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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입에 걸레를 물면 혁명이 성공하나요?

[프레시안 books] 제이슨 델 간디오의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말을 과격하게 하면 혁명이 빨리 될까?

한 때 모 진보 정당의 당원들 사이에는 '당원 게시판 들어가기 전에 꼭 우황청심환을 먹고 들어가라'는 농담이 유행했었다. 당 게시판에 너무 날 세운 언사가 난무해 가볍게 글을 올리기도 겁나고, 읽기도 겁났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혁명가들이 말을 과격하게 하면 세상이 빨리 바뀔까? 만약 그렇기만 하다면 이 더러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입에 걸레를 물고 다니기를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이 훨씬 많아 질 것이다.

▲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동녘 펴냄). ⓒ동녘
그러나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김상우 옮김, 동녘 펴냄)의 저자 제이슨 델 간디오의 생각은 다르다. 생각나는 것을 그냥 그대로 토해내는 단순 과격한 어법보다는 오히려 소통의 기술 즉 수사(修辭·rhetoric)를 익히는 것이 변혁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활동가들이 갖춰야 할 언어에 대한 책이다. 부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은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이 책은 활동가들의 글 쓰는 법, 말하는 법, 몸 쓰는 법에 대해 상세하고 실무적인 교훈을 주는 책이다.

저자는 어쩌다가 이런 책을 쓰게 된 것일까? 제이슨 델 간디오는 한마디로 말해 미국 운동권이다. 그는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2000년 봄, 나는 우연히 저녁 뉴스를 보다가 워싱턴 사람들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항의하는 장면에 붙들려 버렸다. 일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고, 갑자기 깨달았다.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는 세계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곧장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나는 자유무역과 공정 무역 문제, 반전운동, 반공화당 전당 대회, 중남미계미국인연대행동에 참여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첫눈에 반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운동에 대한 첫사랑을 시작한 간디오는 자신의 운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운동의 수사학에 대한 380쪽 짜리 책을 만들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어떻게 운동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책이다.

간디오의 철학은 간단하다. 그는 수사에 주목한다. 여기서 같은 단어를 놓고 미국 운동권과 한국 운동권 사이에 용법의 차이가 발생한다. 한국에서 흔히 레토릭이라고 하면 내용 없는 단순한 말잔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간디오는 이 레토릭을 매우 중요한 변혁의 무기로 생각한다.

책은 우선 활동가들에게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간디오가 보기에 소통은 노동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글쓰기를 예를 들어보자.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읽을 만한 글이 나온다.

일찍이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모든 초고는 다 걸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일토지세를 주장한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는 "고된 글쓰기가 쉬운 글을 만든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간디오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간디오는 훌륭한 수사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수사가 잘되어야 소통이 잘되고 소통이 잘되어야 행동도 잘 된다는 것이 간디오의 일관된 주장이다. 간디오는 '급진주의자에게 수사가 필요한 이유'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대중적 기대의 문제를 무시하고, 소통의 격차에 대해서 괜찮다고 할지도 모른다. (…) 그렇게 하다가는 잠재적인 협력자와 참가자까지 급진주의자를 외면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바로 여기에 위기의 뿌리가 있다. (…) 세계적 정의 네트워크를 창조하려면 수사적 효과가 높은 소통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 급진주의적 행동주의의 소통적 노동을 무시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반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성을 언급한 간디오는 책의 2장에서 '어떻게 실무적으로 좋은 수사를 개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특히 대중 연설과 대중적인 글쓰기에 있어서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지 간추린다. 재미있는 것은 간디오가 "대중 연설의 핵심은 무엇보다 배짱"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 운동권이건 한국 운동권이건 차이가 없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연단에 오르게 되면, 더듬고 멈칫하고 할 말을 잊기도 한다. 내용의 옳고 그름 혹은 참신함과 진부함에 상관없이 일단 배짱이 있어야 한다.

간디오는 연설 내용에 있어서 반드시 너무 많은 논점을 회피하라고 충고한다. 논점이 너무 많으면 청중들이 갈피를 못 잡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런 충고를 하는 걸로 봐서는 미국 운동권도 말이 많은 것 같다. 간디오는 연설 시간에 따른 적절한 원고 분량까지 알려준다.

