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에서 OB(두산의 전신), MBC(LG의 전신), 삼미(넥센의 전신), 해태(기아의 전신), 삼성, 롯데가 프로야구팀을 창단함으로써 6개 팀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7구단 빙그레(한화의 전신), 8구단 쌍방울(SK의 전신)이 합류했습니다. 그 후 20년이 넘도록 새로운 구단은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9구단의 탄생이 예고되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으니 조만간 새로운 방식의 프로야구 경기를 보게 될 수 있을 듯합니다.
3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프로야구 제7구단 빙그레
7구단인 빙그레가 프로야구 1군 리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6년이었습니다. 첫 해를 꼴찌로 보낸 빙그레는 다음해에 6위로 한 단계 올라가더니 3년째인 1988년에는 4강을 목표로 한다던 목표를 넘어서, 한국시리즈에 출전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까닭에 잘 하면 우승을 넘볼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1988년부터 5년간 네 차례 준우승을 이루고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한화로 이름을 바꾼 후인 1999년에야 정상에 올랐습니다. 14년 만에 이룬 성과였습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될 때 대전과 충청 지역을 연고로 팀을 창단한 OB는 창단 당시 한국야구위원회에 3년 후에는 서울로 연고지로 옮겨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1985년부터 OB의 연고지는 서울이 되었고, 빙그레는 같은 지역을 노리던 동아건설이 발을 빼는 바람에 어렵지 않게 대전과 충척 지역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승까지는 14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제는 서서히 전설이 되어 가는 선동렬이 연간 방어율 0점대를 기록하던 전성기에 빙그레는 유일한 맞수로써 창단 3년째부터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와 자웅을 겨뤘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선수 구성에 어려움이 적었던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아마추어 국가대표 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상군과 한휘민이라는 두 명의 걸출한 투수와 함께 선수층이 두터운 삼성에서 지명을 않거나 넘겨받은 황병일, 이강돈, 김성갑, 이정훈, 대전과 충청 지역 출신으로 1980년을 전후하여 지역민들에게 우승을 선사하던 김상국, 전대영 등 타 팀에서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창단을 전후하여 빙그레에 모여 들었습니다. 물론 1군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한 이효봉, 민문식, 공재선 등과 같이 기대로만 끝난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 주었다면 혹시나 한 번쯤은 우승을 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들이 신생팀으로서 형님들로부터 뭇매를 맞는 것을 견뎌내는 사이에 송진우, 한용덕, 장종훈 등 훗날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스타로 자라나는 선수들이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고, 그 결과 빙그레는 선수 수급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여건 속에서도 빠르게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대로 잘 나간 제8구단 쌍방울
프로야구가 시작될 때 "6개 구단으로 출발하지만 3년 후 한 팀, 6년 후 한 팀을 창단하여 8개 구단으로 리그를 운영하겠다"던 프로야구위원회의 약속은 빙그레가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86년에 리그에 합류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8구단인 쌍방울은 예정보다 2년 늦은 1991년에 리그에 합류했지만 이 정도라면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로 프로야구를 탄생시킨 한국야구위원회의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쌍방울이 탄생하기 전에는 해태가 전라남북도를 연고지로 했으나 주로 광주에서 경기를 했고, 쌍방울이 탄생하면서 해태는 전라남도, 쌍방울은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논리를 접목시키자면 당시 인구 200만 정도였던 전라북도에 프로야구팀을 창단한다는 게 불합리할 수도 있었지만 전라북도에 야구팀을 창단한다는 것은 프로야구가 생길 때부터 공론화된 일이었습니다.
이미 야구 명문이라 할 수 있는 군산상고 출신들이 해태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고, 1986년 대통령기는 조규제가 이끄는 군산상고가 김병주의 경남고를 누르고 차지한 바 있습니다. 이보다 1년 앞선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는 2학년생 박성기가 이끄는 전주고가 광주진흥고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니 쌍방울로서는 아마추어 시절에 대성 가능성을 보여 준 두 투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시점상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쌍방울은 1991년 개막 경기에서 조규제가 완봉승을 거두는 호투 속에 그 전해에 입단하여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끈 송진우의 한화를 11대 0으로 대파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뚜렷한 선발 투수가 부족한 상태에서 개막전 이후 성적이 부진하자 감독 김인식은 조규제를 마무리로 돌렸고, 지금처럼 한 회만 책임지는 게 아니라 앞서 있기만 하면 언제든 등판하던 조규제는 1년 동안 단 네 번만 선발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142.1이닝을 던지면서 9승 7패 27세이브, 방어율 1.64를 기록했습니다. 그 결과 쌍방울은 0.425라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승률을 기록하면서 0.413의 승률을 기록한 OB에게 꼴찌 자리를 넘겨주고 창단 첫 해에 7위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빙그레의 첫 해 승률이 0.290이었고, 프로야구가 29시즌을 보내는 동안 0.3 아래의 승률을 기록한 팀이 네 번이나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쌍방울이 첫 해에 거둔 성적은 꽤나 호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4년간 꼴찌와 꼴찌에서 2등을 오가던 쌍방울은 창단 멤버들이 전성기에 접어들고 김원형, 박경완 등 고졸 신인 선수들이 주축으로 한 우뚝 선 몸 풀이를 마치고, 1996년과 1997년에 연속해서 3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그 해 말 외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한국의 경제 상태가 문제가 되면서 모기업도 어려움이 처하게 되어 선수를 팔아넘기면서 팀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2000년에 쌍방울을 인수한 SK는 첫 시즌에 꼴찌에 머물렀으나 서서히 팀을 안정시켜 2007년에 드디어 우승을 하게 되었으니 쌍방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17년만의 우승이었습니다. 빙그레나 쌍방울 모두 팀을 처음 만든 후 우승까지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야했지만 2위나 3위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이 정도라면 리그에 연착륙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 2013년 입주 예정인 엔씨소프트 판교 사옥. ⓒ엔씨소프트 |
9구단, 신인들로만 팀을 구성하라는 말인가?
