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줄곧 민주를 외쳐왔다. 촛불 항쟁도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항쟁이었다. 그런데 광장의 시민은,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정신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왜소해진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제한된 권력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시민 다수를 희생시키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헌법 조문이 노래가 되었을 리 없다.
아쉬운 대로 그동안 공화(국)을 다룬 책이 몇 권 나왔지만, 광장에서 분출했던 공화국에 대한 강한 기대를 오롯이 담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정치학자 박명림과 철학자 김상봉이 공화국을 주제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펴낸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그 문제의식을 제대로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김상봉은 말한다.
"단순히 민주 국가가 우리가 꿈꾸는 참된 나라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미완의 민주화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식의 수사로 지금 우리의 과제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같이 만들어나가야 할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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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국가를 말하다>(김상봉·박명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낯설다는 것은, 공화국이 한 국가의 존립 목적이 공공의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다. 압축 성장을 하며 우리는 공공성의 가치를 높이 추켜세운 적이 없다. 경쟁과 성장, 그리고 부의 가치만이 득세했다.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승자가 되면 독식할 수 있었다. 이런 풍토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편승하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 김상봉의 말대로 "나라가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이 참된 공화국"이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던 셈이다.
공화국을 낡고 낯설게 여긴 결과는 무엇일까. 박명림은 우리 사회가 "사사화, 역근대화, 근본화, 파당화"했다고 진단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적 관점과 이익의 전면화와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의 정치권력은 늘 헌법을 짓밟았다.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건만, 독재자들은 민주주의를 억압해왔다. 촛불 항쟁 이전까지 민중들의 폭발적인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에 방점이 찍혔던 연유다.
그런데 여기에 역사의 역설이 숨어 있다. 민주주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자유를 뜻한다. 김상봉의 말대로 "모든 시민에 의한 국가"를 지향한다. 놀라운 속도로 절차적 민주화를 성취해냈지만, 자유의 다른 속성을 경계하지는 못했다. 경제적 자유, 그러니까 신자유주의가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의 극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한국 사회는 역근대화의 길을 걷고 말았다. 박명림은 이렇게 정리한다.
"근대화란 무엇입니까?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 가치, 공적 지향에의 합의를 통한 사적 신분. 출신, 세습으로 인한 주인-노예, 귀족-평민 양극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나요?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사사화, 탈공공화의 급속한 진행과 함께 재산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교육, 기회, 취업, 수입, 신분의 극심한 불평등으로 연결되고 두렵게도 점점 공동체가 갖는 공화성의 표상인 공직과 대표 구성까지 좌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헌법 제1조에 담겨 있는 정신이 실로 대단하다며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공화국이 자동으로 건설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개념은 길항작용을 일으킨다. 우리의 경험에서 보듯 민주의 확산은 공화의 축소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공공성이나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공화국이 과대해지면, 북한의 사례에서 보듯, 민주는 크게 위축된다.
그러니, 한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민주와 공화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무진장 애써야 한다. 어느 하나에 무게중심이 쏠리면 다른 하나는 파탄 나고 만다. 긴장과 중용의 정신으로 민주와 공화가 일으키는 갈등과 모순을 풀어나가야 하는 법이다.
과연, 공화 정신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려면 어찌해야 할까 궁금하다면, 김상봉의 글을 거듭 읽어보아야 한다. 특유의 서로주체성 이론과 함석헌 사상을 잘 버무린 내용이 지적 관심을 자극한다. 일면 <강의>(돌베개 펴냄)에서 신영복이 주장한 관계성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공화 정신이 실현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도 김상봉이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꾸어 보자든지, 노동자의 경영권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든지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을 내세우지만, 논리적 추론 과정이 흥미로워 찬반을 말하기 전에 경청할 만한 대목이라는 인상을 준다. 박명림은 사회과학자답게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특히 일부의 주장과 달리 우리 헌법 정신이 전통적으로 자유보다는 공화주의를 우선했다는 대목은 인상 깊다.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썼다고 하면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두 지은이의 견해차도 잘 드러나 있다. 김상봉의 대안에 대한 박명림의 비판, 박명림의 정치관과 통일 의식에 대한 김상봉의 비판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쉽다면, 논쟁이 더 확산하지 못하고 한쪽의 강한 이의 제기로만 끝나고 있다는 점이다.
공화에 대한 관심이 우리만의 공화국 건설에 멈춘다면 이 또한 바람직할 리 없다. 두 지은이가 세계 시민 의식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상봉의 말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올바른 공화적 삶에 대한 실마리가 될 터다.
"내가 내 몸 전체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내가 내 몸에 속한 모든 부분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내가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주체가 되는 것은 내가 모든 동료 시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의 주체가 된다는 것 역시 전체 세계와 인류의 아픔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주체성이란 남을 대상적으로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아파하는 고통의 연대에서 시작됩니다. 전체 세계, 인류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모두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까닭에 각자가 모두에게 좋은 것을 자기의 좋은 것으로 욕구하면서, 만남의 공동체를 확장해나가려는 능동적인 노력을 경주할 때 바로 그런 활동 속에서 세계 시민적 주체성도 생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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