그럼 글쓰기를 잘하는 비법은 무엇일까? 간디오 역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송나라 시대의 문장가인 구양수가 글을 잘 쓰는 비법에 대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의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이 문제에 관한한 왕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간디오는 결국 말이건 글이건 대중에게 전달할 때는 크게 필요 없는 세부 사항은 제외시키라고 조언한다. "대중은 세부사항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핵심일 뿐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가장 흥미로운 사항에 집중하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책의 3부로 넘어가면서 간디오는 언어의 힘에 대한 원론적인 얘기를 강조한다. 언어로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본 유물론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바보 같은 질문 같지만 유물론자에겐 심각한 질문일 수 있다. '어떻게 물질로 구성된 세상을 물질이 아닌 언어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간디오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유물론자들을 걱정한 것 같다.

간디오는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이유는? 언어가 바뀌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이 바뀌기 때문이다. 간디오는 버그만의 글을 이렇게 인용한다.

"경찰을 '짭새'라고 욕하는 것은 멍청한 짓처럼 보인다. 그 낱말을 쓰면 혁명가들이 설득하고 싶은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중립적 입장에 두고 싶은 사람들까지 적으로 돌아설게 뻔하다."

간디오는 책을 통해 차분하게 언어의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밝혀준다. 그가 이렇게 긴 설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결론은 변혁을 위해서 언어의 활용을 극대화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간디오의 언어에 대한 이론은 선전·선동론으로 이어진다.

간디오는 친절하게 선전·선동의 기본 기법도 정리해 준다. 반복. 연상. 생략. 모략. 가짜 영웅. 허위 증언 등 간디오가 소개하는 선전·선동의 기법들은 매우 흥미롭다. 이 개념들은 자기가 이런 수법을 쓰건 안 쓰건 알고는 있어야 할 내용들이다. 그 수법에 자기가 당할지도 모르니까.

저자는 책의 4부에서 수사의 범위를 아예 몸 자체로까지 확대한다. 간디오는 몸말(body language) 과 비언어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얼핏 들으면 좀 이상하다. 몸이 어떻게 메시지가 된다는 걸까? 간디오는 이런 부분에 주목한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을 생각해 보자. 그의 가면, 담뱃대, 명상에 적은 듯 느린 말투, 재치 있는 농담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특성으로 마르코스가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의 존재감 때문에 입장 전달이 잘된 것은 사실이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는 물론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소품, 전반적인 외형상의 분위기도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인 것이다.

여기서 같은 단어를 놓고 미국 운동권과 한국 운동권 사이에 또 한 번 용법의 차이가 나타난다. 간디오는 시종일관 스타일(style)을 강조한다. 간디오는 글, 말, 몸 모두에 스타일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글 스타일 말 스타일 몸 스타일이 수사(rhetoric)를 생산하고 이것이 결국 변혁을 추구하는 활동가의 대중 전달력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운동권과 달리 한국 운동권은 스타일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스타일이라는 말을 주로 외형상의 옷맵시에 국한해 사용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옷조차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운동권들은 옷을 그냥 추위를 막는 용도로만 쓴다.

책을 번역한 김상우는 저자가 쓴 이 스타일이라는 단일 개념을 글 스타일은 문체, 말 스타일은 말씨, 몸 스타일은 맵시 혹은 매무새 등으로 바꿔서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냥 스타일로 통일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우리는 사실 스타일이라는 개념의 풍부한 의미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쓴 것 혹은 말한 것 이상으로 상대방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은 자기가 쓴 것 혹은 말한 것의 절반도 잘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말과 글의 한계 때문이다. 그 자체로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활동가가 대중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할 때,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대중은 활동가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들의 몸짓과 언행 그러니까 총체적인 스타일을 통해 운동에 대해 판단한다. 이 책이 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저자 자신이 글 쓰는 법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이라 그렇겠지만, 당연히 이 책은 읽기 쉽다. 장황한 서술도 별로 없고 쓸 만한 메시지가 중심이 된 여러 개의 짧은 단락으로 책을 구성해 넘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질적인 변혁만 변혁이라고 생각하는 1차원적 유물론에 경도 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며 "뭐?! 레토릭으로 혁명을 하라고?!"라며 불만을 터트릴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은 실천 자체보다도 실천을 위한 말과 글을 비롯한 종합적인 상징의 의미에 대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늘 주입식으로 떠들어 대는 말 많은 한국 운동권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려본 나로서는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책의 원제는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 21세기 활동가들을 위한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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