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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을 김구에게 갖다 바친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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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을 김구에게 갖다 바친 안재홍

[해방일기] 1946년 3월 22일

1946년 3월 22일

그저께(3월 20일) 국민당이 한국독립당(한독당)과의 합당을 위한 당 해소 결의문을 발표했다.

작년 11월 1일 "아당은 민족 통일 전선의 전면적 완전 통일 결성이 적정 타당한 형태에서 진취된다면 이에 적응하기 위하여 무조건 해소할 용의가 있다"고 한 선언을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해내, 해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풍상 20여 년을 혁명 운동으로 일관하여 온 빛난 역사를 가졌고 또 그 정치 이념이나 정강 정책이 아당과 혼연일치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선배가 지도하는 한국독립당과 합동하기로 한다"는 결의문이었다.

한독당과 국민당은 오늘 공동 명의로 합동 선언을 발표했다.

포학한 일본 제국주의는 도괴되었건만 우리 민족 해방은 아직 성취되지 못하였고 자유인 조국의 광휘 있는 재건설을 위하여는 전 민족 총력의 집결로서 정체 없는 감투가 요청되고 있다. 국민당은 작년 9월 6단체의 합동으로 신 출발을 할 때 이미 이 의도에서 귀일집중을 지향하고 왔었다.

한국독립당은 3·1운동이 있은 이후 거의 30년 동안 해외에 본거를 둔 민족 해방의 지도 단체로서 다수한 혁명 전사가 집결되어 있다. 그 혁명의 대의는 거론할 바 없고 정강, 정책에 있어서도 독립당과 국민당은 대부분이 일치되어 관여한 바 없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무조건 합동으로써 그 질과 양에서 앙양 발전함을 꾀한다. 우리들은 온 것을 방하함에서만 모든 것을 전취할 것이다. 대중적이고 진취적인 그리고 전투적인 회통종합의 행정에는 전 민족 통합의 자주 독립의 신성 조국이 손들어 부르고 있다. 우리들은 우렁찬 아우성과 함께 호호탕탕하게 지쳐 나오는 민족 대중의 선두에서 피와 생명과 영예로써 맹투하리라. 우리들은 이 취의와 방식에 공명하고 합류하여 오는 모든 민족주의 집단에 향하여 일률로 심절한 대망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28년 3월 22일 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일보> 1946년 3월 2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밑줄 친 대목에 토를 달 필요가 있다. 상해 임정이 3·1운동 반년 후에 수립되었으니 그것을 놓고는 "거의 30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독당의 역사는 그와 다르다. 임정과 한독당 그리고 김구를 동일시하는 통념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다.

1930년에 이동녕, 안창호, 김구, 조소앙 등이 만든 한국독립당을 '1차 한독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해도 1946년 시점에서 한독당의 역사는 17년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한독당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민혁당) 창당에 참여하기 위해 해체되었다가 몇 달 후 민혁당 노선에 불만을 품고 탈퇴한 조소앙 등이 재건했다. 재건된 미니 한독당을 '2차 한독당'이라 할 수 있다.

민혁당 결성에 반대했던 김구는 2차 한독당 기간 중 한국국민당을 이끌었다. 1940년 4월 임시정부의 중경 정착을 앞둔 시점에서 김구의 국민당과 조소앙의 한독당을 포함한 우익 세력이 뭉쳐 만든 것이 '3차 한독당'이다. 김구가 이끄는 임정 주류 세력으로서 한독당은 바로 이 3차 한독당이었다. 해방 시점에서 임정의 역사는 26년이었지만, 김구가 임정을 이끈 기간은 10년이었고, 한독당이 임정의 주류였던 기간은 5년이었다.

임시정부 비주류를 흔히 '좌파'라 부르고 1941년 이후 비주류의 임시정부 참여를 '좌우 합작'이라 하는데, 이 통념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비주류의 주축인 민혁당은 1935년 창당 당시 민족 통일 전선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1927년 제정된 임시정부 약헌의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다. 단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당이 완성될 때는 국가의 최고 권력은 차당(此黨)에 있는 것으로 함"이라 한 제2조에 의거해 임정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임정 해산을 요구하며 사직할 정도로 민혁당의 '대단결'이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김구는 이 '대단결'을 외면하고 위기에 빠진 임정을 이끌기 시작했다.

창당 후 의열단 세력의 비중이 커지면서 다른 요소들이 떨어져나가기도 했지만 민혁당은 연합 정당의 성격을 지켰다. 그러다가 1941년까지 민혁당 내의 좌파가 중국공산당과의 연계를 바라보며 북상하여 떨어져나간 뒤 잔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이었다. 1945년 10월 6일자 일기에서 이 과정을 설명할 때 '김붕준 탄핵 사건'을 언급했는데, 비주류 합류 당시의 임정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옮겨놓는다.

1941년 10월 제3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외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임시정부의 결함을 지적하고 타 세력의 의정원 참여에 협조한 의장 김붕준을 탄핵하고, 새로이 당선된 27명의 의원을 제명해 버렸다.

