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사에서 스피노자만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철학자도 드물다. 일반적인 분류에 따라 그를 합리론자로 간주하고 그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하자마자, 합리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다양한 주장들, 이를테면 인간의 본질이 욕망이라거나 욕망은 의지가 아니라 더 강한 반대의 욕망에 의해서만 통제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은둔자로서의 그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현실 정치 문제에 끊임없이 개입했다. 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유에 도달할 것을 역설한 철학자에게서 이런 주장을 접한다는 건 분명 뜻밖의 일이다.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의 저술 중 합리론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에티카>에 주목하고, 거기서 다루는 존재, 인식, 윤리의 문제 등에 연구 범위를 한정했다. 그런 까닭에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학논고>와 같은 저서들은 주목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철학에 이질적인 '불순물'처럼 취급받았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들뢰즈, 네그리 같은 유럽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피노자'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지만, 이런 관심에 부응하는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번역이나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2
▲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최형익 옮김, 비르투 펴냄). ⓒ비르투 |
먼저 <에티카>와 스피노자의 정치 저작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긴장이 '정치적 매개'라는 개념을 통해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티카>는 신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 자유와 구원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런 자유와 구원의 성격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구원'이 일차적으로 개인과 관련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신학정치론>과 <정치학논고>에서는 정치체의 안정과 평화라는 주제를 공통적으로 다룬다. '개인의 자유'라는 주제 역시 등장하지만, 이는 정치체의 안정이나 평화와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며,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적인 저술과 <에티카>는 논의의 대상이나 범위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고, 두 종류의 저작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의 '정치적 매개'의 전략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신학정치론>과 <정치학논고>는 이러한 전략을 잘 보여주는 저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매개'란 인간의 이성이 수동적인 정서를 압도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그 자체로 좋은 정서(가령, 사물에 대한 기쁨)가 나쁜 결과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 그 자체로는 나쁜 정서(가령, 고통이나 공포)가 간접적으로 좋은 결과를 일으키게 하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적의와 미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지배하는 자연 상태에서 공포와 희망, 연민과 수치심 등이 지배하는 사회 상태로 이행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정치학논고>의 2장이나, 자유로운 국가에서 더 능동적이고 유해한 정서들이 지배적일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신학정치론> 20장은 윤리학이 정치적으로 매개될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치학 관련 저서의 출간을 통해 스피노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정치학 저서들 간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 역시 해명할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에티카>와 정치 저작뿐만 아니라 <신학정치론>과 <정치학논고> 사이에서도 긴장이 발견된다.
전자에서는 "국가의 진정한 목적이 자유"(20장)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후자에서는 "국가의 목적은 안전과 평화"(5장)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주장이 모순적인 것은 아니지만 '국가'에 강조점을 두는 <정치학논고>의 주장과 개인의 자유에 강조점을 두는 <신학정치론>의 주장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긴장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완충 지점 역시 <정치학논고>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평화와 안전은 단순히 전쟁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국가의 성원들이 이성의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하고 긍정적인 정서들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상태다. 이 점에서 국가의 목적이 자유라는 주장과 국가의 목적이 안전과 평화라는 주장은 갈등하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강화해 주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
이처럼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줄 수 있을 뿐 아니라 21세기 현실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지침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스피노자의 정치학적 저술(의 출간)은 의미를 가진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서 촉발된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화 요구는 이집트를 거쳐 리비아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이슬람이라는 단일 종교 아래 강한 응집력을 보여 온 이슬람 국가들의 철권통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민주화 운동의 요구가 시민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슬람 문명 자체의 균열을 얘기하기도 하고, 혹자는 시민운동의 배후에 이슬람 세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이슬람 문명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전제정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으며, 그 결합 정도가 더 강할수록 그럴 위험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신학정치론>에서 외쳤던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가르침은 21세기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민주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는 귀족정이나 군주정과 같은 하나의 정체로 민주정을 논하는 부분과 근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를 논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오늘의 현실과 관련해 주목할 수 있는 건 근본적인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절대적인 국가"(<정치학논고> 8장 3절과 7절)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만약 절대 통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중 전체가 보유하는 권력"(8장 3절)이라는 구절을 염두에 둘 때,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대중 전체가 보유한 권력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대중의 집단적 욕구와 의지가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성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으며,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현재적이게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정체가 절대적 통치에 근접할수록 지속 가능하며 가장 좋은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맞는다면, 민주주의는 모든 종류의 정체가 가장 잘 지속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패한 민주정보다 민주적인 군주정이 더 나은 정체라고 할 수 있다.
4
스피노자의 정치학적 저술, 특히 <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의 저술 중 가장 길뿐만 아니라 다루는 주제 역시 포괄적이기 때문에 이제까지 번역이 안 된 저서였다. 이런 현실에서 비록 중역판이긴 하지만 <정치학논고>와 <신학정치론>의 완역은 전공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데군데 보이는 어색한 번역어는 이후 좀 더 완성도 높은 번역을 위해서라도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먼저 '자유 의지'(397쪽)로 번역된 '리베라 볼룬타스(libera voluntas)'는 오해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인과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스피노자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의지라는 의미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부정하는 자유 의지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유로운 의지' 정도로 번역을 하고, 이것이 '자유 의지'와 다른 것이라는 점을 각주에서 보충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대중'(20쪽)이라고 번역한 '불구스(vulgus)' 역시 아쉬운 번역어다. 스피노자는 상상과 편견에 빠진 '군중'과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의지를 행사하는 '대중(multitudo)'을 구분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이후에 좀 더 수정·보완된다면, 보다 완성도 높은 번역본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