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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 없던 '그 때'를 아십니까?"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프로 야구 탄생 전후

첫 출범 때부터 "국민 스포츠"라는 별명을 사용했지만 결코 그 발전 속도가 빨랐다고 보기는 어려운 한국 프로 야구는 올 시즌을 시작하기 직전에 3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세월이 점점 더 빨라짐을 느끼겠지만 야구계에 계신 분들은 지난 30년이 참으로 빨리 흘러갔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 팀이 여덟 팀으로 늘어났고, 팀당 80경기, 전체 240경기로 시작한 한 시즌 경기는 이제 팀당 133경기, 전체 532경기로 늘어났습니다. 감독 1명에 코치 2명 정도로 시작한 코칭스태프는 팀당 15명이 넘는 분들이 1, 2군을 지도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전체 선수 수는 3배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발전 속도가 빨랐다고 보기 어렵다"는 표현을 쓴 것은 30년이 지나도록 손익분기점을 맞추지 못한 채 모기업에 의지하여 경영을 한다거나 대구나 광주 구장이 그 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추세를 보면 지난 30년간의 부족한 점이 조만간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프로 야구 출범 전후의 야구 이야기를 펼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1970년대 후반의 한국 야구

프로 야구가 생기기 전에 아마추어 야구는 고등학교 야구가 가장 인기였습니다.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이면 재학생과 동문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동대문야구장을 완전히 채우곤 했지요. 하지만 대학, 실업으로 올라가게 되면 선수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선수들이 운동에만 전념하기 어려워 서른 살을 전후하여 은퇴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1960년대에 일본으로 진출한 백인천은 1975년에 수위타자가 되는 등 해외 진출의 신화를 쌓기도 했지만 최동원이나 김재박이 미국 프로팀의 입단 제의를 받고도 군 문제로 꿈을 접어야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야구 선수의 앞날은 지극히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예외라면 대학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한 박철순이 일찍 군복무를 마치고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하여 비교적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장차 더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 점입니다.

1975년에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대회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기대에 걸맞게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타이완, 호주, 필리핀 등 5개국이 참가한 대회에서 사상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이때를 포함하여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서 모두 세 번 우승했습니다.

앞선 두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하기 이해 훗날 프로 야구 지도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 김영덕, 신용균, 김성근 등을 일본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스카우트하여 국가 대표팀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1975년 대회에서는 에이스라 할 수 있는 김호중이 일본 출신이긴 하지만 이 대회를 앞두고 데려온 선수는 아니었으므로 거의 우리 힘으로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 처음 출전하게 되었고, 2년이 지난 1977년에는 30대 중반의 김응룡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11월에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예선과 본선 성적을 감안하면 약간 운이 따른 느낌도 있으나 야구 종주국 미국을 물리치고 세계 대회 출전 역사상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은 역사에 길이 기억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국가 대표팀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던 이선희는 물론, 대학 1학년인 최동원과 김시진이 큰 역할을 했고, 최동원은 이 대회 이후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야구가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지만 선수들의 장래는 불확실하기만 했습니다. 1977년에 창단된 한국화장품을 포함하여 롯데, 철도청, 공군, 육군, 제일은행, 한일은행, 기업은행, 상업은행, 농협 등 10개뿐인 실업팀에서는 팀당 30명이 채 못 되는 선수들만 뛰고 있었으므로 약 50개 팀에서 배출되는 선수들이 갈 곳이라곤 부족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군 문제 등으로 일본이나 미국 진출이 어려운 상태에서 야구계에 종사하는 분들 중 일부는 프로 야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고등학교 야구는 인기가 있지만 대학 야구, 실업 야구의 인기가 고등학교 야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동문들이 팀을 이루어 대회를 치르는 야구대제전이 기획되었습니다.

야구대제전은 그 해 시즌이 끝난 직후 대학과 실업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출신 고등학교를 기준으로 팀을 이루어 토너먼트 경기를 벌이는 대회였습니다. 1979년에 첫 대회가 개최되자 고등학교 경기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던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었으며, 그 해 고등학교 최고 투수 중 한 명인 인천고의 최계훈은 1회전 광주일고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선수인 선배 임호균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름으로써 고등학생 신분으로 대선배들을 상대하는 경험을 했고, 팬들에게는 꽤나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이용일은 야구대제전의 성공으로 지역 연고를 둔 프로 야구 창단에 자신감을 가졌다는 회고한 바 있습니다.