원래 한독당 측은 임시의정원 개회를 앞두고 결원된 의정원의 보선에 관한 통지를 발하지 않음으로써 민족혁명당의 참가를 막으려고 기도하였었다. 이에 의장 김붕준이 의장 직권으로 중경 거주 각 도 선민(選民)에게 의원 보선을 할 것을 통지하여, 각 도 선민은 의원을 보선하여 의회에 출석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중국 헌병을 청하여 무력으로 보선된 의원을 축출하고 김붕준의 의장직과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김붕준 의장 탄핵안에는 김구 의원이 표결 처리하자고 동의하였고, 박찬익 의원이 재청하였으며, 김붕준의 의원직 제명처리에는 조완구 의원이 동의하여 김구 의원이 재청하였다.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170~171쪽, 주 44)

민혁당은 1941년까지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민혁당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의 상당 부분이 공산당 지역으로 넘어가면서 장개석 정부는 민혁당 세력이 임정에 참여하도록 양측에 압력을 넣었다. 경제적 지원이 압력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독당 세력은 임정의 통제력과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독점하기 위해 민혁당 세력의 참여를 봉쇄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김구는 이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국민당은 '합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독당에 '흡수'당했다. 이 합동을 주도한 안재홍은 그 과정을 3년 후 이렇게 회고했다.

중경 임정 입국 이후 임정 부내 5개당의 병립 있는 줄로 듣고 다소 실망을 느낀 바 있었으나, 한국독립당이 그 역사, 그 구성 인물로서 최대한 대표적인 당인 것으로 인정되어 일찍부터 국민당과의 합동을 내의하였던 것이다.

국민당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도 7, 8군의 지당부 및 그 준비처가 있었고, 진보적인 사녀들이 다수 입당 포섭되어 상당한 대중을 가진 터로서, 한독당과의 합동 당시 각 지방에서 그 기성 미성의 모든 지당부 인물들이 그 토대를 이루게 되었었다.

그러나 합동 선언이 겨우 발표되자, 원 한독당의 간부 제씨, 돌연 너무 고답적으로 나왔던 까닭에, 국민당의 간부와 당원 또는 그 지지자 제씨들은 섯덜하고 들레면서 합동을 도로 무르고 국민당대로 복당하자고 강경 주장하는 편이 퍽은 많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계획한 바이고, 또 이미 천하에 선포 공약한 바이니, 그새 또 뒤집는 것은 불가하다"고 믿어, 1개월을 끌어 결국 그를 단행하였다.

이때에 한독당 간부 제씨의 언동은 너무 국민당계 기타 동 신한당계의 자존심까지 깨뜨리는바 많으므로, 나는 당수이신 백범께 만나 그러한 연유를 말씀하고, 합동의 정상화를 역설하였던바, 백범도 자못 그 부하 동지의 사려 적은 언동을 분개하면서 함께 당의 전도를 위해 진력할 의사를 말씀하여, 나도 얼마큼 안심하면서 합동 추진의 정당성을 의심치 않았다.

(…) 1947년 2월 말경에 백범 당수는 한민당과의 급속한 합당 단행을 거의 명령하다시피 주장하였으나 그렇게도 못되었고, 멀지 않아 우리들은 대량 제명을 당하는 막에까지 가고 말았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438~439쪽)

안재홍은 성선설의 신봉자였을까? 그의 겸양지덕은 정말 대단하다. 해방 전 일본인들에게 유사시의 대응 원칙으로 '호양협력'을 내세운 것도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도덕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원칙을 이용하면서도 자기네 몫의 협력에는 충분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도 그는 스스로 퇴양(退讓)하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길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가 상대한 한국인들도 그의 퇴양을 이용만 하면서 보답을 하지 않는 데는 일본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퇴양은 송양지인(宋襄之仁)처럼 세상에 도움 안 되는 '어리석은 어질음'일 뿐이었을까? 겉보기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살펴보고 싶다.

비상국민회의 추진 과정에서 비주류의 탈퇴로 임정은 그림자만 남았다. 임정의 최고 권력은 원래 의정원에 있는 것이었는데, 임정원이 1945년 8월 22일 회의를 끝으로 실질적으로 소멸되었으므로 그 3개월 후 귀국한 '임정'이란 실제로 그 집행기구인 국무위원회일 뿐이었다. 그 국무위원회마저 파탄을 드러낸 이제 김구 일파는 한독당을 세력 근거로 내세우게 되었다. 중경을 떠나기 전인 8월 28일에 당의-당강-당책을 발표한 후 거의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국내 기반도 없던 한독당이 1946년 3~4월 중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을 통합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가 혼란을 극복하는 열쇠라 생각하고 강력한 민족주의 지도력의 출현을 바랐다. 그래서 임정 추대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임정의 지도력이 무너진 이제 한독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국민당을 갖다 바치면서, 그는 천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사는 심정이었을까?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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