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8일
미소공위 소련군 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첫 회담은 3월 20일 수요일 예정이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대표는 지난 17일 아침에 도착된 선발 전령대에 이어서 동 정식대표단이 18일 입경하였다. 즉 동 선발대 220여 명이 상오 9시 10분에 서울역에 도착하고 계속해서 동 10시 40분 소련 측 수석위원 T. F. 쉬티코프 중장 이하 위원 5명 등 20여 명을 실은 특별열차가 역시 서울역에 닿았다.
동 역두에는 동 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 이하 전 위원이 출영하여 굳은 악수를 교환하였다. 곧 동 일행은 李宗林 서울역장의 선도로 자동차에 분승하여서 시내 정동 소련영사관 인근과 미 제7사단 병영 내의 숙사로 각각 향하였는바, 막부 삼상 회의 결정 제3조 제2항에 의하여 조선에 임시정권을 수립하여서 3000만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건약을 쥔 동 공동위원회는 역사적 개막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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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중 조선에 관한 내용의 실행을 위한 구체적 결정을 맡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근 석 달 만에 열리는 것이다. 그 가장 중대한 과제는 조선의 임시과도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미소공위에 관한 3상회의 결정은 이런 것이었다.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2주간 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美, 英, 蘇, 華 4국에 의한 신탁 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에 備할 터인바 신탁 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동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 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美, 蘇, 英, 華 각국 정부에 회부된다.
소련 측은 이 결정이 그대로 실행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산당 등 소련의 영향을 받는 조선 내 세력이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 결정이 나온 후 이북 지역 좌익 세력이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한 데도 이 결정의 실행을 뒷받침하고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뜻이 있었다.
한편, 미군의 하지 사령관은 이런 결정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는 맥아더와 같이 미국 국익의 극대화를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국가주의 입장이었고, 미-소 간 협력을 중시하는 국제주의 입장의 이 결정에 반대했던 것이다. 막상 결정이 나오자 정부 간 공식 합의에 정면으로 반대할 수는 없게 되었는데, 이제 공동위원회 일방의 대표자로서 일종의 사보타주 전술을 구사하는 기색이 며칠 안 있어 드러난다.
소식통에 의하면 조선주둔미군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은 현재 서울에서 진행 중인 미소공동위원회는 대체로 성공적이 아니라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미국 대표는 소련군이 조선으로부터 기계를 반출하였다는 보도를 충분히 토의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소련 대표는 자기들이 지실하는 범위 내에서 기계를 반출한 사실은 없다고 하여 이상의 문제를 토의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소련 측에서는 이 문제는 그다지 중대한 것이 아니며 기계의 관리는 각 점령 지대 내의 주둔군사령관에게 달려 있다고 동 소식통은 말하였다. 또한 육군성 방면의 견해에 의하면 조선에 있는 미군은 조선의 통일을 위한 모든 방침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조선일보> 1946년 3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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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중 큰 산업 피해를 입은 소련에게는 전후 재건을 위해 기계류 확보가 큰 과제였다. 독일의 전쟁 배상을 기계류로 가져가고 있었고, 만주를 점령한 동안에도 많은 기계류를 반출했다. 그래서 이북 지역에서도 기계류를 반출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았다.
실제로 이북 지역에서 기계류 반출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정황으로 봐도 그렇다. 동유럽에서도 소련은 '우호적' 정권 수립이 예상되는 점령 지역에서는 심한 약탈을 하지 않았다. 적국이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재기를 막아야 할 독일, 그리고 국민당 정권의 중국에게 돌려주어야 할 만주에서만 적극적 약탈 정책을 시행했다.
기계 반출 보도의 "충분한 토의"를 미국 대표는 왜 요구했을까? 기계 반출이 사실이었다 해서 그것이 임시과도정부 수립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점령군은 각자의 점령 지역에서 알아서 처리할 업무가 있었다. 소련군의 기계 반출보다는 미군의 인민위원회 탄압이 임시과도정부 수립에 더 큰 장애가 될 문제였다. 소소한 문제는 각자의 재량으로 미뤄두고 임시과도정부 수립 등 주어진 과제에 몰두해야 할 공동위원회였다.
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원하는 미국 측 속셈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기계 도둑맞을까봐 걱정해 주기보다 식량 문제 잘 처리하는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네 관할의 과제였다. 충분한 생산량을 갖고도 대다수 인민이 기아에 시달리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상대방 관할 지역의 시설 유지 상황을 점검하러 나서겠다고? 회담 상대방을 화나게 하고 피곤하게 하려는 속셈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때까지는 미 국무부에서 국제주의 노선이 우세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신속하게 항복시킨 승리감이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었고, 극동국장 빈센트는 미 국무부 안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하지 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하지의 고문으로 파견된 베닝호프, 랭던 등 국무부 요원들까지 "헐 장군과 내가 바라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인물들"이라고 깎아내려야 했다.
커밍스는 이 이야기에 이어 빈센트의 곤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국무부의 점령군사령부 비판에는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1943년 이래 국무부 자체의 한국 관계 계획에 하지의 관점과 부합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한국, 또는 그 남반부가 소련의 영향이나 통제를 받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소련에 반대할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자원이 이승만과 경찰과 한민당뿐이었다.
빈센트가 베닝호프와 랭던의 수준을 깎아내린 것, 마틴이 "군인 기질"의 속성을 지적한 것도 주관적 관점일 뿐이다. 베닝호프와 랭던은 1943년 이래 한국 관계 정책 기획에 참여해 왔고, 베닝호프는 1945년 8월 초 3부합동위원회(SWNCC)의 극동소위원회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하지의 국가주의적 봉쇄 지향 노선은 존 매클로이(국방부 차관), 딘 러스크(국무부 중견 관리), 조지 케넌(냉전 이론가), 애버럴 해리먼(주 소련 대사) 등 전후 미국 외교 정책 결정에 극히 중요한 인물들이 지지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 자신도 같은 노선이었던 것 같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29~230쪽)
2월 23일자 일기에서 이 무렵의 소련에게는 '세계 적화 야욕'이 없었다는 점을 설명했다. 스탈린은 1920년대부터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해 왔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제 와서는 국가 재건과 안전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냉전을 몰고 온 '상황 변화'는 소련의 변화가 아니라 미국의 변화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소련은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주요 산업국 중 유일하게 생산력을 향상시킨 나라가 미국이었다. 향후 십여 년 동안 미국의 공업 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은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서 군사적 절대 우위를 차지한 나라였다. 생산력과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에 선 미국은 국제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1946년 미국의 연방 예산은 620억 달러로, GDP의 30% 선이었다. 대공황 전 1920년대에는 3% 선이었던 것이 뉴딜 정책과 전쟁을 거치면서 팽창된 결과였다. 전쟁이 끝났지만 방대한 예산을 급격히 줄이지 못하게 하는 관성이 작용했다. 이 관성에 명분을 붙여준 것이 '공산주의의 위협'이었다. 120억 달러의 마셜 플랜 자금은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비 유지와 함께 미국의 예산 규모를 지탱해 준 큰 기둥이 되었다.
트루먼 시대의 미국은 루스벨트 시대의 미국과 달라지고 있었다. 국제주의 노선은 약화되고 있었고, 하지의 미소공위 사보타주 전술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가 미국의 정책 결정 관계자들 사이에서 넓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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