잠실야구장 개장 기념 경기와 첫 홈런

1982년 당시 전국의 야구장은 좌우측이 보통 90미터, 중앙이 약 110미터 정도였으나 잠실야구장은 좌우측이 100미터, 중앙이 125미터로 설계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유례없는 큰 야구장이 건축된 것은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목표로 한 것과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와 경쟁을 할 상대국 선수들의 장타력이 우리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신 분들이 외야를 넓게 설계하여 우리의 부족한 장타력을 보완하고, 외야 수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프로 야구가 시작되기 전까지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고등학교 야구의 인기는 1981년에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KBS에서는 고등학교 대회가 열릴 때마다 매일 저녁 약 30분을 할애하여 승리한 팀의 교가와 함께 전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여 주었고, 라디오로는 전 경기를 중계할 정도였습니다.

예선에서 대구고에 패하는 바람에 그 해 첫 대회인 대통령배 야구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경북고는 두 번째 대회인 청룡기 대회에서 그 해 최강으로 여겨지던 선린상고와 결승전을 벌여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김건우, 박노준, 조영일, 이경재 등 (포수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해도) 투수력과 타력에서는 그 해 최강팀으로 여겨지던 선린상고(현재의 선린인터넷고)였지만 성준, 문병권, 류중일, 최무영, 홍순호 등이 버틴 경북고에 우승을 내 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대붕기와 화랑기는 대구와 부산에서 같은 시기에 열리는 바람에 각 팀들이 반으로 나누어 대회에 참석했으나 8월에 열린 봉황기 대회에는 모든 팀들이 예선없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경기를 치렀습니다. 결승 상대는 또 경북고와 선린상고였습니다.

설욕 의지를 다진 선린상고는 1회에 잡은 찬스에서 3점을 뽑아냈으나 홈에 쇄도하던 박노준이 부상으로 실려나간 후 결국 경기 후반에 경북고에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경북고는 여세를 몰아 에이스 성준이 빠진 상태에서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했고, 전국체전에서는 전주고와 무승부를 이룬 후 추첨으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그 해 4관왕이 되었습니다.

1982년도 고등학교 야구의 막을 여는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김종석이 이끄는 부산고와 문병권, 류중일이 이끄는 경북고가 결승에서 만났습니다. 그 전해의 4관왕 멤버들이 상당수 졸업한 경북고는 부산고에 선취점을 뽑았으나 결국 역전을 허용하여 부산고가 그 해 첫 대회 우승팀이 되었습니다.

두 대회를 마친 후 잠실야구장이 개장되었을 때 프로 야구 첫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경기장 운영 상태도 점검할 겸, 야구팬들에게 새 경기장 소개도 할 겸 우수 고교 초청경기라는 이름으로 두 대회 우승팀과 준우승팀이 참여하여 경기를 벌였습니다. 한 대회 우승팀이 다른 대회 준우승팀과 맞붙는 방식으로 진행된 대회에서 군산상고를 물리친 경북고와 북일고를 물리친 부산고가 결승에서 만났습니다.

경북고의 4번 타자 류중일은 상대 투수 김종석으로부터 동점을 깨는 홈런을 치면서 잠실야구장 1호 홈런을 기록했으나 부산고의 4번타자 김종석은 역전타를 터뜨림으로써 혼자서 북과 장구를 모두 치며 부산고에 승리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 당시 한국은 일본에 2점차로 뒤지는 상황에서 8회 말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로 동점을 만들었고, 한대화가 3점 홈런을 터뜨려 승리했다. ⓒ프레시안

전무후무한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어린이 야구는 장충동야구장, 성인 야구는 동대문야구장에서 거의 전 경기를 치르다시피 하던 한국 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장이 건설된다는 소식은 야구인들에게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1970대 초부터 한강 남쪽을 개발하기 시작한 정부는 서서히 동쪽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가면서 잠실에 새로운 스포츠 단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농구, 배구, 복싱 등이 주로 열리는 학생체육관이 제일 먼저 문을 열었고, 1982년에는 새로운 야구장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1982년은 사상 최초로 세계 야구 선수권(Baseball World Cup)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열린 13차례의 대회에서 12회 우승을 차지한 아마추어 야구의 제왕 쿠바는 우리나라와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북한과 가까운 나라여서 냉전 시대가 채 끝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일치감치 불참을 통보해왔습니다.