"9구단, 신인들로만 팀을 구성하라는 말인가?"라는 제목은 <동아일보> 기사에서 인용한 제목입니다. 한국야구위원회와 8개 구단 대표들이 모여 창단을 승인한 9구단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선수를 지원할 것인지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토의를 한 다음 공식적으로 지원책을 발표했으나 여러 매스컴에서 그 정도의 지원책으로는 신생팀이 리그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거두기가 어려울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은 둥글고, 주사위는 던져봐야 알므로 실제로 리그에 참여하여 경기를 벌여보기 전에는 9구단이 어떤 성적을 거둘 것인지 예상하기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99.9% 확실한 것은 미국에서처럼 창단 4년 또는 5년 만에 우승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프로축구와 비교해 보아도 프로야구에서 신생 구단이 선수를 확보하는 일은 엄청나게 더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실업 야구가 한국 야구의 최고를 자랑하고 있던 1976년에 신생팀인 롯데가 리그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일은행, 기업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농협 등 다섯 개의 금융팀과 한국전력, 육군, 공군, 철도청 등 네 개의 실업팀으로 구성된 한국 실업 야구에 처음 등장한 롯데의 1976년 시즌 성적은 종합 우승이었습니다. 이듬해 11번째 팀으로 리그에 참여한 한국화장품은 봄철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창단 첫 해 우승을 꿈꾸었으나 에이스 황규봉이 부상을 당하면서 준우승에 머무르기는 했지만 강산이 세 번하고도 반이 지난 과거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프로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로 아마추어 대표팀을 구성하고, 여기에 용병 선수를 3~4명쯤 출전시킨다 하더라도 100경기 이상 프로팀과 경기를 하게 되면 3할 승률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970년대와 다르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수한 선수들이 대학 대신 프로를 선택함으로써 아마추어 야구계에 훌륭한 선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프로화가 된 지 30년이 지나다 보니 선수들의 몸 관리와 프로 의식이 단단해져서 실력과 선수층이 동반 상승된 것이 그 이유입니다. 따라서 승부의 향방을 조금이라도 예측하기 어렵게 하려면 기존의 구단에서 선수를 지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빙그레가 창단 첫 해에 0.290의 승률로 꼴찌를 차지할 때는 0.302의 승률로 꼴찌 각축전을 벌인 청보라도 있었기에 그나마 프로야구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0.188로 삼미가 역대 최하의 승률을 기록한 1982년은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해였으므로 야구팬들도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며 경기 자체를 즐겼을 뿐이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팀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선수를 팔아넘기면서까지 운영비를 마련하며 고군분투했지만 쌍방울이 0.224의 승률밖에 올리지 못한 1999년에는 위기 상황을 느낀 한국야구위원회가 나서서 읍소를 하다시피 하여 SK에게 인수를 부탁한 바 있으며, 가장 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롯데가 0.265의 승률밖에 올리지 못한 2002년에는 부산에서 팬들의 폭동(?)이 일어날 뻔한 것은 물론 연간 야구장에 들어온 관중 수에 있어서 1989년 이후 지금까지 22년 중 최저 관중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9구단 엔씨 소프트가 한국야구위원회의 선심(?)에 힘입어 FA 선수를 3명이나 영입할 수 있을지, 너무나도 몸값이 올라버려 포기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아마추어의 대어(?)급 선수를 영입하고, 각 팀마다 50명에 포함되지 않은 선수를 골라서 데려온다 해도 현재의 선수 수급 방안으로는 다섯 번째로 시즌 승률 0.300이하를 기록하는 팀이 될 것이고, 한 팀이 더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관객 수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9개 구단이 리그를 벌이면 한 팀이 쉬게 되어 당장은 몰라도 빠른 시일에 10개 구단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번에 발표된 정도의 선수 수급 방안이라면 과연 누가 구단을 운영하겠다고 나설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플로리다 말린스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그랬듯이 구단이 적절히 투자를 한다면 단 시일에도 우승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갖추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야 모든 경기가 승부를 점치기 힘든 상태로 진행되어 팬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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