사실은 아니지요?" 돌아온 답은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이 소설의 '흥미진진'의 핵심은 이 확정된 "사실"과 불확정적인 "진실" 사이에 놓여있는 사건의 실체이자 맥락 탐색이다.

그 실체와 맥락은 이렇다. 서원의 아버지 최현수, 한때 프로 야구 1군에서 포수 겸 타자로 활약했으나 이제는 190센티미터(㎝)에 110킬로그램(㎏)의 거한에 어수룩하기만 한 그는 세령댐의 보안팀장으로 오게 된다. 이사 전 사택을 방문하고 오라는 아내의 등살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던 그는 광주에 들러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밤중에 낯선 길을 달리다 느닷없이 뛰어든 소녀를 치게 된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소녀를 목 졸라 죽이고 세령댐 호수에 던져버린다. 선택의 여지없이 가족과 함께 세령댐에 내려오게 된 최현수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날마다 술에 절어 자신을 학대하고 급기야 과거 우물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의 망령과 더불어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한편, 죽은 소녀 세령의 아버지 오영제는 범인을 스스로 찾아내서 복수를 감행하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가해자는 최현수이고 피해자는 오영제와 그의 딸 세령으로 최현수의 범죄는 처벌 마땅한 것이 된다. 그러나 숨은 진실은 좀 다를 뿐 아니라 이 선악의 출발점은 다른 구도로 전개된다. 세령댐 근처의 수목원 주인이자 치과 개업의, 메디컬 센터 빌딩 주인, 세령댐 일대 평야의 주인인 오영제는, 12년 동안 자신의 아내와 딸을 교정이라는 명분 하에 가혹하게 폭행하고 학대했던 잔혹한 인물이다.

그는 최현수가 범인임을 알게 되자, 몸소 깎은 몽치로 최현수를 죽이고, 수문을 닫아 서원을 호수에 익사시키려 한다. 그러나 최현수는 가까스로 탈출해서 수문을 열어 서원을 구출하려고 한다. 수문을 여는 것, 이는 곧 마을 주민들의 몰살을 의미하지만, 최현수에게는 오로지 서원의 생명을 뜻했던 것이다. 최현수의 아내는 서원을 구하려고 오다가 오영제에게 살해당하고 오영제는 사라졌으며, 이 세령호 사건은 고스란히 최현수의 만행으로 묻히게 된다.

7년 뒤, 현재의 시점에서 해저의 어둠 속에 갇혀있던 이 사건은 서원과 승환에 의해 다시 파헤쳐지는데, 이 진실 탐색은 단순히 과거 바로 세우기가 아니라 오영제가 살아 있으며, 서원을 아버지의 사형 집행과 동시에 살해하려고 한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현재적 위기에서 비롯된다. 결국 서원과 승환은 오영제를 잡고, 사건은 종료된다.

이 소설의 매혹의 핵심 요소는 이렇듯 세령호라는 사건의 실체를 탐색해가는 범죄 소설의 추리적 기법에 있으나 그밖에 다른 빛나는 요소들이 거대한 서사적 줄기를 장식해주고 있다. 가령, 소설 도입부에서 등대 마을을 찾은 스킨스쿠버 다이빙 팀의 조난 사고라든가, 오영제라는 악한이 아내 하영과 벌이는 대결, 최현수의 왼팔 마비 증상과 아내 강은주와의 히스토리 등등, 이 소설은 결코 빈약하지 않은 디테일과 캐릭터들을 대동하고 있는데, '검찰 수사관, 잠수 교관, 토목 시공 기술사, 댐 운영 관리팀'의 취재를 통해 얻었다는 전문 지식과 현장 경험은 이들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또 작가는 이 복잡하고 많은 재료들을 당차게 거머쥐었다가 수문처럼 풀어놓는 서사 장악력, 치밀한 문장력, 구성력까지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서원이라는 인물 묘사와 그의 동반자 승환이 겪는 고난과 우정의 연대는 '버디'로 묶인 그들의 잠수 동행만큼이나 매혹적이다. 세령댐에서 열두 살 서원과 함께 방을 썼던 룸메이트이자 작가 지망생, 다이버인 승환은 친척과 이웃에게 외면당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린 서원을 거둬 그와 함께 세상 끝을 전전하며 서원에서 잠수와 세상과 맞대결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끈질긴 오영제의 추적과 세상의 악의로부터 한없이 내몰리면서 서원은 분노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며, 곁을 주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세상을 견디는, 강인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런 그가 폭발할 듯한 뜨거운 파토스를 품고 바다 속에 뛰어들어 어둠 속의 자유를 느끼는 장면은 읽는 이의 감성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서원은 또한 조력자이자 이 소설의 숨은 화자이기도 한 승환이 써 놓은 사건에 대한 '미완의 소설'을 읽고 스스로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마지막을 완성하는 '행위의 주인'으로 변모하기도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버림 받은 열두 살 서원이 세상에 진입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네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기를 바란 것이지"로 전달되는 아버지 최현수가 그에게 던진 '마지막 공'이자 '사인'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데에서 완성된다. 이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야구의 비유에 빗대어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7년의 밤>은 최현수라는 포수의 지시를 받은 승환과 서원이 함께 오영제라는 강타자를 수비해낸 해결 서사, 혹은 승환과 서원이 동행 잠수를 통해 수몰된 세령호 사건에서 '다른 진실'을 캐낸 추리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열어젖힌 진실이 아니라 '갇힌 진실'이다. 앞서 언급한 이 작품의 매혹들, 소설의 속도감 있는 문체와 캐릭터, 생생한 장면 묘사 등은 '범죄' '추리' 등의 장르적 관습 안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들의 업그레이드된 테크닉이다. 대중 장르 소설의 수다한 장점을 논외로 하고 '나'라는 독자의 비평적 당파성 위에서 말하자면, 이 작품의 매혹은 웰메이드 장르 소설, '잘 빚은 항아리'가 주는 경이와 흥미 그 이상은 아니다. <7년의 밤>은 스티븐 킹, 코맥 맥카시, 미국 드라마가 갖는 흡입력과 매혹을 지니고 있으나, 그들 작품의 대개가 그러하듯 이 작품이 내놓은 '진실'은 '나'를 진정 흔들어놓거나 내 안에 오래 남아 감성과 삶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룻밤이 아니라 하룻밤 이후를 점령할 작품을 기대하는 건 온전히 '나'의 취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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