1980년 대회에서 주최국인 일본을 누르고 쿠바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면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우리나라의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었습니다. 주최국으로서의 체면도 있고, 쿠바가 빠졌으니 우승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1981년 시즌에 실업 야구 우승은 최동원이 입단한 롯데에 돌아갔습니다. 최동원의 그 해 성적은 17승 1패였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 친선을 위해 벌어진 경기에서 실업 선발팀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일본 프로 야구팀 롯데 오리온스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1차전에서 최동원이 완투를 하며 승리를 선사했으니 어떻게 보면 한국 야구의 승리라기보다 최동원의 승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때만 해도 다음해에 벌어질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 우승 기대는 서서히 현실이 되어가는 듯했습니다.

시즌을 마치고 휴면 상태에 들어가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졌습니다. 수개월 전부터 준비 소식이 들려올 때만 해도 '혹시나' 하던 프로 야구 출범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프로 야구 첫 시즌은 1982년에 시작되었지만 1981년 12월 11일, 롯데호텔에서 창립 총회를 가진 것이 바로 올해를 프로 야구 탄생 30주년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프로 야구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던 이용일(프로 야구 초대 사무총장), 이호헌(프로 야구 초대 사무차장) 등이 프로 야구의 출발에 관여하다 보니 프로 야구와 아마추어 야구는 상생의 길을 찾아야 했고, 타협안으로 1년간 대표 팀의 주축 선수 몇 명을 프로에 데려가지 않고 남겨놓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당대를 대표하던 최동원,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이 프로 야구 첫 시즌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군인 신분이어서 어차피 프로 선수가 될 수 없었던 김시진은 그렇다 치고, 대표팀 부동의 1번타자 김일권은 대표팀 합숙소를 탈출하여 뒤늦게 해태에 입단하는 등 어수선한 가운데 198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막을 올린 프로 야구는 관계자들이 만족할 정도로 인기를 끌어 가을이 다가올 때까지 순조로운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을이 다가와 9월 4일에 잠실야구장에서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가 막을 올렸습니다.

비록 개막전에서 약체 이탈리아에 역전패를 하면서 부진한 첫 출발을 하기는 했지만 이튿날 만 20세가 채 되지 않은 대학생 선동렬이 우리나라, 일본과 더불어 3강의 하나로 여겨지던 미국 타선을 틀어막으며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그 후로 매 경기 승승장구를 하며 일본과의 마지막 경기를 남겨 놓았을 때 두 팀은 7승 1패 동률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일본도 이탈리아에게 패했다는 점이며,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1, 2위 팀에게만 이기고 모두 지는 바람에 2승 7패로 꼴찌에 머물렀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한국 야구계를 짊어질 스타로 떠오른 고려대학교 2학년 선동렬이 완투한 마지막 경기에서 역사에 길이 남은 김재박의 개구리 점프를 동반한 스퀴즈 번트와 좌측 폴대를 맞히는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잠실야구장이 개장되고, 쿠바의 아성으로만 여겨지던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극적인 우승을 차지한 그 해에 프로 야구가 탄생되었고, 이듬해에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안겨다 준 선수들이 대거 프로팀에 입단하면서 프로 야구는 대한민국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1977년 슈퍼월드컵 우승,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과 같은 굵직한 일들과 함께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3회 우승에 얽힌 이야기(네 번째는 역시 한국에서 개최된 1983년에 아마추어 선수만으로 우승을 차지함), 국가 대표팀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본 아마추어 선수들을 스카우트한 이야기, 한일 고교 야구 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가한 재일 교포 선수나 봉황기 고교 야구 대회에 일본 전역에서 끌어 모은 선수들이 한국에 와서 좋은 경기를 보여 준 이야기와 같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2000년대에 올림픽 우승,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등의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는 구장 시설이 개선되어 쾌적한 환경에서 야구팬들이 야구를 즐길 수 있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민 스포츠"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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