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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속에서 빛난 日 이타심…인간은 이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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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속에서 빛난 日 이타심…인간은 이기적인가?

[공작의 꼬리 경쟁·3] 이기심과 이타심

이기심과 이타심

앞 편에서 인간의 본성을 경쟁으로만 파악하는 것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우리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몇 백 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통한 인류의 삶보다는 몇 만 년 인류가 지내온 삶을 봐야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경쟁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아마도 경쟁에 바탕을 둔 현대 물질문화의 색안경을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는데 따른 오류일 것이다.

경쟁은 이기적 인간을 전제로 하며, 그와 반대로 협동은 이타적 인간을 전제로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경쟁이 자신을 희생하게 되고, 또 협동이 자신을 이롭게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공동체에서는 이기적 행위가 결국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이웃을 도와주는 이타적 공동체에서는 그 행위가 단기적으로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그런 도움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뿐더러, 공동체의 생존이나 번성에 기여함으로써 종국에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결국 남을 위하는 행위가 자신을 위하는 행위가 될 수 있고, 또 자신을 위하는 행위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개인과 사회의 이해가 일치되기도 하지만 또 대립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근원

그러면 이기심 또는 이타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기심이나 이타심은 식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 본능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사회라는 존재를 전제로 하며, 그 속에서 자손 번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 결정되는 부차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생물 진화의 관점에서 경쟁심이 우리의 본성인가, 아니면 이타심이 우리의 본성인가 하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다시 풀어 써볼 수 있다.

경쟁심을 가진 종족이 번식에 유리할까, 아니면 이타심을 가진 종족이 번식에 더 유리할까? 만약 경쟁심을 가진 종족이 이타심을 가진 종족에 비하여 번식에 유리하면 그러한 종족의 인구는 더 많이 늘게 되고, 그래서 경쟁심을 가진 개체가 인간을 대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경쟁심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경쟁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경쟁심 때문에 번식에 성공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과거 부족이나 씨족 사회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같은 경쟁 사회였기 때문에 번성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현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개인의 이해와 공동체의 이해가 밀착되어 있었다. 현대의 개인은 그 행위가 국가라는 큰 공동체에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과거의 씨족이나 부족 사회는 현재의 국가와는 달리 안정된 대규모 집단이 아니었다. 한 개인의 행위는 공동체의 생존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공동체의 생존 여부는 각 개인의 생존을 결정했다. 이러한 사회는 이기적 개인들로는 유지될 수 없으며, 이타적 인간에 기초한 협동과 유대가 절실히 요구되는 사회였다.

이러한 논의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인간이 경쟁적 아니면 이타적이라는 양분법으로 규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경쟁적이지도 않고, 이타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경쟁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 사회에서의 개인의 이해는 복잡하게 분리된다. 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의 생존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위하는 행위가 요구되지만, 이는 자주 개인의 이해와 대립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행위를 조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 인간이 어떤 환경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다른 환경이나 대상에 대해서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이타적인 행위가 장기적으로는 결국 그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어 이기적 행위로 해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 지난 11일 지진, 쓰나미(지진 해일) 등의 대재앙을 겪은 일본인들이 참사 속에서도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미야기현 현청 소재지인 센다이에 있는 공항에서 주민들이 구조되는 장면 ⓒAP=연합뉴스

최후통첩 게임

이기심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이타심이 타인을 위하는 것이라면, 공정성 또는 공평성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정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으며,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정하게 나누려 하고, 다른 사람 역시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주위에서 남을 돕는 예들을 자주 접한다. 길에서 누군가 다쳤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사람들은 기꺼이 돕는다.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기까지 한다. 경제학은 대개 이러한 현실을 부정한다.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이성적(이기적) 인간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특히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도 남을 돕는 행위를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이기적 동기에 의해 행동할까? 경제학에서는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가정에 따르는 인간은 공평성과 같은 가치는 부정한다. 그래서 내가 돈을 더 차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고려하여 공평하게 나누는 행위를 부정한다. 또 상대가 공평하지 않으면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상대를 처벌하려는 공정한 인간을 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이 갖는 공평성이라는 특성을 최후통첩이라는 게임을 통하여 실험적으로 관찰한 결과가 있다.

만약 당신이 '을'이라는 사람과 함께 돈 1만 원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돈을 벌려면 '을'이라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을' 역시 당신 없이는 그 돈을 벌 수 없다. 당신이 을에게 얼마를 제공하고, 을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묻는다.

만약 을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1만 원을 당신이 제안한 대로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을이 그 제안을 거부하면 1만 원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 버리고, 당신과 을 모두 한 푼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얼마를 을에게 제공하겠는가? 1원, 3000원, 5000원, 9000원을, 아니면 얼마를 을에게 제공하겠는가?

물론 을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고, 1만 원을 모두 갖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을이 당신의 어떤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가 문제다. 을은 1원의 제의를 받을까? 만약 액수가 너무 적어 거절한다면, 당신도 한 푼을 벌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1000원은 어떨까? 아니면 5000원 이상이 되어야만 을이 그 제안을 받을까?


이런 게임을 최후통첩 게임이라고 한다. 게임 이론에서는 갑과 을이 모두 이성적이라는 가정, 즉 갑과 을 모두 개인의 이기적인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게임 이론에서의 균형은 놀랍게도(?) 당신이 을에게 1원을 제공하고 을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불가능한, 제안자가 9999원을 갖고 응답자는 거의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극단적이 답이 균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해하지 못할 결과는 각 개인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 1원을 준다고 했을 때 을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1원을 벌고, 거부하면 1원조차 벌지 못한다. 그래서 을이 이성적이고 개인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이기적 사람이라는 가정 하에 1원을 버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을이 이렇게 이성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갑은 을에게 1원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 된다. 그 결과로 갑은 9999원을 벌게 되니까.

이 예에서 이성적 인간으로서의 갑이나 을이라는 사람은 보통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이성적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면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이 상황을 실험을 통하여 알아본 결과, 약 60%는 4000원에서 5000원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리고 2000원 미만을 제공하는 사람은 4%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2000원보다 낮은 제안에는 50% 이상의 사람이 이를 거부한다고 한다. 실험을 통하여 나타난 사람들의 실제 선택은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이기적 개인의 이익 극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분배의 공정함 같은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공정한 분배에 대하여 인식을 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예가 많지만, 공정성 같은 개념을 단지 공허한 관념으로만 보고 인간을 이성적인 개인의 이익 극대화라는 단순한 가정에만 집착하면 현실을 볼 수 없다. 개인의 이익 극대화의 논리를 따르면 을은 2000원이든 1000원이든 간에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1000원이라도 받는 것이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한 을의 이성적 행위를 간파한 당신은 당연히 1000원만 주어야 한다. 4000원이나 5000원은 바보 같은 제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정상적인 현실이 바보 같은 제안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 이성적(이기적)이라는 비현실적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4000원이나 5000원의 제안은 결국 바보 같은 제안이 아니고, 이론이 아닌 실제 인간이 선택하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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