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는 가수다>를 흥미롭게 봤다. 서바이벌이라는 규칙에 의해서 한명은 반드시 탈락한다는 흥미로운 요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우선,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화면 속에 비치는 가수들의 진정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장인의식이 강했고 동료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깊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간 점검에서 빠진 이소라에게서는 결벽증에 가까운, 자신의 음악에 대한 애착이 느껴졌고 하모니카를 불고 피아니스트를 대동한 윤도현에게서는 어떤 영민함보다는 우직스러움이 먼저 다가왔다. 정엽에게는 자신의 창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고 백지영은 자신의 '한'이 스스로의 음악의 원천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김범수에게는 '노래하는 것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천진난만함이 있었고 박정현에게는 한국어 발음의 부정확성이라는 단점을 타고난 리듬감으로 무화시켜버리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리고 김건모에게는 긴장과 부담을 다른 어떤 흥겨움으로 바꿀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화면에 비추어진 모습이라는 점과 편집에 의해 특정 부분이 미화되거나 과장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느낀 가수들의 동료에 대한 배려는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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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것은,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자꾸만 알 수 없는 눈물이 난다는 거였다. 그 눈물은 울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어떤 서러움에 가까워서 보는 내내 곤혹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이 짤막한 문장은 어떤 선언에 가깝다. 자신의 신원에 대해 선언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다. <나는 가수다>라는 선언 하에서, 가까이는 그들의 동료에게, 그리고 자신의 노래를 듣는 청중에게 그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음악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그들이 노래하는 모습에는 심금을 자극하는 어떤 극진함이 있었다. 이 극진함 속에는 어떤 질문이 녹아있다. 나는 가수이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이냐, 나는 이렇게 내 몸 전체로 노래해서 가수인데, 당신은 당신을 "나는 무엇이다"로 규정하고 있느냐, 나는 가수여서 가수인 것이 좋아서 미치겠어서 노래를 하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이 좋아서 미치겠는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녹아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폭력적이지 않다. 무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의 폭압적이고 공격적인 질문이 아니다. 트위터, 블로그, 인터넷 게시판 등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의 반응은 '보고 울었다'라는 내용이 그 상당량을 차지한다. 이들은 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울었을까. 그것은 혹시 노래하는 가수들의 모습이 "나는 무엇일까" 혹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를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서가 아닐까. 이 지독하게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말이다. "나는 무엇일까?"
또 하나. 방송에서 이들이 보여준 것은 말 그대로 '선의의 경쟁'이다.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이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아껴가며 경쟁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도덕관념에서의 '선의의 경쟁'은 나 혼자 살자고 타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도 소중하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 속에 있는 뼈는 '공존'이다. 공존이 불가능한 구조에서의 경쟁은 제 살 파먹기에 불과하다.
나 스스로부터 돌이켜본대 내가 왜 불특정한 사람들과 경쟁하는지 자문해 본 것이 오래이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면 지나친 책임 회피인가?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독이며 독려하며 안타까워하는 일곱 명의 가수들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이 사회의 잔인한 경쟁 구조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피로는 너무 누적됐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눈물이 날 지경이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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